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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사회 체제이지 이념은 아닌 것과 달리,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는 이념일 뿐 사회 체제로 구체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세계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등장과 그 운영을 두고 말이 많았다. [[독일]]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카를 카우츠키]]는 '이건 발칸식 독재이지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 선생이 생각한 [[혁명]]이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한 혁명([[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빠진 반쪽짜리 혁명)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전체주의]]적 [[독재]]정권)을 낳을 것이다'라며 강하게 [[디스]]를 했고, 이에 소련의 통치자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의 부하이자 이론가였던 [[레프 트로츠키]]는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라며 카우츠키의 지적을 강하게 쏘아붙였다. 마르크스는 [[사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은 유물사관이라고 불리며, 사회의 발전단계가 '원시 공동 사회 → 고대 노예 사회 → 중세 봉건 사회 → 근대 자본주의 사회 → 공산주의 사회' 순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중간 단계를 어떻게 거치느냐?'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한 논의점이 되었다. 카우츠키와 같은 온건파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가자"는 입장인 반면에 레닌과 트로츠키 같은 급진파는 "절차 따위는 적당히 무시하고 다음 단계로 가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극심히 견해 대립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의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혁명은 단계적인 절차(민주적 절차)를 통해 점차 나아가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것은 자본주의가 부후화되어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듦에 따라 불가능해졌으므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가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켜, 폭력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낮은 생산성과 이로 인한 일반화된 궁핍이라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처음부터 소련이 강력한 공업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1928년까지만 해도 소련의 공업 생산량은 [[미국]]의 8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 물론 이건 소련이 공업화가 안 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이 너무 넘사벽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2차대전 당시 미국 1개 주에서 생산하는 철강 생산량이 세계구급 공업 강국이었다는 독일 전체의 철강 생산량과 맞먹었다고 하니...]이었고 [[러시아 제국]]의 산업 혁명도 19세기 말~20세기에 들어서야 시작될 정도로 늦었다. 소련도 서구에서 봤을 땐 가난한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 처음으로 소련의 최고 권력자(최고 인민회의 의장)가 되었던 레닌은 소련을 공업국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소련은 철강 생산량이 내전 이전에 비해 5분의 1로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레닌은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펼쳐 소규모의 사기업, 상업을 인정하는 등 시장 경제 일부를 도입하였다. ==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시대]] == 1924년 레닌 사망 직후부터 시작된 공산당 내의 혼란기에 세계혁명을 주장한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를 위시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928년 최고 지도자가 된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스탈린은 공업 생산 목표를 제시하며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농업국가인 소련을 공업국가로 바꾸기를 원하였다. 1931년 스탈린은 '''"우리는 서방에 비해 50년 뒤쳐져 있습니다. 이제 그 격차를 10년 내로 따라잡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으며 [[계획경제|소련의 모든 산업과 경제 활동을 국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서구권을 위협할 만큼 급격하게 성장했다. [[대공황]]으로 서방이 무너져 갈 때 독자 경제권이었던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덜 받고 성장할 수 있었으며 30년대의 초고도 성장으로 1938년에는 유럽 제1의 공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물론 유럽 내 압도적인 1위였던 것은 아니고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에는 소련과 독일의 국력이 엎치락 뒤치락했다. 일례로 2차 대전 개전 시점인 1939년에는 소련이 앞섰으나 독소전쟁 발발 시점인 1941년에는 독일이 역전했고 2차 대전 말미에는 다시 소련이 재역전했다.] 그 이면에는 혹독한 인권 탄압과 눈물어린 희생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라 자체는 부강해졌지만 스탈린 시대 소련 국민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스탈린은 초고속 공업화를 위하여 [[농업]]을 모조리 집단농장화하고 농민들을 쥐어짰으며, 구성국을 쥐어짠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가 벌어지기도 했다. 중공업과 달리 경공업은 발달이 미미하여 생필품도 모자란 편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공업화와 함께 정치적으로는 [[대숙청]]을 감행하여 반대세력--과 죄없는 인민들--을 모조리 [[시베리아]]나 서부 러시아의 [[굴라크]]로 보내는 등 숙청하고 그야말로 철권독재를 했다. 스탈린의 강력한 정적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는 [[멕시코]]로 도망을 갔으나, 1940년 스탈린이 보낸 라몬 메르카데르라는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물론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죽었고, 후임자인 흐루쇼프가 트로츠키 암살자인 라몬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수여했다.[*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오시프 스탈린]] 격하운동을 했지만 그 역시 트로츠키는 극혐했다.] 어쨌든 서구권의 열강들이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는 사이 스탈린의 소련과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나란히 약진했고, 스탈린은 초기에는 [[반공]]을 외치는 독일에 맞서 [[서유럽]] 국가들과의 안보동맹을 추구했으나 일이 잘 안 풀리자[* 동맹 대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을 못 믿는 데다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의 눈치도 봐야 해서 협상에 미적지근했다.]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에는 나치 독일과 [[폴란드 침공|폴란드를 양분하고]] [[겨울전쟁|핀란드를 침공하여]]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는 등 잘 나가다가,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에 의하여 크게 뒤통수를 맞는다.]]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잉여]]가 된 군 지휘 체계로 인해 [[독소전쟁]] 초반에 크게 밀렸으나, 북부의 [[레닌그라드]], 중부의 [[모스크바]], 남부의 [[스탈린그라드]] 등 주요 도시들을 사수하고 1943년 8월 지상 최대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에서까지 승리하면서 전황이 반전되었으며,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대반격하여]], 결국 1945년 5월 [[베를린]]을 [[베를린 공방전|함락시키기에 이른다.]] 1945년 8월에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리자]], 소련 역시 [[일본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서부터 진격해 내려왔고]], [[8.15 광복|8월 15일에는 일본이 항복]]했다.[* 이때의 진격으로 소련은 1905년 [[러일전쟁]] 패배로 [[일본령 가라후토|일본에게 빼앗겼던]] 남사할린 및 전략적 요충지인 [[쿠릴 열도]]를 되찾는다.] 다만 독소전을 치르며 3,000만에 육박하는 국민들이 희생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감수했다. 이 전쟁을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고 하는데, 약 4년간 전쟁하느라 공업과 농업의 기반이 전부 날아가버려서 재건하는 데 또 인민이 갈려나가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았다|승리의 열매는 달았다.]] 사실 소련의 영토는 [[러시아 제국]]의 방대한 강역에서 엄청나게 축소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공산국가는 전세계에 소련과 [[몽골 인민 공화국]], 그리고 1921년부터 1944년까지 존속하며 끝내 소련에 편입된 [[투바 인민 공화국]]이 끝이었던 것. 하지만 소련은 2차 대전의 승리로 그 잃었던 영토를 거의 다 되찾음은 물론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을 전부 영향권으로 집어삼켰으며, [[아시아]]에서도 북한과 중국, 베트남 등을 공산 국가로 만드는 큰 수확을 얻었다. 한편으로 미국의 턱 밑인 [[쿠바]]에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공산권으로 갈아타고 [[쿠바 미사일 위기|두고두고 미국의 골치를 아프게 하며]], [[먼로 독트린]] 이후 계속 [[미국]]의 앞마당 취급 받았던 [[중남미]]에서 대규모 좌익 운동, 좌파 정치 세력을 지원하는 등 '''자본진영의 총본산 턱 밑에 [[공산주의]]의 칼을 들이대는''' 성과를 거둔다. 그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과 군사력에 힘입어 소련은 마침내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초강대국'''이 되었고, 공산진영의 대표국가로서 약 50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 모든 곳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과 보이지 않는 대결을 반복하였다. 통칭 [[냉전]]이라 불리는 시기 동안 [[한반도]]와 [[베트남]], [[앙골라]],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온갖 지역 국가들이 이념 대립의 대리전장이 되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NATO]]와 소련을 위시한 [[바르샤바 조약기구|WTO]]는 [[상호확증파괴|서로 확실하게 개박살을 내버리려고]] 양 진영의 주요 도시에 항상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겨누고 있었다.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던 국가들에게 강대한 군사력과 매혹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소련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생산력 자체가 부족한 가운데 사적 소유가 철폐된 결과 등장한 '비민주주의적인 계획경제'에 내재된 효율성 부진으로 인해 전면적 대립보다는 데탕트, 공존 경쟁이 추구되었다. ==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 시대]] ==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지도자가 되었으나 곧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6개월 만에 사직하였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서기장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잔인한 독재자일 뿐이라고 강력히 비판했으며 [[신격화]]의 영역까지 갔던 스탈린의 격하 운동을 주도했다. 또 스탈린 시대에 억압받았던 사회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권력투쟁에서 지면 처형이나 다름없던 스탈린 체제의 정치를 크게 순화시켰다. [[굴라크]]에 수감된 정치범들의 수도 스탈린 때 300만 명에서 1956년에는 100만 명까지 감소하였다. 이러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서방과 소련 내부는 물론이고 공산권에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이에 [[중국]]의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수정주의자]]라 비판하였고 곧 [[중소결렬]]로 양국의 사이는 크게 멀어지며, 결국 [[중소 국경 분쟁]]까지 벌어졌다. [[동유럽]]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아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와 [[헝가리 인민 공화국|헝가리]] 등에서 반소시위가 일어났고 소련은 [[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을 잔인하게 무력 진압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 때까지 소련은 초강대국으로 등극했음에도 러시아 내전, 대숙청, 대기근, [[독소전쟁]]의 연이은 여파로 정작 국민의 삶의 질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지만, 흐루쇼프 시대에 들어서는 국력 회복에 성공하며 국민의 삶의 질도 상당히 나아졌다. 생활 수준도 올랐고 미국의 잡지를 비롯해 일부 영화, 책, 음악, 예술의 자유 등이 허용되었으며[* 그러나 [[종교의 자유]]만큼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계속 발전을 거듭했다. 심지어 당에 대한 비판도 어느정도 허용되었고 서방과의 교류도 늘어났다. 다만 미국과의 냉전과 체제 경쟁 자체는 이 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특히 우주 분야에서 흐루쇼프 때 소련은 1957년 [[스푸트니크]]를 날려 내심 소련을 무시하던 미국에게 [[스푸트니크 쇼크|큰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라이카(개)|개]]를 [[우주]]에 보냈고, 1961년 [[유리 가가린|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와 1962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인류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를 잇따라 배출하여 당시 [[우주 경쟁]]의 경쟁국이었던 미국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결국 [[처녀지 개간 사업|농업 정책]]에서 큰 실패를 겪었고, 재래식 전력을 감축하려다가 군부의 반발에 부딪혔으며, 끝내 권력 기반이 약해져 1964년 당내 보수파에 의해 실각되었다. ==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브레즈네프 시대]] == 흐루쇼프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된 인물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다. 브레즈네프가 통치하던 시기 소련은 서방에서 '회색의 시대'라고 불렸다. 이 시기를 일컬어 '''침체기'''(Эпоха Застоя, Era of Stagnation)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통치기에 들어 생성된 용어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 사회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경제력이 서방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며 점차 사회 전반적으로 점점 침체되어 가고 있었다. 더불어 상명하복식 관료주의의 체제로 인해 사회가 천천히 무너져 갔다. 경제 성장은 둔화되었으며, 떨어져 가는 노동생산성으로도 증명되었다. 이는 브레즈네프의 시대엔 별다른 개혁도 없었고, 개혁 시도를 흉내내더라도 별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브레즈네프 시기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상당히 높아져 소련 인민의 생활 수준은 전반적으로 안정되었다. 스탈린 시대와 같은 숙청도 거의 없었다. 한편 미국과의 무리한 군비 경쟁으로 인해 국방비가 [[GNP]] 대비 12%나 될 정도로 늘어나고 비대칭 전력의 규모에서 [[미국]]을 능가하게 되었다. 물론 침체기라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까지 소련은 공산권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 후 [[동유럽]]에 개입하여 [[프라하의 봄]]과 폴란드 시위를 유혈 사태로 만들며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여기에 1970년대 말 [[이란]]의 [[팔라비 왕조]]가 [[이란 혁명]]으로 폐지되고, 소련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인도-아라비아해의 주도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미국은 본격적으로 대소 봉쇄를 시작하였다. 최초의 시도는 식량 봉쇄였다. 소련의 [[농업]]은 스탈린의 집단 농장화로 박살난 이래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대대적인 농지 개간과 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량자급을 하지 못 할 정도로 생산성이 떨어졌으며, 이는 소련의 농·축산업 체계의 문제점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만 해도 중유럽을 먹여살렸던 과거[*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식량 수출국이었던 이유는 생산량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의 무역구조상 수입품을 사기 위해서는 식량을 팔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막대한 식량을 수출할 때도 여전히 러시아의 평민들은 굶주렸다. (식량 수입국이었던 2000년대 초반의 [[중국]]이 [[한국]]에 [[쌀]]을 판매하려 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 비교 우위, 즉 가격 차이에 의한 교역이었지 미국처럼 잉여 생산력이 넘쳐나 할 수 있었던 교역이 아니었다.]와는 정반대로 소련은 미국에서만 매해 2,500만 톤이 넘는 곡물을[* 사실 소련의 밀 생산량은 세계 1위였지만 가축 사료용으로 대부분의 밀을 썼기 때문에 밀을 수입했다. 또한, 소련은 어찌 됐든 공산권의 맹주로서 친소 공산국들에게 어느 정도는 베푸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곡물을 싼 값으로 식량이 부족한 공산 국가들에게 대량으로 원조하고는 했기에 곡물이 더더욱 필요했다. 그런 소련의 입장이 엄청난 잉여 곡물을 떠맡을 시장이 필요했던 미국의 입장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숙적과 식량을 대량으로 거래하는 어색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냉전기 미소 관계가 단순한 적대 관계라기보단 일종의 [[적대적 공생]] 관계였음을 잘 보여준다.] 수입해야만 했으며, 이 막대한 수입량을 다른 곳에서 대체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지미 카터|카터 행정부]]는 소련에 대한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그러나 수출 중단으로 인해 소련으로 흘러가던 막대한 곡물들이 시장에 풀리자 식량 가격이 대폭락하여 미국의 농가는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으며, 일시적인 식량 위기를 벗어난 소련은 폭락한 국제 곡물 가격을 이용해 다른 나라를 통해서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유가 하락을 대소 봉쇄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카터 행정부 시절부터 이어져 온 유가 안정화 대책의 연속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한편으로, 카터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반군]]에 [[FIM-92 스팅어|스팅어 지대공미사일]] 등의 각종 무기를 지원했다. 교외를 장악한 반군이 소련 손아귀의 도시들과 거점들을 포위한 상황에서 소련군은 수송과 교통을 위해 항공편을 사용하여야 했는데, 미국의 물밑지원으로 상당한 무장력을 갖춘 무자헤딘 반군이 게릴라전으로 헬기 전력에 대항하자 소련은 빠져나갈 방법도 찾지 못하고 그저 국방비만 쏟아부을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전면적인 경제 봉쇄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막대한 재정 출혈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원자재 수출로 간신히 명줄을 연장하던 취약한 소련 경제를 붕괴시키는 단초를 만들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석유]]값이 일정 수준은 되었기 때문에 버틸 수는 있었지만, 그 취약성은 극대화된다. 브레즈네프의 장기 집권은 그의 사후 권력을 이어받을 만한 소련 공산당내 권력자들이 함께 노령화되는 악영향도 초래했는데 그의 사후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집권 중에 노환으로 사망해버리면서 권력의 공백은 심화되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 시대]] == 젊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등극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그는 [[1985년]]부터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시행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해 하반기에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영국]]의 치킨게임으로 1986년 석유값이 폭락하여 세수가 크게 줄어버린데다가 같은 해 인류사상 최악의 원자력 재난인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가 겹치면서 결국 소련의 경제는 회생 불가능한 수준까지 가버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글라스노스트는 소련 체제 하의 온갖 비리와 범죄를 드러내어 [[소련 공산당]]과 소련 체제의 정당성에 흠집을 냈다. 한번 시장의 고삐가 풀리자 인플레이션을 막아낼 방법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혁신 정책은 원래의 의도는 거의 이루지 못한 채 소련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붕괴를 초래했고, 억눌려 있던 [[내셔널리즘|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발트 3국]] 등지에서 [[노래 혁명|처음으로 독립을 외치며]]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탈퇴와 민족국가로서의 자주독립,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환원 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1991년 소련 국민투표]]를 통해 [[주권국가연맹|연방 체제만은 유지하려 하였고]], 실제로 투표에 참여한 9개 공화국에서 77.8%의 지지를 얻었지만, 동년 8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에 반대하던 공산당내 보수파들이 주도한 [[8월 쿠데타]]가 터졌다. == [[소련 붕괴|연방 해체]] == [include(틀:구 소련 구성 공화국 목록)]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 붕괴)] 8월 쿠데타 이전만 하여도, 당시 소련은 초강대국이라 외부의 위협은 [[미국]]밖에 없고 자원도 많으며 내부 통제도 잘 이루어지고 있던데다 인민들 역시 중진국 수준의 1인당 GDP 및 괜찮은 수준의 복지를 누렸다.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이런 나라가 망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1989년에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당 정권이 차례대로 붕괴되는 와중에도 소련은 아직 건재했기에 1991년 초만 해도 당시 서방 국가들과 지식인들은 소련의 국제적 영향력이 줄어들 것으로만 생각했지 아예 나라가 망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설령 자본주의 체제로 완전 전환해도 발트 3국만 제외하고 나머지 공화국들은 유지한 채 계속 존재했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8월 쿠데타가 드러낸 현실은 소련을 지킬 내부 엘리트는 아무도 없다는 진실이었다. [[보리스 옐친]]이 이를 진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입지가 더욱 커지자 소련의 붕괴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쿠데타는 민중의 저지로 인해 실패로 끝났으나, 권력은 옐친과 그의 지지 세력들에게 몰렸다. [[1991년]]에 이미 고르바초프는 권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쿠데타 진압으로 정치적 스타가 된 보리스 옐친은 이미 진작에 소련을 탈퇴한 [[발트 3국]], [[조지아]], [[몰도바]], [[아르메니아]]를 제외하고 자신을 포함한 소련 소속 9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기로 밀약했다.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소련을 탈퇴하는 바람에 소련은 가입국 하나도 없는 빈사 직전 상태였다. 1991년 12월 고르바초프가 결국 소련의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면서 [[소련 붕괴|소련은 공중분해되었다.]] 소련 해체는 워낙 극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붕괴된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소련의 갑작스런 붕괴는 러시아의 경제 몰락을 일으켰으며, 지식층은 사회주의가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또한 [[CIA]]를 비롯하여 전문가 및 학자들의 예측이 모두 실패하여, 예측이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소련에 대한 [[추억]]은 아직까지도 [[러시아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65%의 러시아인이 "소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행인가?"라는 질문에 긍정하고 있고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같은 소련 구성국들, 심지어 반러 감정이 있는 [[우크라이나]]에서도 러시아는 몰라도 소련에는 상당한 향수를 가진 인구가 많다는 걸 보면 러시아와 옛 소련 구성국들 사이에서 소련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2020년에는 러시아인들의 75%가 소련 시절이 러시아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위대했던 시기였다고 답했다. 하지만 막상 [[러시아]]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나 공산당의 득표율이 별로 높지는 않고, 소련 해체 이후로 한 번도 선거를 통한 집권에 성공하지 못했다. 반소, 반러 감정이 심한 [[폴란드]]와 과거 구 공산권이었던 [[불가리아]]와 [[헝가리]], [[루마니아]], [[몽골]]에서도 옛 공산당계 정당이 사민주의 정당으로 전향한 뒤 민주화 이후에 재집권에 성공하였거나 현재까지도 제1야당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미묘한 일. 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사상이나 이상에 대해 향수를 느끼기보다는, '''세계를 휘두르던 [[초강대국]]''' 시절의 국력에 향수를 느끼는 것에 가깝다. 소련이 가진 모든 권리와 의무는 [[러시아 연방]]이 계승하였으며, 소련의 공화국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모조리 독립국가가 되어버렸다. 이후의 상황은 독립국의 역사로 이어진다. == 같이 보기 == * [[라트비아/역사]] * [[러시아/역사]] * [[리투아니아/역사]] * [[벨라루스/역사]] * [[아르메니아/역사]] * [[아제르바이잔/역사]] * [[우즈베키스탄/역사]] * [[우크라이나/역사]] * [[에스토니아/역사]] * [[조지아/역사]] * [[카자흐스탄/역사]] * [[키르기스스탄/역사]] * [[타지키스탄/역사]] * [[투르크메니스탄/역사]]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소련, version=2862, title2=소련, version2=2876)] [[분류:소련]][[분류:러시아의 역사]][[분류:몰도바의 역사]][[분류:발트 3국의 역사]][[분류:벨라루스의 역사]][[분류:아르메니아의 역사]][[분류:아제르바이잔의 역사]][[분류:우즈베키스탄의 역사]][[분류:우크라이나의 역사]][[분류:조지아의 역사]][[분류:카자흐스탄의 역사]][[분류:키르기스스탄의 역사]][[분류:타지키스탄의 역사]][[분류: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