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광해군의 후궁[br]{{{+1 소용 임씨 | 昭容 任氏}}}'''}}} || || '''출생''' ||[[1595년]][*출처 서치상. (2020). 광해·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 건축역사연구, 29(1), 65-76.][*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1598년생이고 위 논문에 나오는 《해인사 수다라장 상량문》에 따르면 1595년생인데, 전자는 100여 년 뒤에 집필된 [[야사]]집이고 후자는 당대에 쓰인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1595년생이라고 보는 게 더 신빙성이 높을 것이다.] || ||<|2> '''사망''' ||[[1628년]] [[1월 20일]] (향년 33세)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 ||'''{{{#ffd400 조선 소용}}}''' || ||[[1610년]] ~ [[1623년]] [[4월 1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임(성씨)|풍천 임씨]] || || '''휘''' ||애영(愛英) || || '''부모''' ||부친 임몽정(任蒙正)[br]모친 임몽정의 첩 || || '''배우자''' ||[[광해군]] || || '''봉작''' ||'''소용(昭容)'''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광해군]]의 [[후궁]]. 당대에 가장 총애받은 후궁으로,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왕]]이 끝까지 사랑하여 함께 거처한 자는 임씨(任氏)·[[소용 정씨(광해군)|정씨]](鄭氏)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12030_002|두 소용(昭容)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임씨가 그녀를 가리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임국로(任國老), 아버지는 대사성을 지낸 임몽정(任蒙正)이고, 어머니는 임몽정의 첩이다. 1628년(인조 6)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된 임취정(任就正)의 [[조카]]이기도 하다. == 생애 == 소용 임씨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는데, 1610년(광해군 2년)에 외할머니가 연줄을 타서 궁중에 바쳤다고 한다.[* 생모의 이름이나 외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소용 임씨는 용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약은 데다가 아첨을 잘 부려서 총애를 얻었다. >임 소용(任昭容)은 부제학 몽정(蒙正)의 첩의 딸이며, 판서 취정(就正)의 질녀이다. 일찍 부모를 잃고 그녀의 외가에서 자라 임씨 집안과는 인연이 끊어져서 서로 알지 못하였는데, 경술년 나이 열세 살에 그 외조모가 연줄을 타서 궁중에 바쳤다. 취정(就正)이 막 원주목사(原州牧使)가 되었다가 말을 듣고 매우 놀라 글을 보내 중지시켰으나,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취정이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고 여러 해 벼슬자리를 옮기지 못하였고, 얼마 후에 조금 승진되었으나 가문이 화를 입었다. >---- >《[[연려실기술]]》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정사와 상반된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임취정이 자기 형인 임몽정의 첩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냈으며, 나날이 총애가 높아가 [[이이첨]]과 비슷한 권세를 누렸다고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9025_004|나온다.]] 실제로 임취정은 형조 참의, 좌승지, 이조 참판, 예조 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광해군 시기에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소용 임씨와 임취정은 몰락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또다른 후궁인 [[귀인 윤씨]]는 처형되고, 다른 후궁들은 [[유배]]를 갔는데 소용 임씨만은 운 좋게 살아남아 [[강화도]]로 가서 광해군을 모시게 되었다. 모두 소용 임씨가 [[이귀]]와 [[김자점]]의 뇌물을 받고 광해군 앞에서 비호해준 덕분이었다. >임씨는 일찍이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이 고변당할 당시 두둔해 준 공이 꽤 있었기 때문에 용서받아 죽지 않았으므로 위리(圍籬)에서 폐주를 모시게 되었다. >---- >《[[인조실록]]》 인조 1년 9월 14일 1628년(인조 6) 류효립 등 [[대북]] 세력이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한 것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특히 류효립의 종이 강화도까지 와서 광해군의 [[내관]], [[궁녀]] 등과 내통하였다는 고발이 있었기 때문에 [[인조]]는 임씨를 잡아오게 하였다.[* 인조실록 18권, 인조 6년 1월 3일 을축 6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1003_006|#]] ][* 당시 광해군의 다른 나인은 작은 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고, 임씨도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아서 잡혀가게 된 것이다. ] >임금이 안팎이 엄하지 않았다 하여 지킨 자를 처벌하고, 또 한 방에 있던 임 소용(任昭容)을 잡아와서 대궐 뜰에서 국문하였으나, 끝내 그 편지가 누구에게서 나온 것임을 몰랐다. [[신흠]](申欽)이 국청의 여러 재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옛 임금의 총희(寵姬)가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도 막지 못하고, 또 그 형을 받는 것을 내려다보고 지휘하였으니 후세의 의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속잡록》에서는 임씨는 이때 잡혀와서 국문을 받다가 처형 당한 것으로 나오지만, 《[[승정원일기]]》에서는 국문을 받던 도중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 승정원일기 20책 (탈초본 1책) 인조 6년 1월 20일 임오 2/9 기사. [[http://sjw.history.go.kr/id/SJW-A06010200-00200|#]] ] [[분류: 조선의 후궁]][[분류:1595년 출생]][[분류:1628년 사망]][[분류:풍천 임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