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제국 집정관]] [[분류:로마 황족]] [[분류:3세기 집정관]] [[분류:암살된 인물]] [[분류:268년 사망]]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3세기)] || '''이름'''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br](Publius Licinius Valerianus)|| || '''통칭'''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br]소(小) 발레리아누스 || || '''출생''' ||미상|| || '''사망''' ||268년([[밀라노]] 혹은 [[로마]])|| || '''직위''' ||원로원 의원, 전직 [[집정관]], 황족|| || '''부모''' ||^^부친^^ [[발레리아누스]], ^^모친^^ [[코르넬리아 갈로니아]]|| || '''형제''' ||^^이복형^^ [[갈리에누스]]|| || '''가족''' ||^^친척^^ 성(聖) 리키니아[br]^^조카^^ [[발레리아누스 2세]], [[살로니누스]], [[마리니아누스]][br]^^가족^^ 이름미상의 배우자 및 자녀||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제국]] [[군인황제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황족이다. 아버지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어머니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후처로 [[아우구스타]]인 [[코르넬리아 갈로니아]]다. 아버지와 전체이름이 똑같아, 보통은 소(小) 발레리아누스 혹은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로 불린다.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해, 에트루리아 시대와 로마 공화정 초기부터 [[원로원]] 의석을 세습해온, 오래된 [[노빌레스]] 중 하나인 리키니우스 가문 출신이다. [[갈리에누스]] 황제의 이복동생으로, 아버지 생전과 형 갈리에누스 단독 통치 시절 동안 집정관을 경험했다. 서기 268년 형과 밀라노에서, 혹은 268년 갈리에누스가 밀라노에서 암살된 직후 원로원의 명에 따라 조카 마리니아누스, 형수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이복형의 사촌 에그나티우스 루킬루스 등 갈리에누스 측근들과 함께 처형됐다. == 생애 == 출생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는 [[발레리아누스]], 어머니는 아버지의 후처로 발레리아누스가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사후 맞이한 원로원 가문 출신의 [[코르넬리아 갈로니아]]다. 외가 친척으로는 4세기 익명의 이교도 역사가가 집필한 <카이사르의 전형>에 언급된 갈레니우스 바실리우스가 있다. 어머니 코르넬리아 갈로니아가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갈로니우스 가문의 피를 이은 원로원 명문가 출신이기 때문에, 그 혈통은 이복형과 비교해도 부족한 것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의 첫 아내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가 253년 이전 사망했고, 이복형 [[갈리에누스]]가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었던 것은 사실이기에 이복형과의 나이 차이는 최소 10살 가까이 났고 아버지, 이복형이 황제가 됐을 때에는 성년식을 마치고 장성한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해 공화정 이래 로마를 대표하는 귀족가문이 된 리키니우스 집안 출신이고, 모친이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갈로니우스 가문의 피를 이은 원로원 가문 사람인 만큼,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여러 고대 기록에 따르면, 리키니우스 가문 태생의 명문가 수장임에도 겸손하고 고풍스러운 면모가 많은 부친과 온화하고 예의바르며 의붓아들에게도 친어머니 같이 다정했던 모친처럼, 소 발레리아누스 역시 겸손하고, 예의바르며 학식이 상당했다고 칭찬받았다고 한다. 소 발레리아누스는 눈에 띨 정도로 상당히 잘생긴 꽃미남이었고 갈리에누스와 달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좋은 체격을 물려받아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도 큰 주목을 받아 주변에게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성향이 외가 에그나티우스 가문처럼 사치스럽고 난잡하다고 살아생전부터 비난을 받은 이복형 갈리에누스와 달리, 여러 고대기록에서 한결같이 기술돼 있다. 그래서 이런 평판은 후일 소 발레리아누스의 죽음이 갈리에누스와 사이가 나쁜 원로원, 민중, 군대 모두에게 안타깝다고 세간에 동정을 받고, 소 발레리아누스 모친과 소 발레리아누스 아내 및 아이들이 원로원, 군대에게 어떤 보복도 당하지 않은 이유가 됐다. 253년, 아버지 발레리아누스가 [[아이밀리아누스]]를 제압하고 황제가 되고, 이복형 갈리에누스가 공동황제가 됐다. 이때 소 발레리아누스는 253년과 264년 사이 동안 여러 특권을 받고, 아버지 생전에 보결집정관에 취임했다. 이어 갈리에누스 단독통치 시절인 265년에는 자신의 아들들과 외가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집권과 세습을 공고히 하려는 갈리에누스 황제의 추천으로, 이복형의 외사촌 에그나티우스 루킬루스와 함께 정규 집정관에 나란히 추천돼 집정관에 올랐다. 268년 가을, 갈리에누스가 [[밀라노]]에서 반란 진압을 거의 성공적으로 완성한 상태에서 암살됐을 때 밀라노 혹은 로마에서 암살(혹은 처형)됐다고 한다. 이에 관해,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소 발레리아누스가 로마에서 원로원 명에 따라, 이복형의 막내아들 마리니아누스와 함께 처형됐다고 주장한 반면, [[에우트로피우스]]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소 발레리아누스가 형 갈리에누스와 함께 메디올라눔(밀라노)에서 암살됐다고 나와있다. 두 가지의 주장 중 어떤 기록이 맞는지 불명확하다. 268년 죽었는데, 어머니와 본인 및 그 가족의 평가가 좋았던 만큼 갈리에누스 직계 가족(아내, 막내아들), 갈리에누스 파벌과 외가 친척 등의 처형과 달리, 원로원, 민중, 군대에게 "못난 형 때문에 불쌍하게 죽었다"고 동정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고대기록을 살펴 보면 소 발레리아누스의 아내, 아이들은 소 발레리아누스의 모친과 함께 원로원에 기소됐다거나 추방됐다는 말은 찾을 수 없다. 갈리에누스 사후 원로원과 군대의 추대로 황제에 오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소 발레리아누스의 모친에게 제국의 휘장을 받았을 때,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그녀와 남은 리키니우스 가족들을 위로하고 더이상의 보복을 금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