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아사히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2> '''{{{+1 세이 쇼나곤}}}[br]淸少納言'''[* 한국식 한자음으론 '청 소납언'.] '''| Sei Shōnagon''' || ||<-2><#fff,#191919>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세이쇼나곤.jpg|width=100%]][br]{{{-2 13세기 말에 그려진 세이 쇼나곤}}}}}} || || '''본명''' ||키요하라노 나기코 (淸原諾子) (?)|| ||<|2> '''출생''' ||966년경 {{{-2 (추정)}}}|| ||[[일본]] [[교토시]]|| || '''사망''' ||1017/25년|| || '''직업''' ||작가|| || '''배우자''' ||타치바나노 노리미츠 ^^(980년경 ~ ?, 이혼)^^[br]후지와라노 무네요 ^^(? ~ ?)^^|| || '''자녀''' ||아들 타치바나노 노리나가[br]딸 코마노 묘부|| [목차] [clearfix] == 개요 == [[헤이안 시대]] 중기의 여성 작가로 [[일본]] 최초의 에세이집인 [[마쿠라노소시]]로 유명하다. '세이 쇼나곤'은 본명이 아니라 궁궐 내 '''[[별명]]'''으로, '''키요하라 쇼나곤네 집안 따님''' 정도 의미이다. 다만 아버지의 직책 이름을 따서 부름이 보통인데, 일단 아버지 [[기요하라노 모토스케]]는 '쇼나곤'까지 승진한 적이 없고 가족 중 누가 '쇼나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쇼나곤(소납언, 小納言)이라는 관직명은 '스나이모노모우시'라고도 [[훈독]]하며, 종4위하에 해당하는 지죠(시종, 侍從)를 겸할 수 있는 수준의 지위였으며 따라서 그렇게 높은 관직은 아니었으나, [[옥새|어새]]의 날인 등을 담당하는 등 상당히 중요한 직책으로 취급되었다. == 생애 == 출생년도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출생년도와 세이 쇼나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의 나이[* 60세 전후, 당시로써는 고조할아버지도 될 수 있는 나이다.]로 비추어보면 '''966~8년쯤 출생'''했다고 추정한다. 세이 쇼나곤의 친정인 키요하라 가문은 증조부 후카야부의 노래가 고킨슈에 실릴만큼 [[와카]][* [[일본]]의 전통 시가]로 유명했지만, 신분은 중~하류 귀족이었다. 아버지 기요하라노 모토스케도 와카 편찬집 편집부인 나시츠보의 5인에 선발될 정도로 유명한 가인이었지만, 61세가 되어서야 경로우대로 겨우 5위(지방관)에 올랐다. 결혼한 해는 대충 980~2년 정도.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의 [[결혼]] 풍습이 남성이 여성의 집에 드나들다가 아이가 생기면 정식 부부가 되거나 하는 식이었기 때문.[* 물론 정식으로 혼인하는 경우도 있다.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오치쿠보 모노가타리>를 보면, 정식 혼인은 양가에서 혼담이 오간 후 처가에서 [[사위]]를 맞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수순이었다. 남녀 간에 [[와카]]를 적은 편지를 주고받다가, 남성이 여성의 집을 드나들고, 더 사이가 깊어지면 밤을 함께 보내게 되고, 사흘 연속으로 함께 밤을 보내면 [[부부]]가 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경우는 정식 아내가 아닌 [[첩]]이 되는 경우가 잦았던 듯하다.] 어쨌든 982년에 타치바나노 노리미츠와 사이에서 아들 타치바나노 노리나가를 낳았으므로 이전부터 결혼 생활을 해왔던 것 같다. 참고로 타치바나노 노리미츠는 집안은 후지와라가 다음이었지만 당시 황태자였던 [[카잔 덴노]]의 젖형제인 데다 직책도 쿠로우도(천황 전속 비서관)로, 상당히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다만 카잔 덴노가 부인이 죽었다고 머리 밀고 이치죠 덴노에게 양위하는 바람에 새 됐고, 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일부에서는 이치죠 덴노의 외척이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한다. 자기랑 같이 출가하자고 꼬셔 놓고는 카잔이 머리 밀자마자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핑계를 대고 튀어서]], 카잔은 열불을 냈지만 이미 양위한 거 무르지도 못하고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혼자 출가하게 된다.]] 쇼나곤은 시에 능했지만 남편은 별로 [[시]] 같은 걸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는 즉석에서 시를 짜내는 재주가 매우 중요했는데 노리미츠는 좋게 말하면 무관심이고, 나쁘게 말하면 센스가 없고 시에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마쿠라노소시]]에 따르면 노리미츠가 왔을 때 쓸데 없는 말을 하길래 쇼나곤이 좀 닥치라는 의미의 시로 답했지만, 시를 싫어하는 그는 "나랑 남남이 되려거든 시를 읊어달라." 말하며 도망갔다. 단순한 무골 남편과는 이후 성격차이로 '''[[이혼]]'''하긴 하지만, 이혼하고 나서도 노리미츠와 세이 쇼나곤의 사이는 좋았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저 두 사람은 무슨 남매 같구나!"라고 속닥거렸다고 한다. 노리미츠의 여동생인 전 시누이와도 궁에서 같이 일하며 잘 놀았다고 하니 성격적으로 두루두루 잘 어울린 듯 하다. 세이 쇼나곤 993년 중궁 [[후지와라노 테이시]]의 사적인 [[궁녀]]가 되어 출사했다.[* [[헤이안 시대]]에는 [[궁녀]]가 크게 [[천황]] 전속 [[궁녀]]와 그 외의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의 사적인 [[궁녀]]로 나뉘었다. 사적인 [[궁녀]]는 [[천황]]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을 고용한 사람한테 급여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의 일들을 적어 놓은 에세이집이 [[마쿠라노소시]]이다. 무라사키 시키부나 동시대인들의 다른 일기와도 다르고, 현대 개념의 일기는 결코 아니다!! 중궁 [[후지와라노 테이시]]와 천황에게 각각 [[선물]]로 고급 [[종이]]가 들어왔는데, 이치죠 천황은 이 종이에 [[사기(역사책)|사기(史記)]]를 쓰게 했다. 테이시가 "우리는 이 [[종이]]에 무엇을 쓸까?"라고 세이 쇼나곤에게 묻자, 세이 쇼나곤은 '''"그쪽이 시키를 쓴다면 우리는 마쿠라를 쓰지요."'''라고 대답했고, 그 말에 테이시가 세이 쇼나곤에게 종이를 하사했다고 한다.[* '시키'는 사기라는 뜻도 있지만 까는 이불을 뜻하는 시키부톤(敷布団)의 약칭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쿠라'의 뜻은 [[배개]]. 즉 쇼나곤은 '''그쪽이 [[이불]]을 쓴다면 우리는 [[배개]]를 씁시다'''라고 재치있게 말장난을 한 것이다.] 여하튼 이 이야기가 맞든 안 맞든 간에 [[마쿠라노소시]]를 [[영어]]로 옮기면 The Pillow Book.[* [[영어]] 의미는 에로책이다.] 당시 [[후지와라노 테이시]]와 세이 쇼나곤의 사이는 일반적인 주종관계보다 훨씬 친밀한 교류였고 실제로 이에 대한 [[와카]]도 남아있다. 세이 쇼나곤이 잠깐 궁궐을 떠난 사이에 "보고 싶으니 얼른 돌아오라."는 내용을 시로 써서 보낸 것. 당연하지만 세이 쇼나곤은 감동하고 회답을 써서 보냈다.[*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는지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어>라는 [[백합(장르)|백합]] 4컷 만화가 나왔다. 히키코모리 니트 생활을 청산하고 [[궁녀]]로 들어간 세이 쇼나곤이 테이시에게 반해서 망상일기를 쓰거나, [[무라사키 시키부]]의 가슴을 주무르다 얻어 맞거나 하는 내용.] 어느날 테이시가 시녀들을 향해 무심코 '향로봉의 눈은?' 이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다른 시녀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세이 쇼나곤이 뜻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렴을 걷어올리자 테이시는 쇼나곤을 크게 칭찬했다. 중국의 유명 시인의 시집에 "향로봉의 눈을 보기 위해 주렴을 걷어올렸네."라는 문장이 있기 때문.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무척 활발해 왕족들 사이에서도 한시가 유행했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런 궁중생활은 [[후지와라노 테이시]]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타카가 사망하면서 서서히 무너졌다. 미치나가가 재빨리 권력을 움켜잡으면서 테이시가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 더군다나 테이시의 오빠인 코레치카와 남동생 타카이에가 여자 문제로 前 천황 카잔인과 싸움이 붙어서 검비위사(당시 [[경찰]])에게 끌려가는 등, 황후 테이시의 친정은 망조가 들었다. 테이시는 오빠와 남동생이 끌려가는 걸 보고 출가했지만 이치죠 덴노의 간곡한 부탁으로 [[환속]]했다. 하지만 약 2년 후, 딸 비시 내친왕을 낳다가 세상을 떠난다. 이로써 테이시의 사적인 [[궁녀]]였던 세이 쇼나곤은 궁궐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테이시가 남긴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궁궐에 남아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궁궐을 나갔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는 듯.] 테이시가 이 고생을 하는 동안 모셨던 그녀는 되도록 상전의 굴욕적 처지를 숨기며 우아한 테이시를 찬양하고 궁정 생활의 화려함 등을 강조하여 밝은 '필치'로 써내려갔다. 이후 세이 쇼나곤은 아버지 연세[* 세이 쇼나곤을 본 나이가 당시 기준(헤이안 시대)으로 따지면 고조부가 될 나이였다.]가 높아서 연상의 거부감이 없었는지, 25세 연상인 후지와라노 무네요와 재혼해 그가 수령으로 취임한 셋쇼 지방으로 건너가 그 사이서 외동딸 코마노 묘부(小馬命婦)를 두었다. 코마노 묘부는 정치적 승패 여부와 무관하게 제2황후 후지와라노 쇼시의 궁녀가 되었다. == [[무라사키 시키부]]와의 관계 == 세이 쇼나곤은 [[겐지모노가타리]]의 작가인 '''[[무라사키 시키부]]와 동시대의 인물로 [[라이벌]]'''과도 같은 사이. 서로가 모시고 있었던 중궁이 정치적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지만[* [[후지와라노 테이시]]의 아버지 미치타카와 쇼시의 아버지 미치나가, 이치죠 덴노의 어머니 센시는 부모가 같은 형제지간이었다. 미치타카 생전에는 [[장남]]이었던 미치타카가 권력을 잡지만 미치타카가 갑자기 사망하고 난 후, 미치타카의 아들 코레치카에게 권력이 넘어갈 때 동생 미치나가를 귀여워했던 센시가 개입해서 미치나가가 그 뒤를 이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러니까 테이시는 후원자가 아버지 미치타카에서 오빠 코레치카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힘을 잃게 되고 쇼시는 중궁이 되어 급상승하게 된 것.], 이 경우 중궁 쇼시가 입궁하고 1년 남짓해서 황후 테이시는 사망했고, 테이시의 개인 [[궁녀]]였던 세이 쇼나곤은 재혼해서 지방으로 내려가서 [[무라사키 시키부]]가 입궁한 것은 조금 뒤의 일이므로 두 사람은 직접 대립한 적은 없다. 다만, [[무라사키 시키부]]가 쇼시의 뇨보(女房)로 영입된 것은 문재가 풍부한 전 중궁 테이시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서이므로, [[무라사키 시키부]]가 세이 쇼나곤에게 [[라이벌]] 의식을 품을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 묘사되는 인간상과 [[마쿠라노소시]]에 그려지는 인간상을 보면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세이 쇼나곤은 자기 주장을 딱 부러지게 표현하고 [[남자]]들과 한시(漢詩)로 승부하기까지 한 반면, [[무라사키 시키부]]는 자신을 너무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내성적인 타입이었던 듯. 나아가 세이 쇼나곤은 [[마쿠라노소시]]에서 [[무라사키 시키부]]의 남편을 흉본 적이 있고, [[무라사키 시키부]]도 자기 일기에서 세이 쇼나곤을 깠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세이 쇼나곤을 "잘난 척하면서 글이나 끄적이는데, 그 글을 읽어보면 모자란 곳 투성이"라며 폄하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세이 쇼나곤 외에 다른 여자들도 신나게 비난했다. '글은 좀 쓸 줄 아는 모양인데 읽는 눈은 없는 것 같다.'는 둥, "[[이즈미 시키부|사생활이 더럽다]]"는 둥. 하지만 시키부 본인도 다른 여관들에게 좀 재수 없어 보였는지 여러 번 까였다고 스스로 써놨다.] [[2ch]]에 따르면 '''블로그녀'''. 라이벌인 [[무라사키 시키부]]는 '''[[부녀자]]'''.[[http://yaksha.egloos.com/1438554|#]]. 근데 세이 쇼나곤과 [[무라사키 시키부]]의 행적이나 성격에 비춰 보면 묘하게 말이 되는 비유다. == 미디어믹스 == || [[파일:清少納言.jpg]] || ||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 [[Fate 시리즈]]에서는 영령으로 나온다. [[세이 쇼나곤(Fate 시리즈)]] [[태양의 용자 파이버드]]의 등장인물 [[야마사키 모모코]]의 조상으로 나온다.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에서는 직접 등장하지 않았지만 [[세나 미코토]]에 인게임 대사에서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세나의 말로 본다면 세이 쇼나곤도 마법소녀였던 모양이다. [[2024년]] 방영이 결정된 일본 [[NHK 대하드라마]] [[빛나는 그대에게]]에서 [[퍼스트 서머 우이카]]가 세이 쇼나곤을 맡는 것으로 등장이 확정되었다. 라이벌격인 무라사키 시키부 역에는 [[요시타카 유리코]]가 배정되었다. == [[백인일수]] == [include(틀:백인일수)] >'''제62번 세이 쇼나곤(清少納言)''' >[ruby(夜,ruby=よ)]をこめて [ruby(鳥,ruby=とり)]のそらねは はかるとも よに[ruby(逢坂,ruby=あふさか)]の [ruby(関,ruby=せき)]はゆるさじ >한 밤중이라 새벽 닭 우는 소리 흉내 내어도 기어코 오사카[* [[시가현]] [[오쓰시]]와 [[교토시]] 사이에 있는 고개 및 그 관문. 우리가 아는 [[오사카]](大阪)와는 한자가 다르다.]의 관문은 불허되네 * 5-7-5-7-7의 정석 형태이다. 어장관리로 유명한 세이 쇼나곤을 대표하는 시 중 하나. * 세이 쇼나곤에게 후지와라노 코우제이(藤原行成)[* 유키나리라고도 한다. 이 시절의 성명은 음독과 훈독 2가지 읽는 방식이 공존한다. 기록에 후리가나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라는 남친이 있었다. 어김없이 밀회를 하던 어느 날엔 축시(새벽 2시)에 훌쩍 돌아간 적이 있었다. '닭이 운 것 같아 (점차 새벽이 밝을 테니) 돌아갔소.'라며 코우제이가 뒤늦게 변명편지를 보내니 쇼나곤이 '그 닭은 맹상군의 닭이군요.'라고 타박 준 적이 있었다. 이는 중국 고사의 맹상군 일화로 맹상군 자신이 암살당할 위기에 처하자 함곡관으로 도망쳤는데 이 함곡관이 새벽닭이 울기 전엔 문을 열지 않아서 일부러 닭소리를 흉내내어 문을 열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에서 인용, 코우제이를 거짓말쟁이라 비난한 것이다. 그러자 코우제이가 '그건 함곡관이잖아. 오사카와는 무관하잖아?'이라고 반박하니 쇼나곤이 이 와카를 보냈다고 한다. 함곡관이든 오사카관이든 그게 그거라는 이야기. 또는 이것을 '오사카(쇼나곤)는 함곡관과 다르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해석도 있다. [[분류:헤이안 시대/인물]][[분류:일본 여성 작가]][[분류:일본사/여성]][[분류:몰년 미상]][[분류:백인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