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국의 정원)] [[파일:attachment/SSgarden.jpg|width=600]] [* ⓒ 2007 by 방형준(才誠) , [[http://www.liberotown.com/2007/05/01/07040506-%EB%8B%B4%EC%96%91-%EC%86%8C%EC%87%84%EC%9B%90-%E6%BD%AD%E9%99%BD-%E7%80%9F%E7%81%91%E5%9C%92/]] ][*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광풍각이라는 이름의 [[정자(건축물)|정자]]이며, 앞의 누운 나무는 나무로 된 [[수로]].] [목차] == 개요 == 瀟灑園 [[조선]] 중기에 건축된 한국 전통의 별서[[정원]].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해당 지역 이름이 본래는 남면이었는데, 가사문학면으로 바뀐 것이 소쇄원의 존재로 인한 것이다.] 지곡리에 있다. 근처에 전라남도 교육연수원이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과 어우러진다는 [[조선]]시대의 특유의 조경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별서 양식 중에서 그나마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 대한민국 내 몇 안 되는 정원이기 때문에 조경시험에서 자주 나오는 이름들 중 하나다. 2008년 5월 2일부로 [[대한민국의 사적|사적]]에서 [[명승]]으로 재분류되어, 명승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쇄원의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옛날 단어로 중화권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이다. 또 맑을 소(瀟)자나 뿌릴 쇄(灑)자는 인명에서나 아주 가끔 발견될 정도로 현대 한국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이다. == 역사 == [[http://k-heritage.tv/CrossEditor/binary/images/000014/그림17._소쇄원도(1755년).jpg|1755년의 소쇄원도]] 조선 중기의 선비 양산보(梁山甫)가 소쇄원을 지었다. 양산보는 본래 [[조광조]]의 제자였으나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하자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고향인 창평(담양군의 일부)으로 내려와서 은둔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정확한 건축연대를 두고 논란이 있다.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중종 23년(1528)에 소쇄원에 올라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란 시를 지었는데 여기에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또한 송강 [[정철]]이 지은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이란 시에서는 자신(정철)이 태어난 해에 소쇄원이 지어졌다고 언급했다. 정철은 중종 31년(1536)에 태어났으므로 소쇄원도 1536년에 지어졌단 소리가 되는데, 그러면 김인후가 지은 <소쇄정즉사>와 내용이 충돌한다. 면앙정 [[송순]]이 소쇄원을 두고 지은 시가 중종 29년(1534)에 나왔기 때문에 정철이 언급한 내용은 착오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김인후의 시를 바탕으로 해서 1520년대 중후반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1536년 정도에 완공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본래 은둔을 위해 지은 건물이지만, 워낙 풍경이 좋은 곳이라 수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았고 문학과 학문연구의 산실이 되었다. 김인후, 정철, 송순 이외에도 의병장으로 유명한 제봉 [[고경명]], [[이황]]과 사단칠정 논쟁을 한 사람으로 유명한 유학자 [[기대승]] 등도 소쇄원을 찾아와서 양산보와 교분을 나누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양산보는 임종 직전에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양산보의 후손들은 그의 유언을 철저하게 따라서 소쇄원을 지켜왔다.[* 참고로 이 유언은 당나라 이덕유라는 사람이 평천산거계자손기에서 말한 것이 시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군이 담양으로 쳐들어와서 소쇄원에 불을 놓아 양산보가 지은 소쇄원은 소실되었다. [[칠천량 해전]]으로 [[원균]]이 수군을 말아먹고 전라도 땅으로 왜군이 침입한 탓이었다. 이후 양산보의 손자인 양천운이 소쇄원의 복구를 시작해서 현손[* 손자의 손자, 즉 양천운의 손자]인 양경지 때에 상당 부분 복구되었지만 수많은 조선 중기 학자, 문인들이 보고 즐기던 경치와 정원이 소실되고 이후에 재건된 것이 지금까지 보존되었으므로 안타깝다. 그래도 명종 3년(1548) 김인후가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이라는 시를 지으며 꽤 자세하게 서술한 탓에 상상 정도는 가능하고, 영조 51년(1775)에 간행된 <소쇄원도(瀟灑園圖)>라는 판화를 <소쇄원사십팔영>과 비교할 수 있기에, 원형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다른 한국 내 전통 정원들보다는 그나마 상황이 낫다. 복원한 소쇄원과 <소쇄원사십팔영>을 비교하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데, 이런 자료들 덕분이었다. 광주 충효동의 [[환벽당]], 송순이 지은 [[면앙정]]등과 함께 가사문학권으로 지정되었다. == 찾아가기 == === 교통편 === [[광주광역시]]에서 이곳으로 가는 버스는 [[광주 버스 충효187|충효187]]번이 있다. 운행 간격은 2022년 기준 5~60분이다(2022년 8월 19일 금요일 낮 시긴대 기준으로 단 두 대만 운영되고 있다). 주요 경유지로는 산수오거리, 서방시장, 말바우시장 등이 있다. 그외 [[광주 버스 충효188|충효188]]번도 있으나, 이 노선은 시 외곽만을 운행해 석곡동, 망월동 주민이 아니라면 탈 경우가 없다.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담양[[담양 버스 225|225]]번 역시 소쇄원을 경유한다. 187번을 타고 와서 하차 태그 시 시외요금 100원 결제된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충효동 환벽당 정류장[* 소쇄원으로 부터 걸어서 10~20분 거리에 있다. 생각보다 거리가 가까우니 참고해야 한다.] 에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 정류장 이름이 소쇄원이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내릴 수 있다. 인근([[광주호]]생태원, 죽녹원 등)을 돌아보기 편하려면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게 낫다. 소쇄원 표지판이 서 있는 남쪽에 주차장이 있다. 소쇄원은 길 건너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 입장료 === 후손들이 소쇄원을 꾸준히 유지/보수하고 있으며, 수익을 위해서가 아닌 유지비 명목의 입장료를 받는다. 입장할 때 사유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2022년 기준 성인 2000원, 청소년 1000원. === 인근 관광지 === 소쇄원 주변은 가사문학의 중심지로, 문인들이 시를 짓던 [[정자(건축물)|정자]]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은 직접 출입이 가능하며, 특별한 입장료는 없다. 다만 정자와 정자 사이의 거리는 도보로 걷기에 조금 멀 수도 있다. 막상 가도 크게 볼 건 없으나, 그 당시 사람들이 이런 느낌으로 글을 썼을 거란 느낌을 상상해보면 좋다. 특별히 안내 표지판이 없어 길을 잃은 경우에는 구글 지도로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식영정'을 찾아보자] 고등학생 때 가사문학을 잘 공부해두면 묘하게 여행에 도움이 된다. 근처에 가사문학관이 있으며, 입장료를 내고 입장할 수 있다.(2023년부터 입장료 면제) 참고로 같은 담양에 있는 [[죽녹원]]까지 거리는 상당하다. 여기서 죽녹원을 가려면 [[광주 버스 충효187]] (배차간격 1시간, 매시 40분 소쇄원 앞 도착)이나 [[담양 버스 225]] (배차간격 1시간, 매시 정각 소쇄원 앞 도착)를 타고 광주 북구 농산물직판장에서 [[담양 버스 311]]로 환승하자. === 편의시설 === * 소쇄원 내에는 특별한 편의시설이 없다. 밖으로 나와 길을 건너서 저수지 방향으로 가다보면, 간단한 분식을 취급하는 매점 겸 휴게소가 있다. 아니면 가사문학관/광주호생태원 쪽으로 가다보면 ‘카페거리’도 있으나 걸어가기 적당한 도로는 아니다. * 점심 시간을 끼워 이동을 한다면 도시락이나 간단한 요기거리를 챙기는 게 좋다. * 입구에서 잠깐 걸어가면 한정식 식당이 있다. == 소쇄원의 구성 == [[http://k-heritage.tv/CrossEditor/binary/images/000014/그림14._소쇄원-04스케치-내원-00.jpg]] * 제월당 - 좌측 위 * 광풍각 - 중앙 * 대봉대 * 고암정사 - 좌측 아래, 터만 남았다. * 부훤당 - 좌측 아래, 터만 남았다. 오곡문과 제월당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 소쇄원 48영 === 하서 김인후가 1548년에 지은 시로서 건물, 지형, 식생, 동물, 공간 등의 구성요소와 사용모습 등을 그리고 있어서 불타 없어지기 전의 소쇄원을 대략적으로나마 추정할 수 있게 해준 자료들 중 하나이다. 단 현재 걸린 현판은 제1공화국 시절의 것이다(단기 연호 사용, ‘문중에서 새겼다’는 글). == 기타 == 사진빨을 못 받는 곳 중 하나인데 그래도 종종 웨딩 사진찍으러 오는 커플도 있는 모양이다.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 친화적인 정원이라 아름다운 구도를 잘 포착하지 않으면 그냥 산에 정자 하나 세워둔 것처럼 찍히기 쉽다. 또한 정원이 다 그렇듯이 계절에 따라서 분위기가 천차만별이다. 2022년 8월 기준 매표소 반대편에는 [[고방오리]] 몇 마리를 기르고 있는데 소쇄원 소유인지는 불명. 소쇄원을 처음 들어갔을 때 나오는 대나무 숲 때문에 [[죽녹원]]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여기에서 죽녹원으로 이동하는 건 쉽지 않으니 주의해야 한다.[* 대중교통으로 죽녹원에 가려면 225이나 187번을 타고 문흥지구 입구까지 나가서 [[담양 버스 311|311]]번을 타야 한다.] 애초에 소쇄원이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이곳은 전라남도 담양군이 아닌, 현재는 사라진 창평군이었다. 이를 합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담양읍 지역과의 교통 연계가 약하다고 한다. [[분류:정원]][[분류:조선/건축]][[분류:대한민국의 명승]][[분류:대한민국의 랜드마크]][[분류:담양군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