[include(틀:요사)] [목차] == 개요 == 蕭惠 (983 ~ 1056) 요나라의 인물. 자는 백인(伯仁). 소자는 탈고사(脫古思). 소아고지의 5세손. == 생애 == === [[성종(요)|성종]] 시기 === 처음에는 중궁의 친척이라고 해서 국구상온이 되었고, 1010년에 백부 [[소배압]]을 따라 [[고려]]를 정벌하러 갔다가 노고달 산맥의 고개에 이르렀는데, 고려군이 험준함에 의지해 강력히 저항하자 힘껏 싸워서 격파했다. 개경을 공격하는 것에도 참가하면서 그의 부대는 군율이 정숙한 것이 알려져 후에 거란행궁 도부서가 되었으며, 1013년에는 남경통군사가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이리필,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요동이 요충지라 해서 공훈이 있는 야율씨가 아니면 임명하지 않았지만, 소혜는 동경유수사에 임명되었으며, 고쳐서 서북로초토사에 임명되고 위국공에 봉해졌다. 1026년에는 위구르의 아르슬란부(아살난부)를 토벌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군사를 모았고, 조복(阻卜)의 추장 직랄(直剌)이 늦게 도착하자 그를 참수해 그 수급을 돌려서 보였다. 소혜가 군을 이끌고 아르슬란 위구르의 도성인 감주를 공격해 3일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돌아갔다. 조복의 다른 추장인 오팔(烏八)이 직랄의 아들이 군사를 모아 공격할 것이라 했으나 소혜는 믿지 않았는데, 조복이 공격하면서 소혜는 크게 고전했다. 열로고, 해리, 아불여 등이 3천 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오다가 가돈성(코툰성) 서남에서 적과 조우했다가 대패해 해리, 아불여가 전사했다. 소혜는 패잔병을 모아 진영을 벌이고 있었는데, 적이 갑자기 공격하자 장수들이 반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소혜는 아군의 피폐함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추장 오팔이 야습을 제안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혜의 군사가 반응하지 않자 조복군이 지쳐 돌아가기 시작하자 소혜는 매복을 통해 적을 공격하기로 해서 선봉을 보내 조복군을 유인하려고 했는데, 조복군은 응전하지도 않고 달아났다. 초토사를 맡아 여러 번 적의 공격을 감당해 군사와 말이 모두 피폐하자 1027년에 남경시위친군마보군도지휘사가 되었다가 남경 통군사가 되었다. === [[흥종(요)|흥종]] 시기 === 1031년에 흥종이 즉위하자 지중흥부, 순의군절도사, 동경유수, 서남면초토사를 지냈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시중, 정왕, 추성협모갈절공신에 봉해졌다. 1037년에는 거란행궁 도부서, 수태사에 임명되면서 조왕에 책봉되었고, 남원추밀사를 거쳐 제왕에 봉해졌으며, 1040년에는 흥종이 송나라와의 국경에 있는 3개의 관문을 빼앗을 계책에 대해 묻자 송나라가 서하를 치느라 군사가 피폐하니 직접 군을 이끈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소효목이 이에 대해 반대했고 흥종이 소혜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게 10개의 성을 요구하면서 군사를 연 지역에 집결시켰는데, 소혜는 야율중원과 함께 남하해 송나라의 성 10개를 함락시켰고, 송나라에서는 세폐를 더 주겠다면서 평화 협상을 요청하고 이 공으로 소혜는 한왕에 봉해졌다. 1043년에 북부재상 겸 동지원수부사, 북추밀사에 임명되었다. 1044년에 서하의 이원호가 산음 남쪽의 탕구트족을 이용해서 요나라를 위협하자 흥종이 서하를 직접 공격했는데, 이원호가 두려워 항복을 청하자 소혜는 오랜 은혜를 잊고 간계를 꾸몄다면서 말로만 항복하고 약탈한 것을 돌려주지 않는다면서 이원호가 직접 나와서 맞이하도록 해야 한다며 저들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흥종이 옳다고 여겨 계속 공격하기로 한다. 요나라의 군사가 나아가자 서하의 군사는 황하강 서안에 말을 세우면서 방패로 덮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소혜는 돌격해 격파했고, 서하의 군사가 달아나자 선봉과 우익을 이끌고 추격했다. 서하의 1천여 기병이 달려나와 요나라의 군사를 공격하러 나왔는데, 갑자기 앞에서 큰 바람이 불어 모래가 요나라의 군사의 눈을 가리면서 크게 어지러워지자 서하의 군사가 공격하자 요나라의 군사가 서로 짓밟아 수많은 사상자가 나와 대패하면서 흥종이 군사를 철수시켰다. 1048년에는 진진국대장공주 야율암모근과 결혼해 부마도위가 되었고 1049년에는 흥종이 다시 서하를 공격하자 별동대로 배에 올라 황하를 따라 남쪽으로 갔는데, 전함과 양곡을 싣는 배가 수 백리를 이뤘다. 적지에 들어가서도 장비를 군사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채 수레에 실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적의 기습을 우려하자 황제 폐하가 있는 곳을 공격하기에 우리 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장비를 주면 짐만 될 것이라 했다. 군사들이 진영을 갖추기 전에 서하의 군사가 오고 있다고 하자 허위 보고라며 질책하려고 했는데, 서하의 군사들이 공격하자 갑옷도 입지 못하고 달아났다. 화살 공격을 받았고 소혜는 살았지만 아들 소자씨노 등을 포함해 여러 군사들이 전사했으며, 흥종은 아들까지 잃은 것을 감안해 죄를 용서했다. 1050년에 늙었다는 이유로 은퇴를 청했다가 흥종이 가마를 하사해 가마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전각에 올라오라고 했는데, 소혜는 다시 은퇴를 청해 허락받아 위국왕에 책봉되고 겨울, 여름에는 황제가 체류하는 곳으로 와서 정책 결정에 참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은퇴하고 집에 머물러도 흥종은 수시로 탕약과 여러 물품을 보냈으며, 소혜의 생일에는 시를 하사해 총애했고, 1056년에 사망하면서 검소하게 상을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흥종이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면서 3일간 조정의 일을 중단하게 했다. 소혜는 성품이 관대하고 검소했는데, 흥종이 마음대로 보물을 골라서 가져가도록 했으나, 황실의 외척으로 요직에 있어서 녹봉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으며, 노비도 1천 명이나 되어 부족하지 않다면서 폐하께서 하사하시면 신보다 가난한 신료들을 무엇으로 대우할 것이냐고 사양하자 흥종이 감동했다. 소혜는 장수가 되어 여러 차례 패하면서도 흥종이 처벌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였다. [[분류:983년 출생]][[분류:1056년 사망]][[분류:요나라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