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본 문서는 세계의 역사를 다룹니다.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사회과 과목, rd1=세계사(과목), other2=멜 브룩스의 1981년 영화, rd2=세계사(영화))] [목차] == 개요 == '''세계사'''([[世]][[界]][[史]])는 전 인류의 역사에 관한 정보를 [[역사학]], [[지리학]], [[인류학]], [[사회학]], [[언어학]] 등의 관점을 통해 수집, 종합, 분석, 추리, 연구, 정리한 [[역사]], 혹은 역사를 전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동향을 일컫는다. || [[파일:World_population_growth_(lin-log_scale).png|width=100%]] || || 기원전 1만 년부터 서기 2000년까지의 세계 인구(세로축은 로그 값) ||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후대에 알리고자 하는 습성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 [[역사가]]들은 과거의 일을 계속해서 후대에 전해 내려왔는데, 그 형태는 글이 있는 문화권이라면 문자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남았고, 없는 곳이라면 [[신화]], [[전설]], 구전 문학, [[동화]] 등의 구전 역사의 모습으로 남았다. 그러나 지리적, 정보적 한계로 인해 그러한 움직임은 지역 역사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인류 전체의 동향을 한 흐름으로 보아 정리한 인류사라는 분야는 전근대 사회에서도 14세기 이슬람 역사가인 이븐 칼둔 등이 시도한 바가 있으나 역시나 당시 시대상의 한계에 부딪혔다. 이후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로 문화권 사이의 접근과 국제적인 교류가 쉬워지며 [[세계화]]가 진행되었고, 또한 민족이나 국가적 단위를 뛰어넘는 역사적 사고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세계사의 연구는 크게 진척되었다. 서양에서는 [[볼테르]],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 [[아놀드 토인비|토인비]] 등의 인물들이 세계사적 사고의 기틀을 제안하였다.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 [[정보 혁명|정보화]]가 급격히 가속화됨에 따라 세계사의 연구는 폭발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현재까지도 상호적용적이고 즉각적인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세계라는 것은 그 규모가 커 세계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연표적인 개념의 시간의 흐름을 무작정 정리하는 것보다는 큰 주제를 통해 인류의 동향을 연구하는 편이다.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무역]], [[종교]], [[과학기술]], [[질병]], [[젠더]], [[예술]], [[음식]], [[사상]] 등의 다양한 테마들이 그러한 주제의 일부이다. 공통적으로는 인류의 생활 양식에 따라 [[시대구분|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흔히 [[유럽사]]의 시대 구분법인 '[[고대]]-[[중세]]-[[근세]]-후기 [[근대]]([[현대]]를 포함)'가 세계사에 대입되어 사용되고는 하지만, 이러한 시대구분법은 공통점을 찾아내서 분류하는 것에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많고 실제로도 역사가마다 그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아주 논쟁적인 주제이다. 아래부터는 인류의 발흥부터 현재 [date]까지의 세계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중세]]'의 개념이 유럽중심적이며 다른 문화권에 대치하기 힘든 경우가 많음을 감안, 해당 문서에서는 [[영어 위키백과]]와 유사한 [[선사 시대|선사]], [[고대]], [[고전후 시대|고전후]], [[근대]], [[현대]]의 분류를 따랐다. 이러한 구분법은 큰 흐름의 변화를 구별하기 위한 편의상의 구분이고, 실제 세계사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역사를 같은 기준으로 칼로 자르듯 엄밀하게 구분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일러둔다. 지역별, 민족별, 언어별, 종교별 등의 구분은 [[세계사/분류]] 문서를 참고 바람. == 선사 시대(3백만 년 전~기원전 1만 년경) == === 인류의 출현, 진화, 확산 === ||
[[파일:인류의 이동 경로.jpg|width=100%]] || || [[인류]]의 이동 경로 || 첫 인류이자 처음으로 직립 보행을 시작한 현 인류의 직계조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약 400~60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발현했으며,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약 180만 년 전인 [[호모 에렉투스]] 때부터 완전히 직립보행을 시작 했으며 [[불]]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음성 언어를 사용했으며, 약 4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등장하였다. 현생 인류라 볼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가 약 20만 년 전쯤 [[아프리카]]에서 등장했으며, 10만 년 이후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아프리카를 빠져나온 시점에서 당시에 생존해있던 [[네안데르탈인]]과 접촉해 혼혈이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아프리카 외부의 현생 인류[* 대부분의 유라시아인 및 아메리카 원주민.]인 호모 사피엔스 유전자에는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발원된 유전자가 1~4%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곧 유라시아로 퍼져나갔고, 약 3만년 전에 빙하기로 인해 연결되어 있던 [[베링 해협]]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했다. === 도구의 발달 === 현 인류의 직계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시절부터 인류는 석기를 사용했으며, [[석기 시대]] 시작된 약 3백만 년 전부터 [[선사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석기 시대]]는 대체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인류의 출현부터 약 1만년 전까지 지속되었던 구석기 시대는 세계사의 아주 긴 부분을 차지한다. 어느 정도냐면, 인간이 살았던 시기를 100으로 본다면 구석기 시대는 98.8 정도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가 24시간이라면 15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주먹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 시대의 인류는 주먹도끼, 찌르개 등의 [[뗀석기]]를 사용했으며, 동굴이나 막집을 이동하며 사는 이동 생활을 했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자원을 획득하였으며, 동굴 벽화 등의 미술 활동을 남겼다. 일부 학자들은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짧은 전환점 사이를 [[중석기 시대]]로 정의하기도 하는데 이 시대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작고 날랜 동물들이 많이 나오면서 이에 맞춰 활이 개발되었다. 또한 작은 동물 및 물고기를 잡거나(화살, 작살, 작은 투창 등) 해체하기 위하여 조각이 작은 잔석기가 많이 쓰였다. 다만 이는 유럽 및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대륙에 따른 구분법으로, 지역에 따라 중석기 시대의 구분이 굉장히 모호한 지역도 있기에 학자들의 통일된 견해는 아니다. === 신석기 혁명 === 약 1만 2천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며 인류는 약 1만 년 전부터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의 인류는 돌도끼, 돌낫, 갈돌과 갈판 등 간석기, 그리고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됨에 따라 소위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 혁명''''이 시작된다. 이로 인해 많은 문화권에서 수렵채집 경제로부터 생산 경제로의 전환이 제안되었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였다. 농업은 [[중동]]에서는 기원전 10,000년경, 지금의 [[중국]]에서는 기원전 7000년경, 인더스 계곡과 [[유럽]] 대륙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기원전 4000년경 즈음에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곡물]]의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는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양(동물)|양]]과 [[염소]]가 길들여진 기원전 8500년경 중동지역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인더스]] 계곡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 [[소]]를 가축화하여 모내기를 했다. 중국의 [[황하]] 인근에서는 기원전 7000년경에 [[조(식물)|조]], [[피(식물)|피]], [[수수]] 등의 서곡(黍穀)을 재배했지만, [[장강]] 인근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에 [[벼]]농사를 시작해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 아메리카 전반에서는 [[해바라기]]가 기원전 4000년경 재배되었고, 기원전 3500년에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와 [[콩]]이 재배되었다.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에서는 [[감자]]가 처음으로 재배되었으며 [[라마(동물)|라마]]와 [[알파카]]도 가축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인류는 [[동굴]]과 [[천막]]을 버리고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집]]을 짓기 시작하며, [[성(건축)|성]]이나 [[탑]]과 같이 본격적으로 돌을 이용한 건축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초기형 물레와 베틀은 이 시기에 이미 존재. 즉 이 시기부터 직물이 생산되고, 천옷이 존재했다. == 고대 시대(기원전 4000년경~서기 500년경) == === 고도화된 사회와 문화 === ||
[[파일:296031ab9abd97e4b1bfdec1615e13a3--egyptian-cats-egyptian-beauty.jpg|width=100%]] || || 쟁기질하고 씨를 뿌리는 농부 부부 [br] 고대 이집트, 기원전 1200년경 || [[농업]]은 훨씬 더 밀집된 인구를 허용했고, 이는 곧 [[국가]]로 조직되었다. 농업은 또한 식량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직종에 종사할 수 있게 만들어,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농업의 발달로 최초의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도시들은 무역, 제조업, 정치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기원전 6000년경 예리코 ([[아리하]])나 [[차탈회윅]]과 같은 초기 형태의 [[도시]]가 출현했다. 이는 농업의 발전으로 인해 조직적인 행정과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는 가설이 정설이었으나, 최근에는 기원전 9600년 무렵에 발전한 것으로 추측되는 [[괴베클리 테페]]가 등장하면서 아직 농경 문화에 들어서기 전인 수렵 채집민들도 이미 조직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흔히 서양권에서 '문명의 요람'이라고 부르는 비옥한 초승달 대지 지역, 즉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3000년경 문명이 맨 처음으로 탄생했으며, 이러한 문화는 [[바퀴(도구)|바퀴]], 다양한 [[청동기]], [[선박]], [[옷|직물]], [[건축물]], 그리고 [[문자]]의 발명 등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문명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문자를 발명한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원전 4000년경), [[이집트 문명]](기원전 3150년경), [[황하 문명]](기원전 2000년경), 그리고 [[메소아메리카]] 문명(기원전 650년경)이 있다. [* [[인더스 문명]](기원전 3300년경) 지역에서도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들이 발견되었으나 매우 단편적으로 존재해 아직까지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큰 강 유역에서 문명이 형성되다 === 많은 사회가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며 세계적으로 도시국가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이집트]]의 [[나일 강]], [[인도 반도]]의 [[인더스 강]]과 [[갠지스강]], [[중국]]의 [[장강]]과 [[황하]] 인근, 그리고 현재 [[페루]]의 노르테치코 지역의 포르탈레자 강, 파티빌카 강, 수페 강 인근 등 '''큰 강 유역'''에 집중되었다[* 한국에서 흔히 [[세계 4대 문명]]이라고 꼽히는 문명들이 바로 이들이지만, 이는 [[량치차오]]라는 [[청나라|청]] 말의 사상가가 중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든 조어로 서양 학계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명]]이라는 용어가 문명과 비문명을 나누는 이분법적 표현이라고 보면서, 복합사회(Complex Society)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추세이다. 최근에는 언급한 남미 대륙의 노르테치코 문명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큰 강의 유역이 문명의 요람이 된 이유는 수로를 통한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한편 고대를 시작으로 [[지중해]]를 인근으로 큰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경계를 잇는 지리적 특성상 지중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주 중요한 바다로 평가되곤 하는데, 이는 [[상업]]의 발달, 그리고 사상과 과학기술의 교환으로 이어졌다. 또한 기마술과 [[전차]]가 발달했으며 이는 군사 기술이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발전은 수많은 국가들, 특히 제국들의 탄생과 확장으로 이어졌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문명은 기원전 4천년기 형성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었다. 기원전 3천년기에는 [[미노아 문명]], [[엘람]], [[황하 문명]] 등이 등장했고, 기원전 2천년기에는 [[미케네 문명]], [[히타이트]], [[아리아인]]이, 기원전 1천년기에는 [[고대 로마]]가 나타났다. [[메소포타미아]] 유역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있는 비옥한 토지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의 연결 통로에 있는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다민족, 다신교 문화가 들어섰으며, 이에 따라 여러 부족들의 세력들이 난립했다. === 기원전 4천년기, 최초 문명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등장 === 우선 기원전 4천년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이라고 불리는 [[수메르]] 문명에서 [[우루크]] 등 다수의 발달된 [[도시국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를 [[우루크 시대]](기원전 40세기 ~ 기원전 31세기)라고 부른다. [[쐐기 문자]]가 발명된 시기는 [[젬데트 나스르 시대]]라고 부르며, 시기는 기원전 30세기 ~ 기원전 29세기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많은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교류와 분쟁이 이어졌다. 이집트의 경우 통일 이전 시대를 [[이집트 선왕조]]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에 해당하는 기원전 4천년기 상이집트에서 나카다 문화가 발생하면서 상, 하 이집트의 두 왕국이 나타났다. 왕국 안에는 30여 개의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성벽을 두르며 사실상의 자치를 누리며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3150년경 상 이집트의 왕이었던 [[나르메르]]가 [[이집트 제1왕조]]를 세워 이를 통일함에 따라 선왕조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3150년 ~ 기원전 2686년)가 찾아온다. === 기원전 3천년기, 국가의 등장 === [[크레타]] 섬에서는 기원전 2700년경부터 [[미노스 문명]]이 발현했으며, 이는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간주된다. 처음에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부족은 [[수메르]]인이었다. [[우루크]], [[우르]], [[키시]], 라가시 등 강력흔 도시들이 서로 경쟁한 끝에 기원전 2340년경 수메르의 도시 중 하나인 움마의 왕 루갈작게시가 우루크 3왕조를 형성하고 수메르를 통합하면서 우루크가 통합된 수메르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334년경에 아카드의 사르곤이 수메르를 정복하고 우루크까지 함락 시키면서 [[아카드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아카드가 멸망한 뒤엔 잠시 [[구티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나 수메르 출신 [[우르남무]]가 세운 [[우르 제3왕조]](기원전 2112년 ~ 기원전 2004년)에 의해 퇴출당했고, 수메르의 마지막 전성기를 빛내다가 기원전 2004년경 [[엘람]]에 의해 멸망했다.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초기 왕조]]를 구성하는 [[이집트 제1왕조|제1왕조]]와 [[이집트 제2왕조|제2왕조]]가 있었다. 제1왕조가 무너진 후 [[헤텝세켐위]]가 세운 제2왕조는 [[순장]]을 폐지하고 대신 노예 인형([[샤브티]])을 넣는 선진적인 문화를 도입했다. 기원전 2686년 제2왕조가 끝나자 [[이집트 고왕국]](기원전 2686년 ~ 기원전 2181년)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지어지는 등 화려한 문화를 자랑했으나 점차 쇠락하여 [[이집트 제1중간기]](기원전 2181년 ~ 기원전 2055년)라는 분열의 시기를 맞았다. 인도에서는 [[인더스 문명]]을 구성하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가 형성되었다. === 기원전 2천년기, 더 많은 문명의 탄생 === ||<|9> 그리스 · 마케도니아 ||<|3> 이집트 || 수메르 · 아카드 ||<|3> 페니키아 ||<-2> 헤브라이 || || ↓ || ↓ || ↓ || || [[고바빌로니아]] || [[이스라엘]] ||<|3> [[유대]] || || ↓ || ↓ || ↓ || ↓ || ||<-4> [[아시리아]] || || ↓ || ↓ || ↓ || ↓ || ↓ || || [[이집트]] || [[메디아]] || [[리디아]] ||<-2> [[신바빌로니아]] || || ↓ || ↓ || ↓ ||<-2> ↓ || ||<-5>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 || ↓ ||<-5> ↓ || ||<-6> [[알렉산드로스 제국]] || ||<-6> ↓ || ||<-6> (분열) || ||<-6> ↓ || ||<-6> [[로마 제국]] · [[파르티아]] || ||<-6> ↓ || ||<-6> [[서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 · [[사산 왕조 페르시아]] || 다음 천 년 동안, 문명은 전 세계에 걸쳐 발전했다. 중요한 자원에 접근하거나 중요한 무역 루트를 통제하는 국가들이 우위에 오르면서 무역은 점점 힘의 원천이 되었다. 기원전 17세기부터 시작된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5세기경에 전성기를 맞았다. 《[[일리아스]]》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소아시아에 위치했던 강력한 도시국가 [[트로이]]와 적대 관계였고 이후 두 번이나 패퇴시켰다고 하는데, [[트로이 전쟁]]의 실체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전쟁이 실제로 발발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원전 12~11세기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측한다. 아나톨리아에서는 신흥 강대국 [[히타이트]]가 나타나 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집트와 싸우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가 멸망한 이후 [[이신(고대 도시국가)|이신]]과 [[라르사]]라는 대도시가 경쟁하는 [[이신-라르사 시대]](기원전 2025년 ~ 기원전 1763년)가 열렸으나, [[바빌론]]을 중심으로 세워진 [[고바빌로니아]]가 이신, 라르사를 모두 제압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다. [[함무라비]]와 같은 성군이 나타났다. 그러나 기원전 1595년 아나톨리아에서 등장한 신흥 강국 [[히타이트]]에게 멸망했다. 이후에는 북쪽의 [[미탄니]](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260년)와 남쪽의 [[카시트 왕조]](기원전 1595년 ~ 기원전 1155년)이 패권을 나눠 가졌으며, [[아슈르]]를 중심으로 발전한 [[아시리아]](기원전 20세기 ~ 기원전 609년)도 나타났다.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제11왕조|제11왕조]]가 대분열기를 극복하고 이집트를 통일해 [[이집트 중왕국]](기원전 2055년 ~ 기원전 1802/1650년)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200년 만에 다시 혼란기인 [[이집트 제2중간기]](기원전 1802/1650년 ~ 기원전 1550년)에 접어들었고, 기원전 1650년에는 [[힉소스]]가 침입해 [[이집트 제15왕조|제15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집트 제18왕조|제18왕조]]의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를 격퇴하면서 혼란기는 막을 내렸고, 다시 [[이집트 신왕국]](기원전 1550년 ~ 기원전 1077년)으로 부활하여 오리엔트의 패자가 되었다.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면서 최초로 협정문이 남은 [[카데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패권은 이집트 vs 미탄니 vs 카시트 vs 히타이트 vs 아시리아의 구도로 흘러갔으나, [[바다 민족]]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민족의 등장 및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문명들이 대대적인 파괴를 당했다. 히타이트와 미케네는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은 아시리아가 가져갔으며, 이집트 신왕국은 쇠퇴하다가 [[이집트 제3중간기]](기원전 1077년 ~ 기원전 664년)를 맞이하게 되었다. 히타이트가 무너진 자리에서는 [[페니키아]]가 나타났는데, 이들은 [[이집트 상형 문자]]를 개량한 시나이 반도 문자를 한 번 더 개량해서 [[페니키아 문자]]를 만들었고, 이것이 그리스로 전파되며 [[그리스 문자]]가 되었다. 한편 인도에서는 기원전 15세기경에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인들에 의해 [[베다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대는 [[베다]]가 쓰여지며 초기 인도 사회의 [[힌두교]]와 다른 문화적 측면의 근간을 마련했다. 기원전 550년경부터 인도 반도 전역으로 [[십육대국]]이 세워지며 베다 시대는 끝을 맞는다. 중국에서는 최초의 고대 국가인 [[하나라]]가 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고학적 단서가 부족해 국가로서의 그 존재는 확실치 않다. 존재가 확실한 [[상나라]]는 기원전 17세기부터 기원전 11세기 무렵까지 군사강국으로 군림하였으며 [[청동기]]가 발달했고 [[갑골 문자]]과 무덤 유적 등을 남겼다. === 기원전 1천년기, 문명에서 제국으로 === 문명권의 범위는 기원전 1천년기에 들어서며 더 넓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에트루리아]]인이 문명을 형성하고 기원전 753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고대 로마]]가 에트루리아의 지배권 안에서 생겨났다. 그리스에서는 미케네의 붕괴 이후 [[암흑시대]]를 맞이했다가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의 활동, [[올림피아 제전]]의 개최 등을 통해 [[고대 그리스]] 문명으로 다시 살아났다. 서아시아에서는 [[아시리아]]가 성장했다. 수도를 [[니네베]]로 했으며, [[우라르투]]와 같은 세력의 방해를 받기도 했으나 이겨내고, [[아슈르바니팔]] 대왕 때 서아시아 주요 지역을 통일하고 바빌로니아, 이집트, 북이스라엘, 페니키아를 모두 정복해 통합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강압적인 정책을 펼쳤고, 결국 얼마 안 가 기원전 609년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당하며 나라가 분열된다. 분열된 나라는 [[신바빌로니아]], [[이집트 제26왕조]], [[메디아]], [[리디아]] 등으로 쪼개진다. 그리고 이때 생긴 바빌로니아가 남유다를 정복하며 헤브라이인의 국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신바빌로니아 또한 전성기가 오래가지 않아,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왕조]]에게 정복당했고,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대신 페르시아라는 더 거대한 '제국'의 일부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집트는 [[이집트 제3중간기|제3중간기]] 동안 리비아 계통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분열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8세기 남쪽의 [[쿠시 왕국]]에게 정복당해 유일한 흑인 왕조인 [[이집트 제25왕조|제25왕조]]가 들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25왕조는 기원전 664년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이때부터를 [[이집트 말기 왕조]](기원전 664년 ~ 기원전 332년)라고 칭한다. 아시리아는 이집트에 괴뢰 정권인 [[이집트 제26왕조|제26왕조]]를 세웠고, 이는 아시리아가 멸망한 후에도 유지되었으나 결국 기원전 525년 [[아케메네스 왕조]]에게 정복당했다. [[기원전 404년]] 잠시 [[이집트 제28왕조|제28왕조]], [[이집트 제29왕조|제29왕조]], [[이집트 제30왕조|제30왕조]]로 독립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343년]] 아케메네스 왕조에게 재정복당했다. 팔레스타인 유역에는 [[헤브라이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다.[* 성경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나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가 이들을 이끌고 나온다. 그리고 모세 사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이들은 왕이 없이 살다가 제비뽑기로 [[사울]]을 왕으로 추대하지만 사울이 폭군이 되자 [[다윗]]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이 왕에 올라 왕조가 유지되고 그의 아들 솔로몬 때 부흥을 맞는다.] 헤브라이인들은 [[유대교]]라는 특유의 유일신 [[야훼]]를 섬겼다. 그리고 4대 왕 [[르호보암]]이 즉위하자 그의 강경론에 반발해 [[여로보암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과 르호보암의 남유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아있었다.]로 쪼개져 철저히 약소국 신세가 된다. 이후 신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해 [[바빌론 유수]]를 겪다가, 페르시아가 유대인을 해방하면서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최초의 '거대 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원래 [[엘람]]과 [[메디아]]에 복속된 '안샨 왕국'이었으나, [[키루스 2세]]의 치세에 제국으로 거듭나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고, 다음 샤한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까지 정복하며 세계 최대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의 [[페르시아 전쟁]] 과정에서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 살리미스 전투 등을 거치며 치열하게 싸운다. 여기서 그리스의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만들어 페르시아를 격퇴시키며 전쟁이 끝난다. 여하튼 서아시아 통일 제국이 된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해 [[아후라 마즈다]]를 섬겼다. 페르시아 다음에 나타난 거대 제국은 고대 그리스를 계승한 [[헬레니즘 제국]]이었다. 그리스는 전쟁 이후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가 벌어지는데, 여기서 스파르타가 승리한다. 그리고 전쟁의 영향으로 그리스가 쇠퇴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랑 페르시아를 통합한 국가가 등장할 차례였으니, [[마케도니아 왕국]]이었다.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마케도니아 왕국]]은 원래 고대 그리스 내에서도 오랑캐 취급을 받는 존재였으나 [[필리포스 2세]]의 통치 아래 그리스를 통일하며 헬레니즘 제국으로 거듭났고, 다음 왕인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이소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에서 승리하고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서아시아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 또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일찍 사망하면서 제국은 분열되었다.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년 ~ 기원전 30년)가 들어섰다. 헬레니즘 제국 이후에 등장한 제국은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이란의 [[파르티아]]였다. [[고대 로마]]는 원래 [[로마 왕국]](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이었으나 왕정을 몰아내고 [[로마 공화국]](기원전 509년 ~ 기원전 27년)이 되었다. 귀족정의 원로원와 집정관, 호민관의 [[평민회]] 등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리고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정복 기조는 계속 이어져서 기원전 3세기경 로마는 지금의 튀니지 지역의 [[카르타고]]와 싸우는 [[포에니 전쟁]]을 벌인다. 로마의 스키피오와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가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노예들을 동원해 [[라티푼디움]]을 건설하기도 한다. 라티푼디움을 개선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가 개혁을 시도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기원전 1세기]]경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는 1차 삼두정치를 하고 있었는데,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해 갈리아를 점령하고 돌아온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군대를 몰고 [[카이사르의 내전|카이사르 내전]]을 일으켜 로마의 황제가 된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겠다고 하자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에 자신이 신뢰하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한다. 이후 2차 삼두정치가 실행되었으니,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연합과 대립한 끝에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를 거머쥔다. 그렇게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며 [[로마 공화정]]에서 [[로마 제국]](기원전 27년 ~ 1453년)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집트는 로마에 정복당하며 기나긴 [[고대 이집트]]의 시대를 끝마쳤다. 기원전 3세기경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후계를 자처한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의 영토를 뜯어나가며 패권을 장악한다. 이때 파르티아의 수도는 [[크테시폰]]으로, [[바빌론]]을 대체해 생긴 도시 [[셀레우키아]]를 또 대체하며 생긴 신도시이다. 즉 바빌론을 계승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파르티아는 로마와 한나라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며 성장한다. 인도에서는 [[베다 시대]]를 지나며 [[십육대국]] 시대가 열렸다. 이때 [[불교]] 및 [[자이나교]]가 등장했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입 이후 통일에 대한 자극을 받아 [[마우리아 제국]]이 등장했다. [[주나라]]는 상이 멸망하고 기원전 11세기 무렵에서 기원전 256년까지 존재한 고대 국가로,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시대에 집단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주문왕]]의 시기에 국(國)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무왕(주)|주무왕]]이 [[목야대전]](牧野大戰)에서 상나라를 패퇴시키고 당시 중국의 패권을 차지했으나, 기원전 770년경 주나라가 견융의 침공을 받아 천도 한 뒤(동주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 중원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등장하여 오백 년 넘게 피비린내 나는 정복과 침략,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세계역사상 가장 긴 대전쟁의 시대가 이어졌고, 결국 [[진(통일왕조)|진(秦)나라]]의 [[시황제|진시황]]에 의해 제국이 통일되며 비로소 '통일된 대제국으로서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러나 진시황제의 무리한 수로 공사나 대외 정복전쟁 정책 등으로 군중의 지지는 급속도로 하락했고, 결국 진시황제 사후 거대했던 대제국은 쇠퇴한다. 이후 중원의 빈자리를 두고 [[항우]]와 [[고제(전한)|유방]]이 [[초한전쟁|다툰]] 끝에 유방이 승리하여 고대시대 최강의 군사강국인 [[한나라]]를 건국한다. 같은 시기 한반도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고대 국가가 수립되고, 일본에도 [[야마토]]라는 원시적 국체가 등장한다. === 아메리카의 문화와 문명 === 한편 아메리카 대륙은 비교적 다양한 지역 문화로 분열되어 있었다. [[북아메리카]]는 전통적인 수렵채집 형태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문화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메소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선 기원전 1500년부터 서기 500년 사이에 [[올멕]], [[마야 문명|마야]], [[사포텍]], 모체, 나스카 문명 등 보다 복잡하고 중앙집권적인 문명이 출현했다. [[올멕 문명]]은 석조 거대 두상 등의 유물을 남겼고, [[마야 문명]]은 [[역법]], [[천문학]], [[철학]] 등에서 높은 수준의 학문적 발달을 경험했으며, 나스카와 인근 문명들은 [[나스카 지상화]]를 남기는 등 여러 부분에서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 철학과 종교의 발달 === ||[[파일:04_간다라_양식_불상.png|height=150]] || [[파일:statue-of-confucius-chinese-school.jpg|height=150]] || [[파일:external/media1.britannica.com/75569-004-3B260631.jpg|height=150]] || || [[석가모니]] [br] {{{-2 (기원전 480? ~ 400?)}}} || [[공자]] [br] {{{-2 (기원전 551 ~ 479)}}} || [[소크라테스]] [br] {{{-2 (기원전 469 ~ 399)}}} || 고대 시대의 인류는 전 세계적인 [[철학]]과 [[종교]]의 동시다발적 발달을 목격했다. [[독일]]의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1949년의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 시대를 거시적이고 역사철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하였고, 기원전 80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 사이를 ''''축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축의 시대]]에는 [[유라시아]] 전역, 정확히는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직접적 문화교류 없이 독자적으로 철학적, 종교적 발달이 나타났는데, 중국에서 출현한 [[유교]]와 [[도교]], 인도에서 출현한 [[불교]]와 [[자이나교]], [[고대 그리스]]의 철학 사조, 페르시아에서 출현한 [[조로아스터교]]와 레반트에서 출현한 [[유대교]] 등의 [[유일신교]] 등이 전부 기원전 800년을 기해 600년경에 특히 발달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대에 정립된 철학과 종교들이 발달, 확산, 교류되며 세계 각각의 문명의 역사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고, 더 나아가 현재까지의 역사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전 세계의 인류가 이 시대의 산물의 종교적, 철학적 사상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되었다.[*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불교]]와 [[유교]]의 영향력이 아직까지도 한국인의 생활에 진하게 남아있으며, 다수의 한국인이 믿는 [[기독교]] 또한 축의 시대 즈음에 중동에서 비약적인 발달을 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자 [[유일신교]]이다. 현대세계 4대 종교로 손꼽히는 [[기독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의 경우, 전자의 2개의 경우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며 후자의 2개의 경우 축의 시대의 인도에서 출현, 발전하였다.] [[동아시아]]에 특히 영향을 끼친 것은 중국의 동주시대에 쏟아져 나온 [[제자백가]] 사상으로, [[춘추전국시대]]를 겪으며 제후국들이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던 배경 속에서 다양한 사상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공자]], [[맹자]], [[순자]] 등이 주장한 가족 윤리를 중시하여 중국 주류 사상을 수립한 [[유가(제자백가)|유가]], [[노자]], [[장자]] 등이 주장한 자연의 순리를 따를 것을 주장하여 중국인들의 자연관, 예술관에 영향을 끼친 [[도가]], 그리고 [[한비자]]가 집대성 한 [[엄벌주의]]를 통한 사회 질서 유지를 주장한 [[법가]] 등의 사상들이 탄생해 중국사에 큰 정치적, 철학적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유교]]는 이후로도 20세기까지 정치, 제도, 철학, 종교 등에 넓게 걸쳐 동아시아 세계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남아시아]]에서는 기원전 7세기경에 [[우파니샤드]] 철학이 등장하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이나교]], [[힌두교]]와 [[불교]] 교리의 이론적·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우파니샤드]]는 현대의 대중에게 친숙한 [[업]](業), [[윤회]](samsara) 등의 개념을 맨 처음으로 언급하였으며, [[종교]]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 [[철학]]의 기본적 근간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기원전 6세기경 [[마하비라]]가 아주 엄격한 계율과 고행을 통해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인 [[자이나교]]를 창시했다. 또한 유사한 시기에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침에 따라 [[불교]]가 탄생했고, 평등과 윤리적 실천을 통한 해탈이라는 개념이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기원전 4세기경 북부 인도를 통일하고 [[마우리아 왕조]]를 수립하여 [[아소카 대왕]] 시기에 전성기를 이룩했는데, 신실한 불자였던 아소카 대왕의 치하 아래 불교 철학, 문학, 예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상좌부 불교]]가 발달하여 [[동남아시아]] 세계로 전파된다. 한편 1세기 무렵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 시기에 새로운 형태의 불교이자 대중의 구제를 강조하는 [[대승 불교]]가 출현하였는데, 대승 불교는 [[중국]]에 전파되고 곧 [[삼국시대]]의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도 전파되게 되어 동아시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7세기 [[송첸감포]] 왕 때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지고 8세기 티송데첸 왕이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티베트에 불교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는데, 대승 불교가 번성하였던 북인도,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티벳에서는 인도로부터 유입된 정통 대승불교가 흥성할 수 있었고, [[밀교]]에 영향을 받으며 곧 [[티베트 불교]]라는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서아시아]]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 [[자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게 된다. 다신교 사회였던 고대 페르시아에서 그는 선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는 유일신교를 창시하였고, 세상이 선과 악의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 천국과 지옥의 개념, 그리고 [[구세주]]의 개념과 같은 세계관을 창시했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와 [[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고, 이후 [[헬레니즘 제국|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나 [[미트라]] 등 하위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으나, [[사산 왕조]]가 등장하며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 한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종교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고, 반대로 유대교, 기독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서기 3세기에 [[마니교]]라는 종교도 생겼으나 [[사산 왕조]]에게 이단으로 취급받아 탄압을 당했다.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데, [[탈레스]]를 시작으로 [[소피스트]]들의 출현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에 의해 서양 철학의 기틀이 잡히게 된다. 최초의 서양 철학은 '이 세계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탈레스]]는 처음으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뒤를 잇는 철학자들 역시 답을 찾기 위해 생각하고 생각하게 되면서 서양 철학이 시작된다. [[아테네#s-6.1.2|아테네 민주정]]의 발달로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선 말솜씨가 뛰어나야만 했고, 이런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변론술과 수사학 등을 돈을 받고 가르치는 "지혜로운 자들", 즉 [[소피스트]]들이 등장했다. 소피스트들은 진리의 상대성, 주관성을 강조했는데, 이를 비판한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절대적 진리를 강조했고, 변증술을 처음으로 고안했으며, 또한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화두이면서도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을 제시했다.[*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경우가 없으며, 책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언제나 미궁(aporia)의 상태에 빠지면서 끝난다. 이 미궁은 인간이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그 해답은 주어질 수 없는 난제들로, 현대 철학에서까지 이른바 '실존의 부조리'로 언급되고 있다.] 그의 직계 제자인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을 비롯한 이전 철학자들을 계승하여 앎, 우주, 그리고 인간 등에 관하여 방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겼고, 교육기관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하여 자신의 철학을 기록했다.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에서 나와 플라톤과는 사뭇 다른 방향의 철학적 탐구를 개진해나갔다. 예컨대 실제 자연에 대한 탐구를 보다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문학]] 등 그야말로 다양한 학문 분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에서 현대까지 계승되는 주요한 관점들을 제시하였다. 자세한 것은 [[철학사/서양#s-4|철학사/서양 문서의 '고대 철학' 소문단]] 참고. 이 철학자들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팽창하며 [[유럽]] 전역과 [[중동]]으로도 뻗어나가게 된다. 한편 이러한 흐름에 해당하지 않았던 대다수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지역의 사람들도 근대 시대에 접어들고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축의 시대 종교/철학의 영향력 아래 놓여지게 된다. === [[제1천년기]] 초기 === ==== 서아시아·중앙아시아·지중해 ==== 그리고 기원후 30년경 [[예수]]가 헤브라이인의 유대교의 내용을 개혁해 십자가형을 당한 후[* 기존 유대교는 헤브라이인만 믿을 수 있었고, 지켜야 할 율법이 너무 세세하고 빡셌다. 그러나 이를 헤브라이인이 아닌 사람도 믿을 수 있게 하였고, 율법은 [[십계명]] 정도만 지키면 된다고 바꿨다. 또한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기존 종교지도자들의 반발을 샀고,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해서 로마로부터 반란세력으로 찍힐까 우려되었다.] 열두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퍼뜨린다.[* 열두 제자 중 예수를 팔아넘기고 자살한 [[가룟 유다]]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원래는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던 로마 시민권자 사도 바울이 기독교로 전향해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을 퍼뜨리며 기독교가 온 나라로 퍼진다. 또한 제자들 중 천국의 열쇠를 받았다는 등 영향력이 가장 강력한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하는 등 제자들도 순교의 길을 걸으며 기독교를 퍼뜨린다.]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로마에 반대되어 로마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기독교]]가 로마에서 너무 인기를 끌자 4세기경 로마의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해 기독교를 승인한다.[* 당시 기독교는 만인 평등 사상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신분의 차별도 남녀의 차별도 없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로 보고 노예 계급을 두는 등 차별적이었던 로마에서는 인정될 수 없었다. 또한 초기 기독교는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을 선호했으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 전쟁 징집에도 거부해 병력 손실이 심했다. 따라서 기독교를 좋게 보던 황제들도 결국 기독교를 박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인 평등 사상으로 인해 차별받던 노예와 여자 등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점점 주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를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을 국교화하며 본격적으로 기독교의 시대가 열린다. 이후 5세기경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할 통치를 시작하지만 이후 서방영토를 게르만족들에게 빼앗기고, 비록 로마는 동쪽만 남았지만 이후 '''1453년에''' 오스만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해 2천 년의 역사를 쓴다. 게르만족은 이때를 전후로 로마의 서로마 지역에 국가를 무수히 세우지만, 로마가 빼앗긴 영토를 다시 찾아오려고 거의 전부 멸망시키는 바람에 사실상 [[프랑크 왕국]]과 [[서고트 왕국]]정도만 남지만 이후 서고트도 이슬람에게 멸망함으로써 프랑크 왕국 하나만 살아남았다고 보면 된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이탈리아로 전수된다. 한편 서아시아에서는 기원후 3세기경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파르티아를 멸망시킨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이하 사산 왕조 혹은 페르시아,이란)은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은 그대로 이어갔다.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는 레데사 전투 등 로마랑 싸워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등 승리하고, 인도의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는 등 전성기를 맞이한다. 심지어 6세기에는 [[로마]]를 거의 멸망시킬 뻔도 하기도 했다 당시 이란은 [[조로아스터교]]의 나라였는데, 651년 [[이슬람]]의 [[정통 칼리파]] 세력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된다. 이처럼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지중해의 수많은 도시국가들은 로마와 페르시아라는 형태로 양분되었다. ==== 남아시아·동남아시아 ==== ==== 동아시아 ==== 중국 전설의 최초 국가는 [[하나라]]이다. 그러나 전설로만 존재하고 실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상나라]]가 최초의 국가로 인정된다.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경 [[은허]]를 중심으로 발달한 국가로, [[황허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로 성장했다. 상나라는 갑골 문자를 썼으며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제신]]이라는 폭군이 즉위하고 [[목야대전]]에서 [[주나라]]의 [[무왕]]에게 패배하며 주나라가 들어선다. 주나라는 기원전 1100년경 [[호경]]에 도읍을 두고 혈연 관계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로 운영되었다. 친족 제도인 종법제를 운영하고 덕치주의를 강조한 천명사상이 있었다. 그러나 혈연들은 세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피가 옅어져갔고, 땅은 중앙이 통제하기에 너무 넓었다. 결국 갈등이 끝을 모르고 치닫는다. 결국 주나라가 기원전 770년 [[뤄양]](낙읍)으로 천도하고 [[춘추 전국 시대]]를 열어버리며 개판이 발생한다. 이때 유가, 도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를 법가를 위시로 한 [[진시황]]의 [[진나라]]가 통일했으나,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하는 등 정치를 개판으로 하고, [[아방궁]] 건설, [[병마용갱]] 건설, 흉노 토벌을 위한 [[만리장성]]을 축조 등 대규모 토목공사로 민생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리며 진시황이 죽자마자 나라가 분열된다. 여기서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의 [[초한전쟁]]이 벌어지고 [[한나라]]가 승리를 거머쥐며 마침내 중국에 안정된 통일국가가 들어선다. ==== 아프리카 ==== ==== 아메리카 ==== == 고전후 시대(500년경~1500년경) == {{{-2 ''주: [[고전후 시대]](Postclassical Period)는 고대와 근대 사이를 일컫는다. 보통 이 시기는 흔히 [[중세]]로 불리고는 하지만, 그 기준의 유럽중심주의적 모호함으로 인해 해당 문서는 '[[고전후 시대]]'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Age-of-caliphs.png|width=100%]] || ||[[아랍 제국]]의 영토 확장 * 진한 갈색: [[무함마드]] 지배 시기의 영토(622~632) * 황토색: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 * 노란색: [[우마이야 왕조|우마이야 시대]](661~750) || ||<-2> 무함마드 시대 || ||<-2> ↓ || ||<-2> 정통 칼리파 시대 || ||<-2> ↓ || ||<-2> 우마이야 왕조 || || ↓ || ↓ || || 아바스 왕조 || 후우마이야 왕조 || 중동과 그 근역은 7세기까지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7세기에 접어들자 [[아랍]] 지역에서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이 발흥하였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반도의 분열되어 있던 아랍 부족들을 이슬람의 기치(旗幟) 하에 통합하였다. 동로마로부터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중동 대부분 지역이 아랍-이슬람 문화권이 되었다[* 이슬람 발흥 전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지역은 기독교 문화권, 이란은 조로아스터 문화권이었다.]. 정통 칼리파 시대의 [[이슬람 제국]]은 급격한 팽창과 성장을 이루었다. 정통 칼리파 시대가 끝날 무렵 이슬람 제국의 영토는 이미 아라비아 반도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레반트, 리비아를 아우를 정도로 성장했으며, 이들 영토는 후의 [[우마이야 왕조]]가 추가로 확장을 한 이후에도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로서 기능하였다. 여기에 맞먹을 정도의 팽창을 이룬 중동의 제국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와 [[오스만 제국]] 정도를 빼면 전무하며, 후대의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영토까지 합치면 중동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마이야 왕조]]는 두 번째 이슬람 칼리파 시대로써, 현재 [[시리아]]에 있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이슬람 제국을 통치하였다. 우마이야 왕조는 정통 칼리파 시대의 정복을 이어받아 [[마그레브]]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신드]] 지역 등을 정복하였다. 전성기인 아브드 알 말리크 대에는 예루살렘에 현재도 남아있는 [[바위의 돔]]을 건설하였으며,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등 기존 로마 건축을 받아들인 건물을 각지에 남겼다. 이 시기 이슬람은 그 세를 크게 확장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이란 고원에서 [[북아프리카]]까지 넓은 영역을 관할하였다. 4대 칼리파인 알리가 암살당하고 난 후, 정통 칼리파 시대는 끝나고 [[무아위야 1세]]에 의해 첫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가 통치하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인도 북서부까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718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실패한 후 쇠퇴하였으며, 740년경부터 호라산에서 아바스 가문이 대두할 때에 마침 시리아 일대는 [[내전]]에 시달렸다. 또한, 아랍인들이 새로운 이슬람 개종자인 마왈리(대부분 페르시아인)에 대한 [[차별]]을 일삼아 결국 [[시아파]]와 마왈리의 지지를 받은 아바스 혁명군에게 패해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가 살해되며 750년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우마이야 일족은 잔치에 초대된 후 방심한 틈을 타 모조리 숙청되는데, [[히샴]]의 손자가 살아남아 서쪽으로 도주하여 [[알 안달루스]](이슬람 지배기의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국가가 바로 [[후우마이야 왕조]]이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 이후 성립된 [[아바스 왕조]]는 당시 세계최강의 제국 당나라에게 침공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탈라스 전투]](751)에서 이슬람 연합국을 결성하여 막아냈고, 게다가 [[당나라]]의 이슬람 원정군 총 사령관인 고선지 장군은 동맹군인 카를룩의 배신으로 인해 카를룩이 이슬람편으로 돌아서면서 압바스 왕조는 겨우 당나라 고선지 장군의 침공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중국]]과 [[이슬람 제국]]의 대전쟁이며,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제국이던 당제국의 서역 팽창 저지와 [[중국]]이 독점하고 있던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인 제지술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파되어 [[유럽]]까지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냄으로써 [[실크로드]] 교역로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의 교역을 [[이슬람]] 세력권이 할 수 있게 되었다. ||
[[파일:Maqamat_hariri.jpg|width=100%]] || || 〈압바스 제국 도서관의 학자들〉 [br] 1237년 야햐 알와시티 作. || 아랍인들은 정복지의 제도와 문화적 유산들을 빠르게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8~11세기 동안 중동 지역은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통틀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는데, 이를 이슬람 황금기라고 부른다. 그 예시 중 하나가 9세기경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이 현재의 [[바그다드]]에 건립한 [[지혜의 집]]으로, 지혜의 집은 중세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 중세 중동의 문학, 사학, 철학, 종교학과 같은 인문학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알 가잘리]]와 같은 철학자도 등장하여 중세 이슬람 철학의 기반을 닦았다. [[건축학]], [[의학]], [[약학]], [[공학]] 등의 과학기술도 발전했는데, 특히 [[의학]] 기술이 당대의 다른 지방에 비해 비약적인 발달을 겪었다.[* 내외과적인 치료법은 물론 [[정신과]]적인 질병을 의학적인 측면으로 접근한 것은 아랍 문화권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는데, 현 [[시리아]] [[알레포]]의 아르군 병원에서 정신병 환자들에게 햇볓 쬐기,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요양하기, 그리고 음악 듣기를 처방한 것이 기록으로 남았다.] 실제로 당나라 시기에 이슬람 제국을 방문한 중국인의 기록에서, 구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시리아 출신의 의사들이 이슬람 제국에서 크게 활약했음을 알 수 있고, 사산조 역시 동로마에서 박해받고 찾아온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의 고전 그리스-로마 문화를 잘 흡수했으며, 뿐만 아니라 동쪽에서 인도 세계의 의학적 지식까지 흡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압바스 왕조]]의 통제력이 약해져 지방 세력들이 난립하고, [[용병]]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돌궐족 유목민 [[튀르크]]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해 오기 시작하면서 중동 지역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 상황에 빠졌다. [[셀주크 튀르크]]의 지배자 투그릴 베그는 부와이 왕조를 물리치고 바구다드에 입성하고 아바스 왕조로부터 시정치적 실권을 위임받았다. 이후 셀주크 튀르크는 지중해, 서이시아, 중앙아시아 등으로 영토르루확장하다가 예루살렘과 소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하였다. 이에 11세기 말에는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다. 그렇게 셀주크 튀르크는 끝없는 전쟁 속에 멸망한다. 한편 10세기 초,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세력이 10세기 초 아바스 왕조의 권위를 부정하고 북아프리카에 [[파티마 왕조]]를 설립하지만, 셀주크 튀르크와 십자군과의 대립으로 쇠퇴하며 12세기 후반에 멸망한다. 13세기 초에는 [[몽골 제국]]의 세계정복이 개시되면서 [[호라즘 왕조]], 셀주크 튀르크에 정치적 실권을 부여한 [[아바스 왕조]] 등 이슬람 제국들이 아예 몽골제국에게 정복당하면서 사실상 승승장구하던 이슬람 제국은 완전한 종말을 맞이한다. 유럽 십자군 세력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통일성을 되찾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격퇴되었으나, 이란을 중심으로 한 동부 이슬람 세계는 돌궐족의 도래 이후의 오랜 정치적 혼란에 뒤이은 유럽 십자군 세력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한 몽골 제국의 무자비한 침략과 학살과 파괴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중동 지역 대부분은 [[사막]] 혹은 건조 기후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농경지로 쓸 만한 땅이 많지 않았는데,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관개 시스템 역시 수천 년에 이르는 집약적 농업으로 인한 토양의 염화와 관개 시설의 파괴, 사막화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13세기 이후 중동 지역은 인구-생산력 측면에서 유럽 지역에 비해 열세에 놓이기 시작했고, 곧 문화-기술적 측면도 유럽 지역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따라잡히게 되었다. 그나마 비단길, 바닷길을 이용한 아시아-유럽 간 중계 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았지만, 이 역시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시대]]의 시작으로 막히게 되었다. 또 중동권 역시 [[흑사병]]에 의해 유럽 못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13세기 말부터는 튀르크계 오스만족이 소아시아 지역에 [[오스만 제국]]을 건국한다.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고, 셀림 1세는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고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을 장악했으며, 술레이만 1세 때 전성기를 맞는다. 이 외에도 여러 국가들이 난립했다. 14세기 후반 티무르 왕조는 몽골 제국의 부활을 내세우며 [[티무르 왕조]]를 건국했지만, 이무르 사후 세력이 약화되며 우즈베크인들에게 멸망당한다. 16세기 로 이스마일 1세는 이란에서 [[사파비 왕조]]를 건국하지만, 내부 갈등과 아프간적의 침입 등으로 18세기에 멸망한다. === 유럽 === ||
[[파일:Mosaic_of_Justinianus_I_-_Basilica_San_Vitale_(Ravenna).jpg|width=100%]] || || [[유스티니아누스 1세]] [br] {{{-2 (482~565)}}} || 476년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스스로 '가톨릭의 보호자'를 칭하며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등에 업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배권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또한 가톨릭의 보호자로 나서면서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496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갈리아의 투르네 지방에 정착한 클로비스 1세(466년 ~ 511년). 메로빙거 왕조를 세움.]가 가톨릭 교도로 [[개종]][* 클로비스는 보통 [[게르만 신화|게르만의 전통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여겨지지만, [[아리우스파]]로 개종도 고려했거나,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다.]하여 강성해지고,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아리우스파]] 게르만 왕국들을 공격하여 약화 쇠멸시키자, 남은 게르만족 왕국들도 상쟁하다가 멸망하거나, 국가안정을 위해 동로마인과의 융합을 도모하며 결국 가톨릭으로 전향하면서, 아리우스파는 사라진다. 그리고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는 본래는 일치된 단일한 교회였으나, 5세기 이후[* 칼케돈 공의회{{{-2 AD 45)}}} 전에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립이라기보단, 동방에서의 선두 자리를 두고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대립하는 구도였다. 당연한 것이, 로마-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와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천도 이후에야 제국의 주요 도시로 격상된 것이기에 초창기엔 로마는 커녕 알렉산드리아보다도 권위가 낮았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신학적/문화적/정치적 경쟁 관계에 놓이면서 점차 분열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 당시 로마 주교, 곧 [[교황]]이 갖고 있던 정치·사회적인 권위는 매우 미묘한 것이었다. 한편으론,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에 남아있었고, 535년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동로마에 수복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로마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시기도 꽤 길었다.[* 사실 이 시기는 동로마 제국이 [[랑고바르드족]] 등 적대적 이민족들로부터 군사적으로 로마를 지켜주던 시기라 황제의 권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주교는 이전부터 주교들 중 첫 번째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시도 로마가 '어떠한 의미에서 첫째인가'에 이의를 제기할 뿐, (어떤 형식으로든) 로마 주교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며, (무슨 의미인지엔 이견이 있어도) 첫째 주교라는 건 인정하였다. 종합적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한참 경쟁하던 9세기 포티오스 분열 당시의 교회 정치적 구도는 이러했다: >황제는 포티우스가 영구히 제거되기에는 너무 강력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포티우스가 복권되어야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평화 또한 로마의 권위의 도움을 얻어서야 회복될 수 있었으니, 포티우스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던 강력한 반대파도 로마 역시 포티우스를 지지하고 있음을 전해 듣고는 결국 누그러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은 매우 기묘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자기 내부의 갈등들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가 필요했고, 사실 로마의 권위는 매우 강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로마의 권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 권력투쟁의 결과를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외에 달리 행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사실 로마는 무엇인가 달리 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 >클라우스 샤츠{{{-2 (''Klaus Schatz'')}}} 씀, 이종한 옮김, "보편공의회사" 124-125쪽 ||
[[파일:european.world.ad.814.png|width=100%]] || || 814년의 유럽 || 다시 돌아와서, 일치 당시에도 미묘했던 서방-동방의 관계는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성상(조형물)|성상]]파괴령을 내리면서 더 벌어졌다.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성상파괴령을 단호히 거부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 한 세기가 넘은 내전 끝에 843년에는 성상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의 결합은 요원해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포티우스 분열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특히, [[동로마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는 중이던 서기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대제]][* 궁재 출신의 카롤링거 가문이 메로빙거 가문의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후, 카롤루스 대제(768년 ~ 814년) 때 전성기를 맞이함.], 즉 샤를마뉴를 서방의 새로운 황제([[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시킴으로써 두 교회 중심지의 골은 이제 메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 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고 만다.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왕]]의 사후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 상속[*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받으며 제국은 한 세대 만에 분열되었고, 이후 북쪽에서부터 [[바이킹]]이 침공해와 정착하며, 서유럽은 [[봉건제도|봉건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동시에 [[교황령]] 또한 크게 늘어나게 됐다. 845년에는 [[마자르족]]의 [[아르파드]]가 동유럽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정복활동을 벌인 후, 정착해 나라를 세운다. 이후 그의 손자와 증손자에 의해 10세기 초 [[가톨릭]]으로 귀의한 뒤 대공의 지위를 얻으면서 [[헝가리 대공국]]이 된다.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을 병합하고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되면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되었다. 헝가리 대공국의 군주 이슈트반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으며 1000년에 헝가리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이 된다. || [[파일:카노사의 굴욕.jpg|width=100%]] || || [[카노사의 굴욕]](1077) [br] {{{-2 [[하인리히 4세]](中)가 [[클뤼니 수도원]]장 후고(左)와 마틸데 여백작(右)에게 간청하는 것을 그린 12세기의 삽화이다.[*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국왕이 아빠쓰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데에게 탄원하다)라고 적혀 있다.]}}} ||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사상·종교·사회·정치에 있어서 [[교황]]은 막대한 권위와 권력을 지니게 됐다. 특히 교황의 권한이 세속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커졌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1077년의 [[하인리히 4세]]를 굴복시킨 [[카노사의 굴욕]]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을 굴복시킨 [[존 왕]]에 대한 파문 사건(1209년) 등이 있다. 당시 교황의 힘은 단지 종교계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영적 권력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이탈리아의 노른자위 땅+각국의 교회에서 걷히는 세금을 바탕으로 한 세속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황이 황제나 왕과 직접 군사력으로 맞서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당시 황제나 왕들도 자국 내에 자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왕 못지않게 강력한 [[귀족|대영주]]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눈치를 계속해서 봐야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황제나 왕의 관을 씌워줄 권한'''이 있었고, 현직 황제나 왕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의 이들을 지원해 줄 '''군대와 돈'''이 있었기에 이렇게 강력한 교황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교황과 황제의 대립 과정에서 황제들이 옹립한 [[대립교황]]들의 존재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이 이런 목적에서 세운 대립왕(Contrarex, 다른 번역명으로는 반왕)들도 많았다. [[카를 4세]]가 교황이 세운 대립황제가 황제가 된 대표적 예이며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3세]] 등도 유명한 대립황제 출신 황제들이다. 이렇게 교황의 지원을 받은 황제들은 당연히 교황의 눈치를 잔뜩 볼 수밖에 없었고 성직 임명권, 교회 과세권 등을 넘겨주며 교황권을 강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종교의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올라가자 한때 교황들이 [[유럽]]의 왕이나 황제보다도 강력한 실존하는 권력을 뽐낸 적도 있다. 1305년부터 1978년까지 모든 교황은 [[삼중관]]이라는 관을 썼는데 왕관 3개가 쌓여 있는 형태이다. 이 삼중관은 [[서유럽]], 더 나아가 전체 [[가톨릭]] 세계의 왕과 황제, 대통령, 총리 등의 세속 지도자들보다도 교황의 권위와 권세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였다. 그러다 결국 막강해진 교황권에 의해 [[십자군 전쟁]](1095년-1291년)이 시작된다. 이 종교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제4차 십자군 원정|4차]](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이르렀을 때에는,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은커녕 [[예루살렘|목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해 버림으로써, [[정교회]]와의 연을 끊어버리는 등, 사실상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왔고, 결정적으로 1350년대에 유럽을 덮친 [[흑사병]]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면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 이때 [[아비뇽 유수]]도 발생한다.] [[몽골 제국]]이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등의 동유럽을 정복하면서 저지른 학살 등과 함께 몽골제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중앙아시아 평원 지대에서 시작되어 동유럽의 해상 교역로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진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은 7,500만 명~2억 명의 인구, 즉 당시의 유럽 인구의 최소 30%에서 50%, 지역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몰살하는 대재앙을 겪었다. 이로써,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농업)|장원]] 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 경제와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가 탄생할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 [[파일:HCOzzxa.jpg|width=100%]] || || [[잔 다르크]] [br] {{{-2 (1412~1431)}}} || 유럽의 중세 말기에 중요한 사건 하나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으로,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다. [[기사도]]가 최대 정점을 찍음과 동시에 쇠퇴기에 들어간 시기이며, 당사국인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물론 서유럽의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두 나라의 국민정체성을 싹트게 했다. ---그렇게 19세기 초엽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역사|오스만 베이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유럽의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옛날 룸 술탄국, 셀주크 투르크 때는 [[몽골 제국]]의 식민지로써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또 후에는 몽골제국의 계승국인 [[티무르 제국]]에게 앙카라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함으로써 술탄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등 최악의 흑역사를 계속해서 겪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마침내 오스만 제국은 옛날에 몽골제국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때처럼 티무르 제국의 지배에서도 벗어남으로써 드디어 최전성기를 누리게 되면서,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콘스탄티노폴리스를 넘어]](1453) 유럽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헝가리 왕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의 [[후녀디 야노시|군]][[블라드 가시공|주]][[슈테판 3세|들이]] 최선을 다 했으나, 결국 [[헝가리 왕국]]은 [[모하치 전투]](1526) 이후, 나라가 분열되고, [[왈라키아 공국]](1522)과 [[몰다비아 공국]](1476)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다. === 남아시아 === || [[파일:2016 06_23_23.jpg|width=100%]] || || [[마하보디 사원]] [br] 5세기경 축조 || [[이란]]의 [[사산 왕조]]에게 쿠샨 왕조가 망한 뒤 북인도에는 [[굽타 왕조]](320~550)가 들어섰는데, 이때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힌두교가 성립하는 등 인도 고전 문화의 기틀이 섰다. 그리스계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브라흐마]] - [[비슈누]] - [[시바]]의 3신 신앙이 이때 본격화되었으며, 왕은 힌두교의 화신('[[라자]]')으로서 권위를 누렸다. 굽타 왕조는 사무드라 굽타, 찬드라 굽타 2세, 쿠마라 굽타 등으로 이어지며 한 세기 넘는 기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다. 2대 사무드라 굽타는 북인도의 여러 왕국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합병했고 남인도의 여러 왕국을 굴복시켜 영향권에 두었으며, 3대 찬드라 굽타 2세는 사카 왕조를 무너뜨려 북인도의 서부 해안 지대를 확보하는 일련의 군사적 성공을 과시했다. (한편으로는 찬드라 굽타 2세가 지금의 아무 다리아 일대까지 원정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 또한 중국인 여행자 법현이 저술한 불국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의 인도는 국민은 평화를 누렸으며 각종 복지 시설이 잘 구비되고 치안이 원활하게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였다고 한다. 이전부터 전래되던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전승이 문헌으로 정리되었으며, 칼리다사 등의 시인이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힌두교]]의 등장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으나 학문적 연구와 미술적 발전은 계속되었고, [[0]]의 개념과 [[십진법]]을 기반으로 한 [[아라비아 숫자]][* 아랍을 통해 유럽에 해당 숫자가 알려지며 '아라비아 숫자'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 원산지는 인도다.]가 처음으로 만들어 지는 등 특히나 [[수학]]이 크게 발달했다. 이외에 지전설, [[지구]] 구형설 등의 과학 발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5세기경 굽타 왕조는 흉노족으로 추정되는 [[훈족]] 계통의 유목민족 [[에프탈]]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약화되었고 결국 이들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혼란 속에서 바르다나 왕조가 북인도를 한 차례 통일하였으나 순식간에 멸망하고, 인도는 다시 분열 시대에 들어간다. 흔히 굽타 왕조의 몰락을 인도 [[고대]]사의 끝으로 본다. 굽타 왕조의 붕괴 이후, 인도에서는 중소 국가들의 투쟁사가 전개된다. 이 시기부터 무굴제국의 등장까지를 흔히 인도사의 [[중세]]로 본다. 북방에서는 [[바르다나 왕조]] 이후 [[프라티하라 왕조]]로 대표되는 구자라트계 왕조(740~1018), [[팔라 왕조]](750~1174)의 양대 왕조가 흥성하였고, 데칸 고원의 [[라슈트라쿠타 왕조]](753~982)와 8~10세기에 걸쳐 [[카나우지]]에서 삼각 구도를 이루었다. 이 중 프라티하라 왕조는 미히라 보자와 마헨드라팔라의 재위를 거치면서 북인도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고, 300년 동안 이슬람의 인도 침입을 저지한 북인도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는 남방 지역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힌두 왕국인 [[팔라바 왕국]](3~9세기), 남인도 왕조로서 유일하게 갠지스강까지 진출한 [[촐라 왕국]](9~13세기), [[찰루키아 왕국]](6~13세기), [[비자야나가르 왕국]](14~17세기) 등이 동남아시아 및 이슬람권과 교역을 활발히 해나갔다. 또한 굽타 왕조가 국가 재정비를 위해 불교 대신 계급 위주의 힌두교를 후원한 이래 불교는 급속히 쇠퇴하여 갔으나, 8~9세기경까지 거대 군사제국이던 [[당(통일왕조)|당]]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계와 직접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이러한 불교의 쇠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제목에서도 5개의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인도의 세태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하층민들은 신분제의 틀이 엄격했던 힌두교 대신 평등 사상이 담긴 이슬람교를 많이 택했는데, 이 때문에 평등 사상에 힘입어 세력을 이어가던 불교는 다시 한번 치명타를 입게 된다. 당시 인도의 불교계는 상좌부/대승 불교로의 분열 이후 수많은 부파로 갈라져 이들 간의 소모적인 교학 논쟁에 집중되어 대중에 대한 관심이 많이 약해지고 오랫동안 주류 위치를 차지하면서 평등 사상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던 데다가 힌두교를 흡수하기 위해 신격과 주술, 의례를 받아들여 불교화한 밀교가 등장한 상태였는데 이 밀교가 이슬람이 유입되는 상황에서 되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이에 힘입어 이 시기는 샹카라, 라마누자 등 뛰어난 힌두교 이론가들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불교 철학을 논박하며 특히 아트만(자아, '나')과 브라흐만(우주와 그 통일적 질서)의 일체화(범아일여)를 중시하였으며, 베단타 학파를 융성하게 했다. 한편 8세기를 넘어 북부 인도에 [[이슬람]] 세력이 유입되면서 인도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게 된다. 이슬람 세력의 동진은 10세기 이후 본격화되어, 이슬람 계통의 [[가즈니 왕조]](962~1186), [[고르 왕조]](1117~1215)는 [[아프가니스탄]]계 [[투르크]] 왕조로서 인도로 침투하다가 마침내 [[델리]]를 점령하여 인도 이슬람교의 본격적 발걸음을 떼게 된다. 한편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호라즘 제국]]이 멸망하자 [[잘랄 웃 딘]]과 같은 [[호라즘 제국]]의 잔당세력이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서 인더스 강 너머로 도피한 경우도 있었다. 고르 왕조는 대정복자였던 무함마드 고리의 죽음(1206)으로 군벌들이 분립하면서 멸망하고, [[델리 술탄 왕조]](1206~1526)는 이 지역에서 토착화하여 완전히 북인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완전히 확립되지는 못해, 델리 술탄 왕조 내에서 순서대로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라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의 5개의 왕조가 교체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델리에 자리 잡은 술탄국들은 어찌되었건 점차 힘을 강화하여 점차 남방으로 진출하였고, [[몽골 제국]]의 계승국인 [[티무르 제국]]의 [[바부르]]가 인도를 정복하고 세운 [[무굴 제국]]의 건설에서 전초 역할을 하게 된다. 남방 지역에도 데칸 고원에 이슬람 왕조(데칸 술탄국, 1490~1596)가 자리 잡았던 반면, 힌두교를 믿는 왕조인 라지푸트('라자'에서 나온 말로, 힌두계 왕조를 지칭) 왕조들도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 힌두계 왕조로서 장기 지속된 왕조로는 건축의 발달과 교역의 흥성 등으로 유명한 [[비자야나가르 왕국]](1336~1649) 등이 있다. 비자야나가르 왕국 역시 델리 술탄 왕국처럼 여러 왕조가 교체되었으며(상가마 - 살루바 - 툴루바 - 아라비두), 이 중 상가마 왕조의 데바 라야 2세와 툴루바 왕조의 크리슈나 데바 라야 시기에 그 국력이 정점에 달하여 인도 아대륙 내에서 제일의 세력을 자랑했다. 데바 라야 2세의 시기에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스리랑카와 미얀마에게서까지 조공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1565년, 이슬람 연합군에게 탈리코타 전투에서 패배하고 수도까지 빼앗기며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 동아시아 === 중국에서는 로마까지 이어지는 세계 최대의 교역로 실크로드를 건설하면서 세계최강의 군사제국이 된 [[한나라]]가 부정부패와 내전, 군사쿠데타, 반란 등으로 썩어들어가 결국 쇠퇴하고, 그 빈자리를 두고 여러 군벌들이 내전을 하다 [[유비]]의 [[촉나라]],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가 [[삼국시대|천하를 삼분한다.]] 이후 조조의 가신이었던 [[사마의]]가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손자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국, 다른 국가들도 모두 정복하여 다시금 천하를 재통일하나 곧 멸망해 버렸다. 이후 이 대륙에는 300년 동안 거대한 통일 제국이 등장하지 못했고 크고 작은 수많은 국가들의 끝없는 정복과 학살, 전쟁만이 반복하는 혼돈의 대전쟁시대인 [[위진남북조시대]]가 펼쳐진다. || [[파일:ti_007_0350_01.jpg|width=100%]] || || [[장회태자]]묘의 벽화 <예빈도(禮賓圖)> [br] {{{-2 [[당나라]]를 방문한 외국 사신들을 그린 벽화로, 그림의 당나라 복장을 입지 않은 자들은 오른쪽에서부터 각각 북방 유목민, [[고구려]](혹은 [[신라]])인, 그리고 [[동로마 제국|동로마]]인이다}}} || [[고조선]]의 멸망 이후 약 300년이 흐르고 나서부터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서로 군사동맹도 맺고 배신도 때리면서 한반도의 주인 자리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계속한다. 589년에는 [[수나라]]가 재차 중원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고구려군이 막아낸다. 이 100만 이상의 대병력이 투입된 치열한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나며 수나라는 건국 40년만에 몰락해 버리고, 그 자리에 당시 실크로드를 다시금 장악하면서 세계최강의 군사제국이 된 [[당나라]]가 건국하면서 황제가 친정을 감행하여 다시금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항쟁으로 정복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당제국 - 신라 군사동맹, 고구려 - 백제 - 일본의 군사동맹 구도가 형성되어 한반도를 두고 [[삼국통일전쟁]]이 펼쳐진다. 여기서 당나라와 신라가 승리하여 [[676년]],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당제국이 [[대동강]] 북쪽 땅을 정복하게 되면서 안동도호부 등을 설치해 식민지배를 하게된다. 하지만 당나라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신라를 침략해 한반도 전역을 정복해서 식민지배한다는 야욕을 펼쳤지만, 삼국의 유민이 힘을 모은 [[나당전쟁]]에서 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냄으로써 신라는 드디어 통일 국가인 [[통일신라]]로 거듭나고,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은 멈추고 이윽고 당나라는 서쪽으로 정복전쟁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이후 한반도 북부 만주에는 고구려의 마지막 장군 [[대조영]]을 필두로 한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를 정신적으로 계승한 군사강국 [[발해]]를 건국한다(698). 발해는 200년 동안 만주 일대의 넓은 땅을 호령하며 융성했지만 [[거란]]의 침공 등 원인으로 갑작스럽게 멸망하게 된다(926).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의 개혁과 [[다이카 개신]](646) 등으로 부족 연합체였던 야마토가 중앙집권제 국가로 거듭나고,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확립한다. 또한 이때 쇼토쿠 태자가 불교도 수입한다. 이후 당제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며 문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융성하게 발전한다. [[천황]] 중심의 국가가 운영되었으나 지방 각지에서 군사반란이 자주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여 성장한 무사 계급이 성장하여 결국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하고 천황은 허수아비 신세가 된다. 중국에서는 거대 제국 당제국이 내전으로 쇠퇴하고 [[북송|송나라]]가 건국된다.(960) 그 근처인 만주에는 발해가 멸망한 자리에 [[거란족]]이 [[요나라]]를 건국한다.(916) 한반도에는 오랜 역사 끝에 신라가 쇠퇴하고 [[고려]]가 건국된다.(918) 고려는 거란, 여진 등과 계속 전쟁하며 옛 고구려 영토들을 되찾기위해 고군분투한다. 한편 [[여진족]]은 제법 강력한 [[금나라]]를 건국하고(1115) 곧 무섭게 성장하여 송나라, 요나라와 전쟁하기에 이른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고(1125), 곧 송나라도 멸망시키고(1127), 고려에게는 군신 관계를 요구한다. 송나라 황실은 중원의 남쪽으로 퇴각 하여 [[남송]]을 건국한다. 그렇게 동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금나라의 영향 아래 동아시아 지역의 구도가 완전히 확립되는가 싶었으나... || [[파일:Mongol_Empire_map_2.gif|height=150]] || || [[몽골 제국]]의 확장[* 빨간색: [[몽골 제국]]. 1294년 [[쿠빌라이 칸]] 사후 4분할 이후로 보라색: [[원나라]], 연두색: [[킵차크 칸국]], 진한 초록색: [[차가타이 칸국]], 연한 초록색: [[일 칸국]] ] || 그러나 당시 세계를 정복하게 되는 [[칭기즈 칸]]이 치하하는 몽골군이 송나라, 금나라 등 주변국들을 닥치는 대로 멸망시키며 정복하고 마침내 전 세계를 정복하여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세계최강의 [[몽골 제국]]을 수립한다(1206). 고려는 [[몽골 제국]]에게 [[여몽전쟁|끈질기게 항쟁하였으나]] 패배는 불가피해 보였고 결국 당시 [[원종(고려)|태자]]가 [[쿠빌라이 칸|쿠빌라이]] 황태자를 찾아가 그 앞에 무릎꿇었으나 이것이 당시 [[몽케 칸]]의 후계 문제로 [[아리크부카]]와 정통성을 겨루던 그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이에 [[쿠빌라이 칸]] 즉위 후 그는 딸 [[제국대장공주]]를 [[충렬왕]]에게 시집보냈고 고려는 식민지화되거나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전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부마국의 지위를 얻는 데 성공하여 간신히 멸망의 위기를 피할수있었다(1259). 이 시기에 몽골 제국은 최전성기를 누리는데, 그를 시초로 중국에는 세계최강의 [[원나라]] 제국이 들어서고, 이때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일본 원정도 꾀했으나]] [[가미카제|태풍]]으로 인하여 무산된다. 이 무렵 [[마르코 폴로]]가 원제국에 오게되면서 문화적으로도 동아시아 세계가 유럽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곧 내전으로 인해 제국들은 분열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중국에는 [[주원장]]이 원제국을 중원에서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한다.(1368) 원제국은 중원 북쪽에서 [[북원]]제국이란 이름으로 제국을 유지했으나 1388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직접 친정을 단행해서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오는 바람에 멸망한다. 고려 또한 쇠퇴하면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최영 장군을 죽이고 우왕을 폐위시키면서 [[조선]]을 건국한다. 그동안 외부 세계와 크게 영향을 주고 받지 않았던 일본에서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인해 일본은 대제국의 침략이라는 어마어마한 사태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국가가 파괴되어갔고 내부적으로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전국시대(일본)|전국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 동남아시아 === [[베트남]] 북부에서는 오래전에 월(越)족이 국가를 세웠으나 당시 등장한 대제국인 고대 중국 [[전한|한나라]]에게 정복당한(111) 이후 800년 동안 중국의 여러 제국들에게 돌아가며 식민지배를 당했고 그로 인해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문화적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되었다. [[쯩 자매]]나 [[조씨정]] 등 또한 계속해서 등장하며 끊임없이 중국에 저항하면서 독립을 시도했다. 907년 중원에서 대제국 [[당나라]]가 내전으로 멸망하고 960년에 다음 통일 제국인 [[송나라]]가 건국되기까지의 치열한 전쟁인 [[오대십국시대]]의 공백기 동안 중국의 지배력이 약해진 기회를 노려 [[응오꾸옌]]이 베트남에 주둔 중이던 중국군을 몰아내고 최초의 베트남 독립 왕조인 [[응오 왕조]]를 세웠다(938). 그러나 왕조 수립 후 30년 후 12명의 장군이 자기 세력권에서 일제히 난을 일으켜 [[십이 사군 시대]](965~967)에 들었고, 그중 한 명이었던 쩐람의 후계자 [[딘보린]]이 다른 장군들을 모두 복속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어 새 국가인 [[대월]]을 세웠다(968). 베트남 남부에서는 월(越)족과 민족적으로 다른 참족이 살았는데, 베트남의 월족이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배를 받을 때 이들은 [[참파]]라는 독립 국가를 세웠다(192). 그들은 한자를 사용하고 유교, 불교,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중화 문화의 영향력 아래 속해있던 베트남 북부와 다르게 참족은 민족적, 문화적으로 판이했고 이후 대월이 수립되고 나서 월족은 끊임없이 남쪽으로 국토를 확장해 나가며 참족과 대치했다. [[참파]]는 [[포 비나수오르]], 베트남어로는 쩨봉응아(制蓬峨, 제봉아)가 참파의 국왕으로 있었던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는 1360년 즉위하자마자 베트남에 사절을 파견하여 베트남이 빼앗아간 옛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고, 1361~1390년에 걸쳐서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당시 베트남의 [[베트남/역사#s-5.4|쩐 왕조]]를 공격하여 베트남을 크게 몰아붙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gkor_Wat.jpg|width=100%]] || ||<:> [[앙코르 와트]] [br] 12세기 축조 || [[캄보디아]] 지역에는 1세기부터 프놈(부남) 왕국이 존속하다가 6세기에 [[스리위자야]] 왕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프놈 왕국의 속국이었던 쩬라(전랍) 왕국이 독립하여 9세기에 그 유명한 [[크메르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크메르 제국은 태국, 라오스, 베트남 등으로 영토를 넓히며 동남아시아 지역의 절대적 강자로 군림했다. 수도였던 [[앙코르]]는 문화적 발전을 이룩했으며 그 상징이 바로 [[앙코르 와트]]였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태국 지역의 아유타야 왕국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점차 쇠퇴했으며, 속국이었던 란쌍도 자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수도 앙코르를 버리고 천도하여 동남아시아의 패자(覇者) 자리를 내려놓는다. 이때 자립한 [[란쌍 왕국]]은 훗날 삼국 분열과 식민 지배를 거쳐 오늘날의 [[라오스]]가 되었다. [[태국]] 지역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그중 몬족은 동남아시아에 가장 먼저 자리잡은 민족 중 하나로 동남아 각지에 드바라바티, 스리 고타푸라, 하리푼차이, 타톤 등 여러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크메르 제국]]의 성립과 타이족의 도래 이후로 점점 영토를 잃고 밀려나 오늘날 [[태국]]과 [[미얀마]]의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타이족은 본디 중국 남부에 살던 이민족이었으나, 고대 중국의 침략으로 식민지배를 당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8세기 [[당나라]] 시대에 [[안사의 난]] 등등 군인들의 내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당나라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나라군에게 다시 진압당하여 일부는 중국 남부에 남고 나머지는 버마족과 함께 동남아시아로 쫓겨나게 되었다. 라오족은 이 타이족의 일파로 [[라오스]] 지역에 정착했고, 나머지 타이족은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태국 일대에 터를 잡게 된다. 이중 미얀마의 샨 고원에 자리잡은 타이족은 샨족이라 하며, 오늘날 미얀마의 소수 민족이다. 중국 남부 지역에 남은 타이족은 [[대리국]]의 지배를 받다가 12세기에 쳉훙왕국을 건설하여 13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나, 이후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몽골 제국 등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 [[파일:람캄행동상.jpg|width=100%]] || ||<:>[[람캄행]] [br] {{{-2 (1239? ~ 1298?)}}}|| 몬족을 몰아내고 [[태국]] 지역에 자리잡은 타이족은 크메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수코타이, 란나, 파야오의 세 왕국을 세웠다. 수코타이 왕국의 [[람캄행|람캄행 대왕]]은 [[태국 문자]]를 창제하는 등 학문적인 발달을 이끌었고, 타이족 3국 동맹을 맺어 크메르 왕국에 맞섰으나 곧 파야오 왕국은 란나 왕국에 흡수되었고, 그 무렵 [[쿠빌라이 칸]]의 강성한 정복 전쟁으로 잠시 [[원나라]]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대왕 사후 쇠퇴기에 접어들어 결국 남쪽에서 일어난 [[아유타야 왕국]]에게 정복당했다. [[미얀마]] 지역에는 몬족과 퓨족 등이 살고 있었다. 9세기에 고대 중국의 [[남조(왕국)|남조]] 제국이 이 지역을 식민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즈음 타이족과 버마족이 중국 남부로부터 남하하여 버마족과 상술한 샨족이 이 땅에 터를 잡게 된다. 11세기 이 지역에는 버마족의 버간(파간) 왕국이 존재했다. 이 왕국은 몬족 등 주변 민족들의 땅을 빼앗으며 성장했으며, 이에 몬족은 끈질기게 대항한다. 1254년 당시 버간의 무능한 왕이었던 우즈나가 사망하자 실권자 야자티잔은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장자 타히투 대신 서자 나라티하파티를 즉위시킨다. 그러나 야자티잔과 나라티하파티 간에 충돌이 있었고 결국 나라티하파티는 야자티잔을 살해하나 이로 인해 왕권이 실추되었다. 이 즈음 [[원나라]]는 미얀마를 침략해 정복하면서 식민지배하게 되고, 항복을 타진하러 가던 나라티하파티가 타히투에게 살해되며 버간 왕국은 멸망한다. 미얀마의 북부 지방이 [[원나라]](원제국)에 정복되어 있는 동안 남부에서는 몬족이 [[한타와디 왕국]]이라는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고, 북부에서도 샨족이 원제국의 점령군을 몰아내기위해 고군분투했고 샨족과 버마족으로 이뤄진 잉와(아바) 왕국을 세운다. 그보다 북부에도 다른 샨족의 왕국들이 여럿 들어서 잉와 왕국과 끊임없이 싸운다. 15세기에 이 북부의 샨족들이 돌연 운남을 선공하자 미얀마를 침략하려는 기회를 노리던 명나라는 역공을 가해 잉와까지 초토화시키고 속국화시켰다. 그럼에도 북부의 샨족들은 존속하여 1527년에 잉와 왕국을 멸망시킨다. 이때 잉와의 속국이었던 [[따웅우 왕조]]가 독립하고, 곧 제국으로 성장하여 미얀마 전역을 통일했다. ||[[파일:external/tourjogjajava.files.wordpress.com/budur-1.jpg|width=100%]]|| || [[보로부두르]] [br] 8세기 중축 || [[자바 섬]]에는 화산의 계단식 논을 통한 농업 시스템이 발달해 있었다. 자바 섬은 모내기 농법의 발명과 화산성 토양의 비옥함 덕분에 농업이 발달해 있었는데, 이러한 논들에 물을 대기 위한 관개를 통제하기 위해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출현하게 된다. [[자바 섬]]의 역사에서 최초로 당대 문자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4세기 자바 섬 서부에 존재한 [[타루마 왕국]]이다. 타루마 왕국과 [[칼리만탄]] 지역의 쿠타이 왕국의 고대 비문은 남인도의 팔라와 문자로 적힌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인도 문화의 짙은 영향을 받은 당시 해당 지역의 상황을 보여준다. 7세기에 [[순다 왕국|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이 타루마 왕국을 계승하게 되었고 오랜 기간동안 공존하게 되었다. 자바 섬 동부는 서부와 달리 수많은 왕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는 순다 왕국의 산자야 왕이 세운 [[마타람 왕국]]이 있었다. 마타람 왕국은 발달한 농업을 등에 업고 많은 수의 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인력은 정복이나 건축 사업 등지에 동원되었다. 이 시대의 마타람 왕국의 주요 건축물로는 [[보로부두르]]가 있는데, 발굴된 유물이나 비문으로 추정하였을 때 중부 자바에 있던 마타람 왕국의 사일렌드라 왕조가 번성하던 약 8세기 무렵, 750~840년 사이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가장 큰 [[불교]] 건축물로 남아 있는 [[보로부두르]]는 [[불교]]를 숭상하던 마타람의 사일렌드라 왕조의 야심이 엿보이며, 시각적 디자인에서는 당시 자바 섬의 종교적, 문화적 특색이 묻어나오는데, [[만다라]]를 상징하는 수많은 층계와 더불어 전통 토착 종교, 힌두교, 불교의 세계관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에서는 믈라유(말레이) 왕국이 존재했는데, 7세기에 [[스리위자야 왕국]]이 등장하여 믈라유 왕국을 속국화, 이후 11세기에 완전 흡수하여 강력한 제해권을 가진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말라카 해협]]를 장악하고 있던 [[스리위자야]]는 상인들은 배를 이용하여 [[황금]], [[녹나무]] [[수지]], [[쌀]], 백단향, 그리고 [[육두구]]와 같은 [[향신료]] 등을 [[중국]]과 [[인도]] 지역에 수출하여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이렇게 지역간 교류가 활발해지며 [[힌두교]]와 [[불교]]가 유입되었으며 스리위자야에는 전통 신앙, 힌두교, 불교가 융합된 독특한 종교 문화가 형성되었다. 스리위자야의 해안 도시들은 다양한한 문화가 혼합되며 [[중국인]], [[말레이인]], 토착 원주민, 그리고 동남아 타 지역의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며 교류했다. 11세기 초에 들어서는 스리위자야가 사실상 도서부 동남아시아 인구의 대부분이 밀집된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를 모두 통제하는 패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스리위자야]] 왕국은 자바 섬을 정복하고, 이때 정복당한 마타람 왕국 마지막 왕의 조카이자 발리의 왕자인 아이를랑가가 [[카후리판 왕국]]을 세워 스리위자야 왕국을 몰아내고 동부 자바 지역을 돌려받는다. 그는 두 아들에게 왕국을 장갈라와 크디리의 둘로 나눠 물려주고 자신은 속세를 떠나 수도승 생활을 한다. 이중 크디리가 장갈라를 흡수하고, 크디리 내부에서 왕권과 종교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던 사이 1222년 종교 세력의 지지를 받은 지방 영주 켄 아록이 혁명을 일으켜 크디리 중앙군을 물리치고 [[싱하사리 왕국]]을 세운다. 싱하사리 왕국은 스리위자야 왕국과 대등하게 성장해서 이내 수마트라 섬 영토를 넘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 [[파일:라덴위자야.jpg|width=100%]] || ||<:>라덴 위자야 [br] {{{-2 (? ~ 1309)}}}|| 한편 [[스리위자야]] 왕국은 외부적으로는 촐라 왕국의 침략과 싱하사리 왕국의 압박에, 내부적으로는 믈라유 왕국 세력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결국 회복 불가할 정도로 쇠약해지고, 수마트라 섬에는 믈라유 왕국을 계승하여 다르마스라야 왕국이 성립되었다. 1290년 싱하사리 왕국은 다르마스라야 왕국을 정복하여 인도네시아 군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이 즈음 중원을 장악한 [[쿠빌라이 칸]]은 1280년, 1281년, 1289년에 싱하사리 왕국에게 원제국의 식민지가 되라고 사신들을 보내 명령했으나 새로운 강대국 싱하사리 왕국이 이제는 원제국과 대등한 관계라고 착각한 케르타네가라 왕은 세번 다 거절했다. 특히 마지막으로 명령을 가져온 사신의 경우 사신의 얼굴에 [[낙인]]을 찍어 돌려보내며 거절했고 이에 [[원나라]]는 격노해 [[자바 섬]]을 정복하기 위해 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1292년 [[원나라]] 군대가 자바 섬에 도착했을 때 싱하사리 왕국은 이미 자야캇왕 왕 치하의 크디리(글랑글랑) 왕국의 반란에 의해 3년 전 병합되어 버린 상태였다. 원군의 핵심적인 목표는 글랑글랑 왕국의 정벌이 아닌 자바 섬 정복이었기에 크디리 왕국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싱하사리 왕국의 죽은 왕의 양자였던 라덴 위자야는 기지를 발휘해 원제국에게 크디리 왕국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돕는다면 원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이에 원군은 라덴 위자야와 동맹을 맺어 크디리 왕국의 군대를 쉽게 격파했으나, 라덴 위자야는 게릴라 기습 공격으로 원을 배신하여 원군을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멸망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라덴 위자야는 [[마자파힛 제국]]을 건국하게 되었다(1293). ||[youtube(sZZTfu4jWcI,height=150)]|| || [[자바 섬|자바]], 순다, 그리고 [[발리]]의 [[가믈란]] [br] {{{-2 가믈란 음악은 8세기경 [[자바 섬]]에서 처음으로 등장해 [[마자파힛 제국]] 시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 14세기 여군주 [[트리부와나]], 그리고 그와 그의 남편 투마펠 공 차크라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하얌 우룩 황제 시대의 마자파힛 제국은 세력을 크게 확대하고 경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는다. 재상 가자 마다가 총지휘하고 제독 음푸 날라가 이끄는 대규모 해상원정으로 마자파힛 세력은 자바섬뿐 아니라 [[말레이 반도]]부터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 [[술라웨시섬]], [[말루쿠 제도]], 소순다 열도를 비롯, [[뉴기니섬]]의 서해안 지역까지 이르러, 현대 [[인도네시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확대되었으며 인도네시아 제도에서의 통일된 국체로서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14세기 황금기에 마자파힛 제국은 [[원나라]]-[[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튀르크]]-[[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교역 루트의 한 축을 장악하고 번영을 누렸다. 마자파힛의 궁정어인 [[자바어]]로는 수많은 시와 연대기가 쓰이는 등 문학적 발달 또한 이뤄졌다. 자바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막대한 양의 토기, 두상, 반신상, 부조는 이 제국의 영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주로 수도 마자파힛(트로울란) 근처를 중심으로 하여 동부 자바 전역에서 발굴되는 수많은 힌두-불교 사원 건축물 또한 대개 마자파힛 시대의 것이다. 마자파힛 시대 [[자바 섬]]의 대표적인 건축 유적으로는 파나타란 사원이 있는데, 파나타란 사원은 12세기부터 조성되어 14~15세기 중반까지 주로 증축된 대규모 사원으로, 자바식 힌두-불교에 영향을 받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부조가 특징이다. 또한 음악으로는 [[자바 섬]]에서 비롯된 [[가믈란]] 음악이 다양한 섬들로 유입되어 각 섬의 음악적 문화에 맞게 발달하였고, 금속 재질의 [[타악기]]들이 사용되기 시작해 특유의 청아하고 몽환적인 음색이 만들어져 현재까지 가믈란 음악은 이러한 모습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
[youtube(yOS78ul1_rA, width=300, height=150)] || ||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대서사시〉 [br] 13세기경부터 구전됨 [br] {{{-2 그리오(griot)들은 [[서아프리카]]의 전통적인 구전 역사가이자 음유시인이다. 이 서사시는 [[말리 제국]]을 건국한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케이타]]의 일대기와 활약상을 다룬다.}}} || [[서아프리카]] 일대에서는 [[가나 제국]](와가두)이 강한 경제력을 이용해 주변 왕국들을 거느리고 오랫동안 패권을 쥐고 있었다. 현재의 [[말리]]와 [[모리타니]] 국경 사이에 위치했던 가나 제국은 [[북아프리카]]와 [[사헬 지대]] 남쪽을 왕복하며 횡단하며 황금과 소금을 주로 거래하여 [[사하라]] 종단 대상(隊商)들, 그리고 영토 내의 수많은 금광들 덕분에 아주 부유해 질 수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기록한 문자 기록은 적기 때문에 [[가나 제국]]이 정확히 언제 발흥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6세기경에 국체가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나 제국의 존재는 서아프리카의 구전 역사가이자 음유시인인 그리오들, 그리고 서기 8세기 아랍인들이 글로 기록함으로서 그 실체가 확인된다. 9세기경 저술가 알야쿠비는 "가나는 매우 강력한 왕이 있으며 주변의 왕국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포함한 [[서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황금들이 나온다", "주변의 왕국들은 카우카우, 카넴, 말렐 등이 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가나 제국]]이 아우다고스트에 있는 남부 산하자의 무역 거점을 정복(1054)하면서 산하자족의 반발이 생겼고, 이는 가나의 연방제 내부의 마찰과 분열 및 [[무라비트 왕조]]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가나 제국은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정치적 붕괴로 인하여 11세기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다 내전과 가뭄으로 인해 몰락하였고, 이에 작은 도시국가들로 분열되어 있던 서아프리카 일대를 만딩고족의 지도자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케이타]]가 통합하였다. 이때 서아프리카 일대는 주술사 왕 소우마우로 칸테가 통치하는 소쏘족의 나라 소쏘 제국이 패권을 쥐고 있었다.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대서사시〉에 따르면 소우마우로는 잔인한 폭군이었다고 하는데, 이에 케이타의 군대는 소우마우로의 폭정에 맞서 싸웠고, 키리나 전투(1235?)에서 소쏘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며 [[순디아타 케이타|순자타 케이타]]는 말리 제국을 건국하였으며 황제의 칭호인 '[[만사]]'를 칭했다. ||
[[파일:p074jvk5.jpg|width=100%]] || || [[만사 무사]] [br] {{{-2 (1280? ~ 1337)}}} || [[말리 제국]]은 [[가나 제국]]이 그랬듯 압도적인 금 생산량으로 곧 서아프리카 경제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제9대 군주인 [[만사 무사]]는 본인이 독실한 무슬림인 것과 더불어, 사회 전반적으로 당시 선진적인 [[이슬람]] 세계에 밀착하기 위해 전국적인 이슬람 교육을 장려해 [[팀북투]] 등을 비롯한 도시들이 서아프리카의 학문적 허브가 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발달과 더불어 계속되는 사하라 종단 무역 덕분에 말리 제국은 문화적 황금기를 맞았는데, 때문에 "금은 북쪽에서, 소금은 남쪽에서, 지식은 팀북투에서 난다"는 당시 말리 제국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보여주는 서아프리카 속담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또한 기병대를 운영하여 세력권을 확대시켜 말리 제국은 니제르 강 근방에 위치해 무역하기 좋은 도시들인 가오와 젠네 등을 영토 내에 넣었다. 만사 무사는 또한 말리 제국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메카]]로 호화로운 성지순례를 벌였는데(1324), 그는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금화를 뿌렸고, 순례 중 [[카이로]]에서 멈춰 [[쇼핑]]을 즐겼다. 그러나 이때 황금을 시장에 너무 많이 풀어버리는 바람에 카이로에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지역 경제를 마비시키기도 했다. 만사 무사 본인은 현지의 대금업자들에게 일부로 고리로 돈과 황금을 빌려서 이러한 사태를 무마하려고 하긴 했지만, 카이로의 황금의 가치가 제자리를 찾는데는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
[[파일:217AD0DF-DE13-4199-A56C-6BCB86310AB4.jpg|width=100%]] || || 젠네 모스크 [br] 12~13세기경 건축 || >"나는 흑인들의 왕도인 말리에 도착하였다. 말리의 왕은 만사 술레이만이었다. 만사는 [[술탄]]이라는 뜻이고, 술레이만은 그의 본래 이름이다. [...] 흑인들의 선행으로는 부정이 적은 것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부정을 가장 적게 저지르는 사람들로서 술탄은 그 누구도 추호의 부정이라도 저지르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그들의 선행으로는 전역에 안전이 보편화되어 있다. 여행자건 상주자건 도둑이나 약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예배를 끈질기게 하는 것도 그들의 선행 중 하나이다. 그들은 꼭 집단예배를 근행하며 자식들을 그렇게 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끝으로 그들의 선행으로는 거룩한 [[쿠란]] 암송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자식들이 [[쿠란]]을 제대로 암송하지 못하면 쇠고랑을 채웠다가 암송해야 풀어준다. 어느날 나는 한 젊은이 곁을 지나갔다. 준수한 용모에 멋진 옷을 입은 젊은이인데,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동행자에게 '저 사람은 무슨 짓을 했습니까? 사람을 죽였습니까?'하고 물었다. 그 젊은이는 내 [[아랍어|말]]을 알아듣고 픽 웃었다. 그 옆의 사람이 나에게 '쿠란을 암송하라고 족쇄를 채운 겁니다'라고 말하였다." >------- >''[[이븐 바투타]] - 《여행기(리흘라)》[* [[정수일]]의 한국어 완역본에서 발췌. 다만 일반 독자들에게 조금 더 친숙한 표기법으로 수정했으며(예: 쑬퇀 -> 술탄), 일부 생략 및 접속사 추가 등의 수정이 있음.] 中 (1355)'' 이러한 일화로 인해 [[황금]], [[소금]], [[옷감]], [[노예]]들을 거래하려는 상인들과 이슬람 학자들 등의 방문객들이 말리 제국을 찾았다. [[이븐 바투타]]도 그중 한 명으로, 그의 여행기는 말리 사람들의 생활상과 말리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의 기록은 말리 제국의 여성들에게 경제적 자주권이 있었다는 것이나, 지도 계층과 상인들의 이슬람교와 일반 민중들의 토속 신앙의 공존을 추구하는 독창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5세기부터 말리 제국이 투아레그와 투클로르, 월로프의 반란 등을 겪으면서 차츰 쇠퇴해 갈 무렵 1464년에 손니 알리가 건국한 [[송가이 제국]]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해 큰 영토를 차지했으며, 말리를 밀어내고 [[팀북투]], 젠네, 가오 등을 비롯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했던 도시를 탈환하며 지역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아스키아 왕조의 치세 동안 송가이는 전성기를 누려 이슬람교가 전파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으며, 아스키아 왕조 초대 황제인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중동의 이슬람 세계와 외교 관계를 곤고히 하여 국제 세계에서 무슬림 국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16세기 말 송가이 제국은 내부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워졌으며, 이후 [[모로코]] [[사드 왕조]]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1591). 핵심적인 영토를 빼앗긴 채 변방으로 밀렸지만 근근히 약소국으로라도 살아있던 [[말리 제국]]은 모로코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하여 막아내는데 어떻게든 성공하지만, 결국 또 다시 일어난 내전과 대서양 노예 무역으로 인한 인력의 급격한 손실 등으로 인해 쇠락하여 멸망하고 만다(1670). ||
[[파일:WLA_metmuseum_Head_of_an_Oba_16th_century.jpg|width=100%]] || || 베냉 제국 여왕의 청동상 [br] 15~16세기 제작 추정 || [[서아프리카]] [[사헬 지대]]의 남쪽으로는 [[요루바]]족, 이보족, 에도족, [[아칸족]] 등이 지금의 [[나이지리아]], [[토고]], [[가나]]에 해당하는 지역 근방으로 문명을 이루고 살아왔다. 위에서 언급한 사하라 횡단 대상들과 무역 등 교류를 하며 경제적 생활을 한 이들의 문명에서 또한 수많은 수의 왕국, 제국들이 탄생하고 사라졌다. 1160년에 요루바인들이 건국한 오요 제국, 1180년에 에도인들이 건국한 베닌 제국 등이 주변 도시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11세기에 건국된 [[아칸족]]의 국가 보노만은 사하라 횡단 대상들과의 황금 거래를 통해 지역에서의 경제적 패권을 쥐었으며, 이후 다양한 아칸족 계열 국가들인 만케심, 덴키랴, 아콈, 아콰무 등의 국가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예술 문화에 있어 큰 발전을 겪었는데, 특히 베닌 제국은 조각술과 주조술이 발달해 아주 정교한 형태의 청동상 작품을 남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베닌 제국의 궁궐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베닌 청동상(Benin Bronze)은 그 정교함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대다수의 베닌 청동사는 유럽의 식민화 당시 약탈되어 현재 대다수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현재 [[나이지리아]] 정부에서 계속 반환을 요청 중이다.] 또한 아칸족 사람들은 화려한 색깔의 옷감인 '켄테(Kente)'를 제작하여 입었으며, 이는 아프리카 외의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범아프리카주의적 상징으로 사용되는 등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사하라 사막 전반으로 카넴-보르누 제국 또한 해당 지역에서 정치경제적으로 핵심적인 강대국으로 자리했다. 기원후 700년경에 카넴부 족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 카넴 제국은 오늘날의 리비아 남부와 니제르 동부, 나이지리아 북동부, 카메룬 북부, 차드의 차드 호 유역까지의 영토를 지녔다. 700년경부터 1086년까지 두구와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1085년부터 1846년까지는 세파와 왕조가 통치하였다. 사오인들과의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군사력이 쇠락하자 우마르 이드리스에 의해 1387년경 보르누 제국으로 국체를 계승하였다. 중앙아프리카의 [[차드 호]]를 중심으로 경제사회적 허브를 형성했던 카넴-보르누 제국은 막강한 [[기병대]]를 운영하는 등 군사적 힘을 떨쳤으며, [[투아레그족]], [[풀라니족]] 등 유목민 민족들과의 교류를 통한 경제적 영향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ab431a648a2785dc939ca3cdd7503a3.jpg|width=100%]] || || [[랄리벨라 암굴교회]] [br] 13세기 설립 || [[동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기원전에 이미 [[악숨 왕국]]이 건설되어 로마, 이집트, 인도 등과 활발히 무역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정립되었다. 에티오피아 문명에서 기독교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으며 악숨의 셰바 여왕과 이스라엘의 솔로몬 대왕의 이야기는 에티오피아사(史) 전반에서 정통성을 따지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악숨 왕국은 예멘 지역에도 진출하여 홍해 무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이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성장하여 악숨 왕국과 마찰이 지속되었고 악숨 왕국은 해상 무역의 장악력을 잃게 되며 쇠퇴하게 된다. 10세기에 악숨 왕국이 완전히 멸망한 후 한동안 이 지역에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는 혼란기가 지속되었는데, 자그위 왕조가 이를 종식하며 에티오피아의 새 주인으로 떠올랐다(1137). 자그위 왕조의 혈통은 솔로몬 대왕 및 셰바 여왕을 전승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의 기록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여 학자들은 이 왕조의 왕이 총 몇 명이었냐를 두고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이즈음 [[아프리카의 뿔]]의 이슬람화로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로서는 고립되었다. 그러나 [[카이로]]의 기독교인들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에티오피아 정교회 교인들의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 [[랄리벨라 암굴교회]]의 설립, 그리고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 지역에 세워진 여러 십자군 국가들과 교류한 정황 등 유럽과 서아시아의 기독교 문화권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에티오피아계 용병들이 십자군 측에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살라흐 앗 딘 유수프|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도 에티오피아계 기독교도들의 귀환을 장려했으며 에티오피아 출신 성지순례자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14세기 초 자그위 왕조의 웨뎀 아라드 황제가 서른 명의 대사를 유럽에 파견하여 교황과 대립교황을 만나고, 유럽의 여러 국가를 돌며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의 위협에 맞서 기독교 국가들과의 연대를 쌓고자 했다. 1270년 즈음, 솔로몬 대왕과 셰바 여왕의 직계 후손을 자처한 예쿠노 암라크의 봉기로 자그위 왕조가 무너지고 솔로몬 왕조가 들어섰다. 솔로몬 왕조는 대대적인 군사적 개편과 영토 확장으로 [[아프리카의 뿔]] 전역을 차지한다. [[포르투갈]]에 의해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전설]]에 나오는 전설의 왕국으로 알려지며 교류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이 나라를 찾기 위해 [[바르톨로뮤 디아스|바르툴루메우 디아스]]를 시켜 아예 [[아프리카]]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게 했다. 운 나쁘게도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것을 모르고 중도 포기했지만 대신에 [[희망봉]]을 발견하였다.][* 분명 바로 위의 문단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와 직접 교류까지 했는데 어떻게 전설 속 왕국으로 여겨질 수 있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당시 에리트레아와 지부티 지역이 반란으로 에티오피아로부터 떨어져나가 홍해로 통하는 교역로가 끊어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세월이 흐르며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잊혔기 때문이다.] 이후 [[아달 술탄국]][* 당시는 [[하라르]]를 수도로 하여 특히 '하라르 술탄국'이라고 한다]에게 정복당하여 14년 동안 통치를 받으나 포르투갈의 도움으로 국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 침략과 주변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위협, [[오로모인]] 등 여러 이민족의 이동으로 솔로몬 왕조는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
[[파일:external/34095555612_f673bac669_o.jpg|width=100%]] || || [[킬와키시와니]] 대모스크 유적의 내부 [br] 10세기경 건축 || [[동아프리카]] 해안으로는 [[인도양]]을 통한 [[유라시아]] 전역의 바닷길 무역이 이어져 [[황금]], [[상아]], [[목재]] 등의 무역을 통해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해안으로 다양한 도시들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인도양 바닷길 무역으로 발달한 도시들로는 [[모가디슈]], 말린디, [[몸바사]], [[잔지바르]], [[킬와키시와니|킬와]], [[모잠비크]], 소팔라 등이 있다. [[마다가스카르]] 섬의 주민들 또한 인도양 무역 상인들과 접촉하며 교류하였다. 특히 [[스와힐리]] 문화권을 형성한 느슨한 민족군을 일컫는 [[스와힐리족]] 사이에서 그러한 무역이 특히나 활황을 누렸으며, [[아랍]] 상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해당 지역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다. 해당 지역의 언어인 [[스와힐리어]]가 이때 당시 무역 공용어로 사용되며 [[아랍어]]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이 과정에서 동아프리카 지역에 [[이슬람]] 또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9세기부터 13세기에는 모가디슈를 중심으로 한 모가디슈 술탄국이 있었다. 당시 모가디슈는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과 페르시아를 연결하는 주요 도시이자, 동아프리카 황금 및 상아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성하였다. 또한 13세기 이후로는 아주란 술탄국이 출현하여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내륙에서는 [[반투족]] 민족들이 점진적으로 팽창하며 다양한 문화권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렵 채집 민족들이나 [[유목민]]들을 밀어낸 [[반투족]] 민족들은 공통적으로 발달한 농업, [[철기]] 기술, 석조 건축 등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중심으로 1375년경에 [[콩고 왕국]]이 이룩되었다. 콩고 왕국의 원래 국체는 음바타 왕국과 엠팡바카시 왕국이었는데 이들 국가는 14세기 말경에 결혼 동맹을 통해 합병되어 콩고 왕국으로 거듭났으며 그 시기는 대략 14세기 말 정도로 추정된다. 콩고 왕국은 빠른 속도로 주변 부족들을 군사적, 외교적으로 평정해나가며 세를 확장했으며 15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중앙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콩고 왕국은 '뭬네콩고'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일종의 연방제를 구성하고 있었고, 왕국에 속하지 않은 주변의 국가들인 응오요, 카콩고, 로앙고, 은동고, 마탐바 등의 국가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
[[파일:external/www.exploring-africa.comsitesdefaultfilesuploadsarticle324covergreat-zimbabwe-still-standing-strong-simonchihanga.jpeg.jpg|width=100%]] || || [[그레이트 짐바브웨|대 짐바브웨 유적]] [br] 9~15세기경 점진적 건축 || [[남아프리카]]에서는 9세기경 림포푸 협곡을 주위로 해 칼랑가어족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들에 의해 마풍구브웨 왕국이 수립되어 다양한 석조 유적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1세기 가뭄과 인력 부족으로 마풍구브웨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에 마풍구브웨 왕국이 멸망하자 [[쇼나족]]에 의해 짐바브웨 왕국이 세워졌다. 짐바브웨 왕국은 [[아랍]] 상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융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확장하였으며, 현재 [[그레이트 짐바브웨]]라고 알려진 대규모 도시 유적을 남겼다. 쇼나족은 또한 발달한 철기 제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철기 유적을 남겼으며, 또한 그들의 전통 악기인 [[음비라]]는 가느다란 철판을 이용하여 만드는 등, 발달한 제철 기술은 문화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짐바브웨 왕국은 또한 정교한 석상 유적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 왕권을 상징하는 새(鳥) 조각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후 짐바브웨가 쇠퇴하자 냐심바 무토타가 왕의 칭호인 '므웨네'를 칭하며 무타파 제국이 건국되었고(1350) 짐바브웨 왕국 영토의 대부분을 계승하였다. === 아메리카 === ||
[[파일:cliff-dwellings-culture-Ancestral-Pueblo-Colorado-Mesa.jpg|width=100%]] || || 선대 [[푸에블로]] 주택 유적 [br] 9~13세기경 건축 || 현 [[미국]]의 중서부, 동부 및 남동부에서 출현한 미시시피 문화(Mississipi Cultures)는 북미 대륙에서 가장 번성하고 발달한 문화 중 하나로, 서기 800년경부터 1600년까지 존속했다. 군집된 촌락들이 교류와 무역을 통한 공동체로 이루어진 미시시피 문화는 소위 카호키아(Cahokia)라는 도시유적을 남겼는데, 12~13세기에 최전성기를 이룬 카호키아는 당시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현재의 호피족과 주니족의 조상인 선대 [[푸에블로]]인들의 문명도 9~13세기 동안 번성하여 절벽은 깎아만든 독특한 공동주택 유적을 남겼다. 선대 푸에블로인들은 주택 뿐 아니라 발달한 [[도자기]] 등 화려한 예술 문화를 남겼지만 후에 가뭄으로 쇠퇴하게 된다. 수렵채집사회를 이룬 북미의 다른 원주민들도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일구었다. 자연환경에 따라 이들의 생활 양식은 달랐는데, 그 예로 서부 해안의 원주민들은 농업과 더불어 어업을 통해 [[물고기]]와 [[조개]] 등 바다 생물을 주로 먹고 살았고, 평원 인디언들은 [[유목]] 생활을 하며 [[들소]]를 사냥했다. 이러한 부족들 사이에서는 종종 정치경제적 연합이 이루어지고는 했는데, 그 예시 중 하나로 12세기경에 온타리오 호수를 주변으로 하여 결성된 [[이로쿼이 연맹]](호데노쇼니)이 있다. 이로쿼이 연맹은 현재의 [[미국]] 북동부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 사이에 걸쳐져 있었으며, [[히아와타]]를 비롯하여 데가나위다, 지곤사세 등의 평화주의적 정치 지도자들 아래 결성되어 [[방언연속체]]로 묶이는 모호크족, 오네이다족, 오논다가족, 카유가족, 그리고 세네카족으로 이뤄진 연합부족의 형태였다. 이들은 전쟁에 시달리는 다섯 부족이 형제애 아래 살아야 한다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며 연합을 이뤄냈고, 전쟁을 통한 공포 정치를 하던 모하크족의 지도자 타도다호까지 외교를 통해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쿼이 연맹은 '대평화율법'을 선포함에 따라 다섯 부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으며, 이들의 세련된 [[민주주의]]와 의회는 후에 [[미국 헌법]]의 제정에도 일부분 영향력을 미쳤다. 한편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정착하던 [[바이킹]] 탐험가들은 이 과정에서 [[북아메리카]]에 당도하게 되었다. 1000년경 [[레이프 에이릭손]]이 오늘날의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발견한 목초지에 빈란드(Vinland)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제 이곳에 위치한 랑스 오 매도(L'Anse aux Meadow)라는 어촌에서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스칸디나비아식의 구조물 흔적이 발견되었고 [[바이킹]]의 문화로 보이는 동제 핀과 물레가락으로 감은 실타래, 대장간의 흔적 등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바이킹들의 북아메리카 도착은 적응하기 힘든 환경의 차이 및 원주민들과의 갈등 등의 이유로 지속적인 정착 및 식민지화로는 이어지지 않았으며, 제한적인 물물교환 등 제한적인 형태로서의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흔적은 바이킹의 기록과 북미 원주민 구술 역사에 의해 상호 검증이 가능한데, 13세기의 노르만 문헌에 따르면 11세기 초 '스크렐링기'라는 원주민과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는 베오투크 족으로 추정된다. === 오세아니아 === 오세아니아에선 여러 원주민들이 [[카누]]를 이용하여 태평양 여러 섬들을 연결하며 교역하였고, 별자리를 이용하여 항로를 개척하고 지도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태평양 여러 지역에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 [[폴리네시아]]의 [[마오리 족]]이 10세기경 100~200명 단위로 가축과 작물을 싣고 [[뉴질랜드]]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16세기 유럽인들이 오세아니아에 진출하면서 원주민 문화는 파괴되기 시작한다. == 근대 시대(1500년경~1945년) == === 근세 서양 세계의 변화와 확장 === || [[파일:external/farm6.static.flickr.com/5607002448_3e2675f2b2.jpg|width=100%]] || ||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 [br] {{{-2 [[오스만 제국]]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는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그린 그림이다.}}} ||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이 1000년 가량 존속하던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동유럽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빈(오스트리아)|빈]] 앞까지 진출해 서유럽 국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동로마 제국]]에는 고대 그리스 문헌을 연구하던 학자 등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스만 제국의 손이 닿지 않는 이탈리아 등지로 진출해 [[르네상스]]의 발단에 일조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 학자들이 이탈리아 등지로 이주하고, 특히 [[메디치 가문]]같은 재력가들이 문화의 발전에 투자함으로써,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서는 [[르네상스]]가 태동하게 된다. 중세의 유럽인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수학, 예술 등이 아랍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들어와, 유럽은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점차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중요시하게 된다. [[유클리드]],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의 저서들도 대거 들어와서 철학과 수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미술을 발전시켰으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의 기틀을 쌓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보다 북쪽으로도 확산되었다. 따라서 [[르네 데카르트]], [[데이비드 흄]]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서유럽에서도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중심설을 주장하며 당시 유럽 학계의 정설과 대립하였고, [[요하네스 케플러]]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의 활약으로 [[천동설]] 세계관이 뒤집히게 되었다. 당시 유럽은 곳곳에서 [[대학교]]들이 세워졌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또한 [[프랜시스 베이컨]]으로 대표되는 근대 경험주의 철학은 과학 혁명의 사상적 근간이 된다. [[르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도 계속해서 발전했고, 이와 같은 사상의 발전은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등에 의해 근대적 [[정치철학]]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 [[자유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는데, 당시 유럽 경제는 [[은본위제]]를 근간으로 했기에 기축 통화량의 증가로 앞으로 등장할 자본주의 사회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자본주의 자체는 늘 있어왔지만 17세기에 봉건제를 밀어내고 주된 경제 체제로 자리잡는다]. 무역과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한 계급이 등장했으며 대규모의 무역을 수행하는 회사들이 생겨났고 이들의 경제 활동을 뒷받침할 [[주식]]도 발달했으며 국가가 회사의 활동을 지원하며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변화들과 함께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 중국 같은 강대국들과 교류가 활발해졌는데, 이로 인해 세계최초로 중국 [[송나라]]가 발명한 [[화약]]과 [[나침반]]이 시간이 흐른 후 유럽에 들어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게 된다. 한편 카톨릭은 [[중세 흑사병]]과 [[아비뇽 유수]]를 거치며 점점 부패하고, 이에 따라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루터]]와 [[칼뱅]] 등이 시작한 종교개혁은 점차 유럽으로 퍼졌으며,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국가들이 이때다 싶어 받아들인다. 결국 유럽에서는 구교와 신교의 대립으로 [[30년 전쟁]]이 벌어지고 결과적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과 함께 종교개혁이 인정받게 된다. 또한 칼뱅주의를 받아들인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게 되며, 여기서 또 구교를 믿는 지역이 떨어져나와 [[벨기에]]가 탄생한다. 한편 영국의 [[헨리 8세]]는 아내와의 이혼을 위해 [[성공회]]를 정식으로 만들게 된다. [[스튜어트 왕조]] 시기 영국 정치는 상당한 격변기를 맞이한다. 먼저 청교도 혁명이 발생해 의회파의 [[크롬웰]]이 왕 [[찰스 1세]]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다. 이를 기점으로 의회의 힘이 막강해졌는데, [[제임스 2세]]가 왕권을 강화하려 하자 의회는 권리장전을 강요해 퇴임시키는 [[명예혁명]]을 일으킨다. 얼마 안 가 스튜어트 왕조의 후계가 단절되자 의회는 혈통이 가장 가까웠던 독일인 [[조지 1세]]를 데려오는데, 문제는 독일인이었던 조지 1세가 영국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에 정치를 의회에 맡겼고, 이에 따라 영국에는 [[의원내각제]]가 급속도로 정착하게 된다. 발트해 지역에서는 1600년대에 [[스웨덴 제국]]이 여러 북방전쟁들을 거치며 흥했다. 그러나 [[루스 차르국]]의 차르 [[표트르 대제]]가 [[대북방전쟁]]을 통해 스웨덴을 격파하여 발트해의 패권을 장악한다. 이 전쟁으로 스웨덴 제국이 몰락을 시작했으며,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제국]]을 선포한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는 여자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본인이 왕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문제는 프랑크 왕국에는 여자의 왕위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이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프랑크 왕국에서 파생된 국가가 많다보니 조선판 예송논쟁이 발생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진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가 승리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에 올랐으나, [[프로이센]]에 [[슐레지안]] 지역을 빼앗긴다. 이에 복수하고자 [[7년 전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7년 전쟁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국가들이 싹 다 참전해 준-세계대전급 전쟁으로 확전된다. 여기서 프로이센이 골로 가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었는데, 하필 러시아의 신임 차르에 독빠였던 [[표트르 3세]]가 즉위하자마자 프로이센 편을 서 프로이센을 구원해 프로이센이 승전한다. 이로 인해 표트르 3세는 임기 6개월 만에 바로 폐위당하고 아내 [[예카테리나 2세]]가 왕위에 오른다. 한편 프랑스의 [[라부아지에]]가 화학 원론을 발간하며 [[화학 혁명]]을 일으킨다. === '신세계'와 '구세계' === ||<:>[[파일:portrait_de_christophe_colomb179026.jpg|height=150]] || [[파일:Hernán_Cortés_anónimo.jpg|height=150]] || [[파일:Francisco-Pizarro-portrait-Spanish-Conqueror-of-Inca-Empire-Painted-1850.jpg|height=150]] ||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br] {{{-2 (1450~1506)}}} || [[에르난 코르테스]] [br] {{{-2 (1485?~1547)}}} || [[프란시스코 피사로]] [br] {{{-2 (1478~1541)}}} || 고대 로마 시대부터 [[향신료]]의 거래는 동서양 무역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인도]]와 [[동남아]] 등지에서 생산된 향신료들은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 [[이집트]]의 시장에 등장했고 다시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들어왔다. 이 운송 과정에는 무수한 시간과 자원이 투입되었고 각종 자연 재해와 도적, 해적 떼의 위험도 늘 도사렸다. 그 탓에 향신료는 유럽에서 매우 고가의 사치품으로 소비되었는데, 경제학에서 말하는 [[사치재]]가 단순히 비싸기 때문에 소비되기도 하듯이 이 때문에 오히려 유럽 귀족들은 [[후추]]와 같은 향신료에 더욱 열광했다. [[오스만 제국]]은 팽창하여 이집트와 그리스 등 동지중해의 무역 거점을 모두 차지하고 쇄국 정책을 폈으며,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에 들어가며 인도-이슬람권-유럽 무역로가 끊기게 되었다. 이에 향신료와 다른 인도의 사치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유럽인들은 인도로 가는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앵무새]]와 솜뭉치, 창 외에도 많은 물건을 가져와서 유리구슬이나 매종(사냥용 매의 다리에 묶는 종)과 바꿨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기꺼이 교환했다. ... 그들은 탄탄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내가 칼 한 자루를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날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식민지|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일기장 中''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곧 현지의 인도인들 및 아랍인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캘리컷 항을 일방적으로 약탈하게 된다. 그와 다르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지구를 서쪽으로 돌아 아시아에 닿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콜럼버스는 통일 이후 해상 무역에 뛰어든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서쪽으로 항해했고, 이윽고 1492년 [[카리브 제도]]에 도착하며 [[레이프 에이릭손]] 이후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유럽인이 된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믿은 콜롬버스는 그가 '발견'한 대륙이 아시아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신대륙임을 최초로 유럽에 알린 사람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고, 이에 그 대륙은 그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 불리게 되었다. 한편 [[존 캐벗]]은 위도가 높을수록 항해 거리가 짧다는 점을 이용해 1497년 북아메리카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이었던 [[아프로유라시아]]의 '구세계'와 대비되는 [[아메리카]] 대륙의 '신세계'가 유럽인들의 세계관에 추가되었다. ||
[[파일:멕시코 고원 인디오의 인구 변화.png|width=100%]]|| || 멕시코 고원 원주민의 인구 변화 [br] {{{-2 유럽인들의 [[전염병]], [[학살]], [[플랜테이션]] 강제 노동 등의 착취로 의해 15세기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 신대륙에는 금은보화가 널렸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15~16세기에는 금전적 이득을 위해 아메리카로 떠나는 [[콩키스타도르]]들이 등장했다. 그중 [[에르난 코르테스]]와 그의 군대는 [[몬테수마 2세]]가 다스리던 [[아즈텍 제국]]을 침략하여 정복하게 되었다(1521).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와 망코 잉카가 다스리던 [[잉카 제국]]을 정복한다(1532). [[스페인 제국]]은 이후 중남미에서 수많은 금은보화와 역사적 유물을 약탈했으며, 이 과정에서는 원주민들을 향한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졌고 또한 유럽에서 전해진 [[천연두]]로 인해 원주민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하게 되었다. 한편 [[바스코 다 가마]]의 뒤를 이어 인도로 항해하던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잘못 항해하여 실수로 [[브라질]] 땅에 이른 일이 있었는데(1500), 이 덕에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영토 경계를 두고 다투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경 43도선을 기준으로 서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전부 스페인이, 동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전부 포르투갈이 가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을 맺었다. 조약 체결 후 얼마 안 가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페르디난드 마젤란]] 지원해 아메리카 동쪽으로 항해해서 더 얻을 만한 땅이 없는지 찾아보라 명령하였고, 이를 계기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새로 사라고사 조약(1529)을 맺어 동경 142선에 경계를 새로 그어 구형으로서의 지구를 양단하여 갖기로 합의한다. 158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베리아 연합]]으로 합쳐진 후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유명무실해졌고, 연합 해체 이후에 포르투갈 개척자들은 서경 43도선을 기준으로 서진하여 오늘날의 광대한 [[브라질]] 영토에 이르게 된다. 17세기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도 신세계 개척에 뛰어들어 곧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패권국으로 등극한다. 이들은 당연히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무시했지만 남아메리카는 이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북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 개발에 중점을 둔다. [[잉글랜드]]는 [[장미 전쟁]]을 마친 이후 [[튜더 왕조]]의 [[헨리 8세]] 치하에서 [[웨일즈]]와 [[아일랜드]]를 복속시키고 해군력을 서서히 키워나갔고,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는 스페인과 남미를 오가는 배들을 약탈하던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등용하여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꺾고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1607년에는 북아메리카에 [[제임스타운]]이라는 최초의 식민지를 세웠으나 정착에는 실패했고 1620년 오늘날 메사추세츠 플리머스 지역에 정착한 것이 미국사의 시작이다. 네덜란드는 14세기에 이미 청어잡이로 상업과 해상 무역이 발달해 있었고,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6세기 스페인의 지배에 맞서 [[네덜란드 독립전쟁|독립 전쟁]]을 벌였다. 1609년 양국이 12년간의 휴전 조약을 맺으며 여유가 생긴 네덜란드는 1613년부터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에 '[[뉴네덜란드]](Nieuw Nederland)'라는 식민지를 세운다. 1626년 뉴네덜란드는 수도를 '뉴암스테르담'으로 했는데, 이곳은 북아메리카 무역의 주요한 항구가 되었으며 훗날 [[뉴욕]]으로 이름을 바꾼다. 네덜란드는 비슷한 시기에 북아메리카 외에도 [[가나|골드코스트]], 코로만델, [[동인도 제도]] 등 세계 각지의 무역 거점에 교역소나 회사를 세웠고, 이는 식민지로 발전한다. 이러한 식민지 건설은 1948년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며 더욱 활발해졌고, 17세기 내내 식민지를 두고 포르투갈과 싸운다. 프랑스는 1534년 [[자크 카르티에]]가 북아메리카를 탐험하고 그 땅에 [[이로쿼이]]어의 '마을'이라는 뜻의 '카나타'를 바탕으로 [[캐나다]]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본격적으로 식민지 '누벨프랑스(Nouvelle-France)'를 건설한 것은 [[위그노 전쟁]]이 끝난 17세기부터이다. 이는 오늘날 [[퀘벡]]에 해당한다. 프랑스는 이후 [[30년 전쟁]]에서 승리하고 [[루이 14세]]가 즉위하며 강대국으로 성장한다. 이 즈음 영국과 네덜란드가 제해권을 두고 [[영국-네덜란드 전쟁|세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 프랑스가 한번은 네덜란드 편에서, 한 번은 영국 편에서 참전하게 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는 열강에서 탈락하게 되고, 영국과 프랑스는 곧 도래할 [[제국주의]] 시대의 주역이 된다. >중국인들은 영국과 네덜란드인들에게 비단을 팔고, 그 대금을 에스파냐의 페소화로 결제했다. 이 페소화는 지금의 멕시코와 볼리비아에서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주조한 것이었고, 그 원료로 쓰인 은은 에스파냐인들이 동원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강제 노역을 통해 채굴된 것이었다. [...] 은은 예멘의 모카에서 [[커피]]를 구입한 무슬림들 그리고 나중에는 기독교도들을 통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으며, 반면 커피는 [[메카]] 순례자들에 의해 모로코와 이집트를 넘어 페르시아, 인도, 자바, 그리고 오스만 튀르크에까지 퍼졌다. 프랑스 [[루이 14세]]는 이 무슬림들의 음료를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의 섬 상투메의 노예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나중에는 브라질에서 생산된) 설탕으로 단맛을 낸 뒤 중국 [[도자기]]에 담아 귀족들에게 소개했다. 커피를 마신 뒤에는 미국의 [[버지니아]]에서 재배한 [[담배]]가 제공되었다. >----- >''케네스 프메란츠·스티븐 토픽 -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中 (2003)'' '신세계'와 '구세계'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물품들이 교환되었으며 이는 유럽인들과 아메리카인들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를 [[콜럼버스의 교환]]이라고 칭한다. 아메리카로부터 아프로유라시아로는 [[감자]], [[고구마]], [[토마토]], [[고추]], [[옥수수]], [[카사바]] 등이, 아프로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로는 [[밀]], [[쌀]], [[보리]] 등의 작물들이 수입되었다. 또한 동물로는 [[말(동물)|말]]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입되어 북아메리카 평원 원주민들의 유목 방식을 바꾸어 많은 원주민들이 기마민족으로 탈바꿈 했다. 그러나 질병 또한 교환되었고, 아메리카로는 [[천연두]], [[홍역]], [[수두]]가 들여지게 되어 원주민들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아프로유라시아로는 [[매독]]이 유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생산성 높은 작물들로 인구가 늘어난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대다수가 사망했다. ||[[파일:삼각무역1.png|height=150]] || [[파일:African_slave_ship_diagram.jpg|height=150]] || || [[삼각무역]] || 노예선에 '적재'된 아프리카인들의 삽화 || 또한 [[플랜테이션]] 등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누린 유럽인들은 현지의 원주민들을 [[강제노동]]에 이용하여 그 노동력을 충당하고는 했는데, 그 예로 [[스페인 제국]]은 남아메리카에서 우앙카벨리카 산 등의 [[광산]]에 원주민들을 투입해 [[수은]]을 채취하도록 하였으며, 수은 중독과 고된 노동으로 인해 수많은 원주민들이 사망하여 심지어 몇몇 부모들은 자식이 어릴때 일부러 다리를 불구로 만들어 광산 노동에 끌려가지 않도록 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그러나 원주민만으로는 노동력이 충당이 되지 않자 유럽인 상인들은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들을 매매 및 납치하여 아메리카 대륙 플랜테이션 노동에 투입시키게 되었고, 이를 [[노예#s-2.6|대서양 노예 무역]]이라고 칭한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다양한 왕국들의 지도자들에게 유럽의 공산품들을 대가로 농노들이나 전쟁 포로들을 구매했고, 때로는 직접 마을들을 습격하여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해오기도 했다. 이로 인해 1500년경부터 1880년경까지 약 1000~1200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졌으며, 노예선에 '적재'된 15% 이상의 사람들은 매우 고되고 비인간적인 노예선에서의 처후로 인하여 사망했다. 아프리카인 노예들의 48%는 [[카리브 제도]], 41%는 [[브라질]], 5%는 [[미국]]으로 들어가 [[사탕수수]], [[담배]], [[커피]], [[목화]] 농장 등에 투입되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예제로 남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우생학]]과 [[백인우월주의]] 등의 인종차별로 정당화되었다. 그러한 만큼 대서양 노예 무역이 현대 사회에도 끼치는 영향과 피해는 아직까지도 크다. === 이슬람 세계의 변화 === ===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 === 명나라와 조선 건국 이후 조선 일대는 큰 전쟁 없이 상당히 평화로웠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가 진행되며 각 지방의 다이묘(영주)들과 사무라이들이 내가 최고가 되겠다고 들고 일어나 치고받으며, 어제의 부하가 오늘의 적이 되는 하극상이 비일비재했다. 이때 [[오다 노부나가]]를 중심으로 일본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직전에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이를 이어받아 완수한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된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만의 업적을 만들기 위해 [[임진왜란|조선을 침공]]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은 서양에서 받아들인 [[조총]]의 사용으로 큰 우위를 점했으나, [[이순신]] 수군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기고 명나라가 조선에 대군을 보내 활약해 계획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은 철군하게 된다. 한편 뒤에서 조용히 힘을 기르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세력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물리치며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에도 막부]]를 수립한다. 한편 임진왜란의 여파로 조선과 명나라는 혼란을 맞이한다. 명나라는 내부에서는 대규모 농민 반란인 [[이자성의 난]]이 발생해 수도가 털리고, 외부로는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건국해 결국 명나라를 집어삼킨다. 그리고 조선이 청나라를 섬기기를 거부하자 청나라는 [[병자호란|조선을 침공]]해 기강을 정리한다. 그렇게 청나라는 영토를 넓혀가며 청나라의 시대가 오게 된다. ===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세계의 변화 === === 혁명의 시대 === 17세기에 [[청교도]]인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을 피하고 경제적 기회를 좇아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농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이민자들로 인해 [[영국]]은 북미 대륙 동부에 [[13개 식민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 식민지들에는 영국 총독이 파견되었으나, 생존을 위해 들고 일어나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인한 원주민 대 정착민들의 마찰과 대서양을 사이에 둔 먼 거리 등의 이유로 13개 식민지는 조금 더 자치적이고 독자적인 의회를 가졌다. 영국은 [[7년 전쟁]](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재정이 약화되자 식민지에서 [[설탕조례|설탕세]], [[인지조례|인지세]] 등 일상 품목에 세금을 부과하였고, 그럼에도 식민지인들은 영국 의회에서 대표되지 않아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며 크게 반발했다. 이러한 사건으로 반영 감정이 더욱 커지다 영국 정부가 [[영국 동인도 회사]]에 차를 독점적으로 팔 수 있게 하는 특혜를 주자 반발한 차 밀수업자들이 원주민 분장을 하고 영국 선박을 습격해서 수많은 양과 금액의 차 상자들을 바다에 던져 버린 [[보스턴 차 사건]](1773)을 일으켰다. 이에 영국이 군대를 파병하여 압박하자 식민지인들은 [[민병대]]를 꾸려 대항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eclaration_independence.jpg|width=100%]] || || [[미국 독립 전쟁|미국의 독립 선언]](1776) ||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평등권|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천부인권|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권|행복의 추구]]가 있다. [[사회계약론|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저항권|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 이에 [[미국|아메리카의 연합]] 제 주의 대표들은 전체 회의에 모여서 우리의 공정한 의도를 세계의 최고 심판에 호소하는 바이며, 이 식민지의 선량한 인민의 이름과 권능으로써 엄숙히 발표하고 선언하는 바이다. >----- >''[[미국 독립선언서]] 中 (1776)'' 이에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존 애덤스]] 등의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대륙회의(1774)에서 영국과의 통상 단절 및 영국 상품 불매 등을 결의했다. 영국과의 물리적 충돌이 [[렉싱턴-콩코드 전투]](1775) 등을 통해 계속되자 제2차 대륙회의(1776)에서 [[미국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13개 식민지]]는 [[미합중국]]으로서의 공식적인 독립을 선언하였다. 해당 선언에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지식인들이 크게 영향을 받았던 [[존 로크]] 등의 사회계약론 등이 반영되어 있으며 자연법, 자유와 평등 및 [[행복추구권]] 등 [[인권]] 개념의 제도적 확립, 그리고 [[저항권]] 등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국가 이념으로 명시되었다는 점에 있어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미국 독립 전쟁]]에서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군은 우세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한 영국군에 크게 고전하였으나 [[벤자민 프랭클린]] 등의 독립 운동가들이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의 강성화를 우려하던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이 영국에 선전포고하거나 인력과 물자를 지원하게 되었다. 이에 대리전으로 발달한 독립 전쟁에서 영국군은 고전하다 [[요크타운 전투]](1781)에서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군과 [[라파예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패배하여 항복하였으며, 2년 후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을 완전 승인, [[미시시피 강]] 동쪽을 미국 영토로 편입, 그리고 [[플로리다]]를 [[스페인]]에게 반환하였다. 독립 전쟁 이후 미국의 13개 주는 무역 침체와 전쟁으로 인한 물가 폭등 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통합을 결의하였고, [[미국 헌법|연방 헌법]]을 제정하여(1787) 연방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789). 이렇게 미국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에 근거한 연방국이 되었으며, 한 국가로서 군사권과 외교권을 행사하지만 각 주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현재까지의 미국의 정치적 토대가 완성되었다. ||
[[파일:attachment/ancien_regime.jpg|width=100%]] || || 제3신분을 착취하는 [[앙시앵 레짐]]을 풍자한 만평 ||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가? 무언가 되기를 원한다." >-----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中 (1789)'' 한편 18세기의 [[프랑스 왕국]]에서는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이라고 불리던 구체제의 모순이 팽배하였다. 앙시앵 레짐은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1신분은 '기도하는 자'인 [[가톨릭]] [[성직자]], 제2신분은 '싸우는 자'인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은 나머지 전체 '일하는 자' 서민들이었다. 프랑스 인구의 98%를 차지한 제3신분에게는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고, 거기에 인구의 2%가 채 안되는 제1, 2신분이 프랑스 토지의 40%를 차지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제3신분에는 단순한 [[농민]]들 뿐 아니라 경제적 여유를 가진 상인들과 지식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카페]], [[살롱]], 독서 클럽 등의 공론장에서 [[계몽주의]] 사상을 키워나가며 앙시엥 레짐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한 것으로 인해 제정이 어려워지자 [[루이 16세]]는 조세 개혁을 꾸렸고, 이에 반발한 귀족들이 삼부회를 열으라고 요구해 1614년 이후 한번도 소집되지 않은 [[삼부회]]가 소집되어 각 신분에서 대표자들이 꾸려져 [[베르사유]]에 모였다. 이때 제3신분의 대표자들은 세 가지의 신분들이 하나씩의 투표권을 가져 머릿수만큼 평등히 대변되지 못하는 것을 문제삼았고, 이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삼부회에서 나와 국민의회를 선언하고 헌법 제정 전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맹세]](1789. 6.)를 맺었다. 제3신분의 요구에 동의한 일부 성직자들이 국민의회에 참여하자 루이 16세와 귀족들도 국민의회를 인정해야 했으며 국민의회는 국민제헌의회로 이름을 바꿨다. 이에 동조하고 있던 [[파리(프랑스)|파리]]의 시민들은 루이 16세가 파리에 군대를 보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1789. 7.)을 일으켜 무기를 탈취하고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이에 봉기가 전국적으로 퍼지며 프랑스의 분노한 농민들은 영주들과 지주들을 살해하고 토지대장을 불태웠다. 이에 국민제헌의회는 [[봉건제]] 폐기를 선언하였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1789. 8.)하여 "인간(homme, ''남자'')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서민들의 삶의 질은 여전히 좋지 않아 이에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1789. 10.) 등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했다가 붙잡히는 [[바렌 사건]](1791)이 발생하였고, 이에 [[부르봉 왕조]]의 왕권 정지를 골자로 하여 국민의회가 사라지고 입법의회가 탄생했다. ||
[[파일:9eaa28c0add6105d4dfe610952b2f57d.jpg|width=100%]] || || [[루이 16세]]의 처형(1793) || 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것을 우려한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등이 프랑스를 위협하였고 이에 국민 의회가 선전포고하여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했다(1792). 프랑스 국민군은 패전을 반복하며 고전하여 혁명이 위기에 처하자 프랑스 시민들은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프랑스)|파리]]로 몰려갔다. 이때 의용병들이 부른 노래인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 현재까지 프랑스 공화국의 국가로 불린다. 시민들은 튈르리 궁을 습격해 [[1792년 8월 10일 봉기]]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혁명의 움직임은 입헌군주제 개혁에서 공화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이에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국민공회가 탄생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산층을 대표한 온건파 [[지롱드파]]와 농업에 종사하는 하층민을 대표한 급진파 [[자코뱅파]]의 대립에서 자코뱅파의 주장이 지지를 얻어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1793). 이 전무후무한 사태에 충격을 받은 왕당파 국가들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등을 중심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맺어져 전투로 이어졌고 이에 프랑스는 국내외적 위기에 처해졌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반혁명파 세력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자코뱅파 정치인 [[장폴 마라]]가 지롱드파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자코뱅 중에서 급진파인 [[산악파]]의 지도자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는 반란을 유혈진압하고 지롱드파를 대규모로 숙청하였으며, 숙청이 계속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공포정치]]가 확립되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의 '인간'이 결국 '남성(homme)'이라는 점을 들며 반발해 여성 시민 또한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의 저자 [[올랭프 드 구즈]]도 이때 처형당했다(1793. 11.). 또한 혁명 정부는 [[인민주권]], 남성 [[보통선거]] 제도, 인민의 노동권을 바탕으로 1793년 헌법을 제정 및 선포(1793. 8.)하였으며 징병제, 토지 분배, 의무 교육, 최고가격제 등을 시행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코뱅파 내부 분열이 일어나며 산악파 내에서마저도 [[자크 르네 에베르]]와 [[조르주 당통]] 등의 주요 인물들의 숙청이 이어지자 결국 온건파의 반로베스피에르 세력이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며 그를 체포하였고, 이에 로베스피에르 본인도 단두대로 처형당하여 [[테르미도르 반동]](1794)이 일어났다. || [[파일:Napoleon_Bonaparte.jpg|height=150]] ||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br] {{{-2 (1769~1821)}}} || 로베스피에르가 타도된 후 테르미도르파의 국민공회는 산악파의 통제경제 정책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게 되면서 [[부르주아]] 계층의 자유를 확보했으며 제한 선거제를 규정하고 5인의 총재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폭발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무산계층(프롤레타리아)의 삶의 질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럼에도 국민공회는 기득권층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프랑스인의 지지를 잃었다. 대프랑스 동맹과의 오랜 혁명 전쟁을 통해 프랑스군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군 내의 지위를 높이고 있었다.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대프랑스 동맹을 격퇴하고, [[이탈리아 원정]](1796-1797)과 [[이집트 원정]](1798-1801)을 통해 거물로 떠오른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을 일으켜 총재 정부를 타도하고 통령 정부를 수립하여 종신통령에 취임하였다(1799). 유럽의 신성으로 떠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군사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제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9~1801)에서 [[마렝고 전투]]를 통해 오스트리아에게 승리하였으며(1800), 영국과 [[아미앵 조약]](1802)를 맺어 영국이 프랑스 공화국을 승인하며 전쟁을 끝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은행]] 설립을 통한 산업 보호와 국민 교육 제도의 확립과 훈장 제도의 도입을 통한 민족주의 고취 등의 성과를 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손꼽히는 것은 [[나폴레옹 법전]]이라 불리는 [[프랑스 민법전]]을 편찬한 것으로, 프랑스 혁명 정신과 재산 소유권을 보장한 근대의 [[대륙법]]을 대표하는 법전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국민적 지지에 힘입어 보나파르트 통령은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나폴레옹 1세에 등극했으며 이에 [[프랑스 제1제국]]이 출범됐다(1804). ||
[youtube(QUpuAvQQrC0,height=150)] || || 〈[[1812년 서곡]]〉, 1880년 [[표트르 차이콥스키]] 작곡 [br] {{{-2 [[나폴레옹]]이 주도한 [[러시아 원정]](1812)을 [[러시아 제국]]이 크게 격파한 것을 묘사한 대표적인 [[낭만주의]] [[표제음악]]이다.}}} || 영국에 경제제제를 시행하던 나폴레옹에 반발한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1803) 프랑스의 해상 봉쇄를 단행했으며,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이 발발하여 이에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맺어졌다. 제3차 동맹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 본토 상륙을 꾀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1805)에서 [[호레이쇼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 의해 패배하여 실패했으나,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를 격파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고 [[라인 동맹]]을 구성하여(1806)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려 프랑스 점령지와 영국 사이의 무역을 금지시켰으나 [[러시아 제국]]은 영국과의 무역을 계속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벌여 러시아 본토 침공을 단행하였으나(1812), 러시아군의 후퇴 전략과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말려 고초를 겪은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였다. 고전하던 프랑스군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가 공격하여 [[라이프치히 전투]](1813)에서 격파하였고 곧 파리를 점령하여(1814) [[부르봉 왕조]]의 왕정복고 및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탈출을 감행하여 프랑스에 돌아와 황제로 복귀하였고(1815. 2.), 이에 영국과 프로이센의 제7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쟁에서 [[워털루 전투]]를 벌였으나 프랑스는 결국 패배했다(1815. 6.). 나폴레옹은 [[백일천하]] 이후 다시 몰락하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어 여생을 마쳤다. 나폴레옹의 불꽃 같은 일대기는 분명 격동의 18세기 유럽에서 비롯된 피조물이며 곧 19세기 유럽의 모습을 빚어 놓았다. 그가 남긴 자취는 좋으나 싫으나 유럽사와 세계사에 들어 큰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는 나폴레옹 본인이 제일 자랑스럽게 여긴 [[나폴레옹 법전]]이 있으며 이는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가 유럽을 지배하며 유럽 대륙에서 사용하는 헌법의 표준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프랑스 국내로는 국민 교육 제도를 통해 국가적으로 표준 [[프랑스어]]가 사용되게 되었고, [[미터법]] 등 도량형이 통일되어 해당 단위는 현대까지도 세계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끝으로 나폴레옹의 팽창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전유럽에 전파시켰다.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은 나폴레옹 이후 유럽 전역에서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도 각 국가들의 민족주의를 고양시켜 이후 19세기의 자유주의 혁명과 민족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
[[파일:ExhObx_XIAIwtMB.jpg|width=100%]] || || [[아이티 혁명]] 당시 혁명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 || 한편 [[프랑스 왕국]]은 18세기 동안 식민 착취를 이어가고 있었고, 그중 현재의 [[아이티]]인 [[생도맹그]] 식민지에서는 살인적인 인권 탄압이 이뤄지고 있었다. 생도맹그 식민지의 주요 수출품인 [[사탕수수]]를 수확하기 위한 플렌테이션 노동은 매우 고되고 가혹하여 과로, 영양실조, 성비 불균형 등으로 노예의 절반이 생도맹그에 도착 후 1년 안에 사망했고, 때문에 지속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노예들이 투입되었다. 반란 모의를 막기 위해 각각 언어와 민족이 다른 노예들끼리 플렌테이션에 투입되었고, 이에 노예들은 [[가톨릭]]과 서아프리카 토착 신앙에 영향을 받은 [[부두교]]를 통해 영적 교류를 도모했으며, [[프랑스어]]와 아프리카 토착 언어들이 혼합된 [[아이티 크레올어]]로 소통하였다. 이러한 노예제로 인해 아이티에서는 프랑스계 백인 노예주들, 혼혈 태생의 자유인으로 교육과 경제적 기회가 주어졌으나 [[인종차별]]로 인해 정치적 힘이 없었던 유색인 엘리트, 그리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흑인 노예들이라는 인종적 신분제가 구성되었다. 간혹 도망노예들의 반란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대개 압도적인 화력 차이로 인해 쉬이 진압되었다. 1789년 프랑스 국민제헌의회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자 소식은 생도맹그에도 닿았고, 모든 인간은 자유와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는 모토는 백인 노예주, 혼혈 자유인, 그리고 흑인 노예들의 환영 섞인 지지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해당 모토는 각각 식민지에 대한 본국의 간섭 해소, 사회적 권익 향상, 그리고 근본적 해방이라는 기회를 함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혼혈 자유인들 중 지식인들을 위주로 사회적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백인들은 이를 억압했다. 그중 뱅상 오제라는 인물이 식민지 총독에게 투표권 등의 권리를 요구했고, 이를 묵살하자 사람을 모아 항쟁을 일으켰으나, 오제는 곧 체포되어 [[고문 바퀴]]로 처형됐다. 오제의 참혹한 최후는 강제노동과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흑인 노예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에 전국적 무장 투쟁이 일어나 수많은 노예들이 노예주들을 죽이고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
[[파일:Haitian_Revolution.jpg|width=100%]] || || 베르티에르 전투(1803) || 봉기가 들불처럼 번지자 식민지 백인들은 당시 프랑스 본토와 전쟁을 치르던 영국과 스페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프랑스 본토의 경제적 압박 및 [[카리브해]]의 식민지 노예들의 봉기 모방을 염려한 양국은 생도맹그에 파병하였다. 이에 맞서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국민공회는 흑인들로 하여금 영국군에 맞섬과 동시에 산악파의 이상에 들어맞는 [[노예제]] 폐지를 단행했다. 이즈음 노예 출신 군사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는 해방노예군을 이끌며 활약했는데, 국민공회가 노예제를 폐지한 후 루베르튀르는 영국 원정대를 격파하고(1798) 곧 [[포르토프랭스]]를 점령하여 생도맹그를 통제했고, 프랑스에게 흑인들의 권리를 보장해준다면 독립을 하지 않겠다고 유화 정책을 펼쳤으나, 곧 생도맹그 헌법을 시행하여 자치 정부를 꾸리자 당시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는 생도맹그에 파병하여 루베르튀르의 저항을 진압하고 그를 프랑스로 압송했다(1802). 그는 이듬해 감옥에서 사망했다(1803). 나폴레옹은 자코뱅파 등의 급진파가 사라지자 생도맹그에 노예제를 다시 도입하려 시도했고, 이 소식에 생도맹그의 시민들은 크게 반발하여 장자크 드살린 등의 인물 아래 무장 투쟁이 다시 이어졌다. 영국의 프랑스 해상 봉쇄로 인해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에 생도맹그 해방노예군에게 유리한 전세가 되었고, 베르티에르 전투(1803)에서 크게 승리한 혁명군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원주민인 타이노족의 언어로 '높은 산의 땅'이라는 뜻인 '아이티'로 국명을 바꿨다(1804). [[아이티]]는 [[중남미]]에서 최초로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한 국가이자, 아메리카 대륙 두번째 [[민주주의]] 국가이자,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자,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노예들이 성공적으로 스스로를 해방시켜 세운 국가라는 점에서 [[아이티 혁명]]은 큰 세계사적 의의가 있다. 이에 [[아이티 혁명]]은 [[카리브 제도]]와 [[미국]]의 흑인들, 그리고 독립 의식이 싹트고 있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인해 크게 줄은 인구와 파괴된 인프라로 인해 신생 독립국 아이티는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으며, 드살린을 포함한 정치인들의 폭정이 이어졌으며, 노예들의 혁명으로 이루어진 공화국이라는 특성상 유럽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없어 고립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1825년 '근대화 배상금'이라는 명목으로 1억 5천만 프랑을 청구하여 아이티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빚을 지게 했다. 아이티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내새운 프랑스 혁명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시로서 서구 식민주의, 노예제, 그리고 인종차별의 멍에를 보여주는 역사로 남아 있다. === 새로운 사회상과 제국주의 침탈 === 1700년대 후반 영국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간하고, 같은 달 [[제임스 와트]]가 최초의 증기기관을 발명한다. 또 4윤작법의 확산으로 식량생산량이 증가해 [[맬서스 트랩]]을 깨뜨린다. 그렇게 [[자본주의]]의와 [[산업혁명]]이 동시에 시작된다. 한편 유럽에게 아프리카는 [[말라리아]]로 인해 진입 불가의 땅이었는데, 1820년 프랑스의 펠리티에와 카방투가 남미산 키나나무에서 [[말라리아]] 치료제 키니네를 추출해 [[알제리]]에서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아프리카 침략이 급속도로 가속되기 시작한다. 또한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여파로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이 퍼져버려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게 된다. 먼저 영국은 카이로부터 케이프타운까지 세로로 식민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프랑스는 가로로 식민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워 이를 실현한다. 이후 독일이 카메룬, 탄자니아 등을 먹고 벨기에가 콩고를 먹는 등 꼽사리낀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로부터 조약으로 [[에리트레아]]를 받고,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려다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을 갱신하며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의 활약으로 독립국으로 남는다. 또한 유럽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까지 싹 다 침략해서 정복해버린다. 이 시기 청나라는 영국으로부터 [[아편전쟁]] 등 침공을 받아 홍콩을 할양해주고 강제로 개방하게 된다. 다만 태국은 [[라마 5세]]가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대가로 영토를 조금씩 떼어주며 독립국으로 살아남는다. 반면에 아메리카에는 독립 열풍이 불어닥친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골골대는 사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 [[크리올]]들이 아메리카를 독립시키고 남미의 권력을 잡는다. 대표적으로 포르투갈 왕태자 [[페드루 1세(브라질)|동 페드루]]가 [[브라질]]을 독립시켰으며, [[시몬 볼리바르]]의 활약으로 [[그란 콜롬비아]]가 탄생하고 [[산 마르틴]]의 활약으로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파라과이]] 등이 탄생한다.[* 시몬 볼리바르는 왕위에 올라 권력을 잡았지만, 산 마르틴은 권력을 거부하고 아르헨티나 내전에 중립을 선포했다가 아르헨티나 세력들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며 선동하고 축출해 말년은 가난하게 살다 죽었다.] 멕시코에서는 [[미겔 이달고]] 신부가 항쟁을 이끌다 스페인군 식민지군 사령관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에게 패배했으나, 이후 아구스틴이 독립의 편에 서서 멕시코를 독립시킨다.[* 이후 아구스틴은 황제가 되지만, 독재를 한 결과 반란이 일어나 폐위되고 사망한다.] 이후 볼리바르가 죽고 권력다툼으로 그란 콜롬비아는 분열되고[* 치열한 내전 끝에 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로 정립되었으며, 미국이 파나마를 떼가며 파나마가 강제독립한다.],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와의 [[500일 전쟁]]으로 우루과이가 떨어져나간다. 한편 미국도 팽창을 시작한다. 나폴레옹 시기 골골대던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구입하고, 멕시코로 이주한 미국인들이 [[텍사스]]를 독립시켜버리자 이를 계기로 [[미국-멕시코 전쟁]]을 걸고 서부 땅들을 먹어버린다. 또한 [[하와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미국-스페인 전쟁]]을 걸어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등을 얻어와 태평양을 장악하게 된다. 또한 [[파나마 운하]]를 얻기 위해 그란 콜롬비아에서 [[파나마]]를 강제로 독립시키고 파나마 운하를 건설한다. 한편 이 와중에 미국에는 노예 폐지론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영국과 미국이 흑인들을 각각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로 [[역이민]]을 시켜버린다. 그리고 미국의 노예 갈등은 극에 달아 [[남북전쟁]]이 발생하는데,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도덕적 우위를 가져가며 노예 반대론의 북부가 승리한다. 비슷한 시기 미국은 일본에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미일화친조약]](1854)과 [[미일수호통상조약]](1858)을 맺어 [[하코다테]] 등 5개 항을 개방하는 등 불평등 조약을 맺는다. 이때 일본에 서양 문물이 들어왔고, 일본은 서양처럼 근대화를 하자는 운동이 발생해 덴노측 신정부의 [[보신 전쟁]] 등을 통해 [[메이지 유신]]으로 정부를 뒤엎어버린다.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급속도로 근대화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시키고 [[을미사변]] 등을 통해 조선을 영향력 아래에 두며 팽창을 시작한다. 반면에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내부로는 [[서태후]]의 부정부패로 나라는 기울어갔고, 이에 [[홍수전]]이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라며 [[태평천국의 난]][* 홍수전이 세운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는 청나라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천경(=남경)을 수도로 했다. 그러나 무리한 [[태평천국의 북벌]]로 인해 청나라에게 멸망했다.]을 일으켜 대혼란을 맞이한다. 외부로는 [[아편전쟁]]의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한테 홍콩을 빼앗기고 러시아한테 연해주를 빼앗긴다. 이에 [[양무운동]]으로 근대화를 시작했으나 [[서태후]]가 자금을 [[긴빠이]]치는 등 실패하고, 결국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마저 지고 조선에의 영향력을 빼앗긴다. 이에 빡돌아 외세를 몰아내려는 [[의화단의 난]]이 발생했으나 진압당하고 반쯤 식민상태로 돌입한다[* 이 시기 청나라는 대한제국에게마저 개털리며 [[간도 분쟁|간도를 털리는]] 대참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쑨원]]이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이 건설된다. 한편 산업혁명의 결과 영국은 더 윤택해졌지만 노동자가 갈려나가는 현상이 발생하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시작으로 [[공산주의]]가 탄생한다. 러시아는 동진에 동진을 계속해 마침내 방대한 영토를 얻게 되었고, 영국과 함께 대립하는 열강국으로 변모한다. 러시아는 팽창을 위해 바다를 얻고자 남진하려 했는데, 이를 영국이 사사건건 방해하며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된다. 먼저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얻으려 하였으나 [[크림 전쟁]]으로 영국이 막아선다. 그 다음은 아프가니스탄 방면을 노렸으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방어당한다. 이때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조선이 [[아관파천]]으로 탈주해 러시아랑 손을 잡고 [[대한제국]]을 설립한다. 이로서 러시아의 새로운 진출로가 확보되는 듯 했으나, 영국의 동맹인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러시아는 모든 방면에서 패배해 그레이트 게임이 종결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하며 세계 열강 반열에 들어선다. 그리고 이 와중에 혼자 세력을 키우던 인물이 있었으니,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해 [[독일 제국]]을 건설한다. 비스마르크는 원래 균형외교를 추구하며 대외 분쟁을 자제했으나, 비스마르크가 죽고 국뽕에 찬 국민들이 균형외교를 파기하며 기존 최강국 영국과 신흥 강국 독일의 갈등은 예고된 시한폭탄이 되게 된다. === 두 차례의 세계 대전 === ||
[[파일:L20assassinsWEB-superJumbo.jpg|width=100%]] || || [[사라예보 사건]](1914) || 19세기 후반에 들어 식민지를 둘러싼 유럽 열강들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 분쟁을 놓고 [[독일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제국주의 팽창에서 뒤쳐진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범게르만주의로 탄생한 국가가 연이은 전쟁 승리를 거둔 상황은 독일인들에게 강대국의 국력에 걸맞는 식민지를 바라게 만들었다. 또한 유럽의 자라나는 민족주의 의식 때문에 다양한 민족들이 독립 국가를 원하게 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약화었되고, 곧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독립하게 된다(1878). [[세르비아]]와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 운동을 지원하였고, 이에 맞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범게르만주의를 제창하여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서로 맞서게 되었다. 그러다 [[베를린 회의]]의 결정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합병(1878)하자 [[세르비아]]가 격렬히 반대하여 발칸 동맹을 결성하였다. 발칸 동맹이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여 [[발칸 전쟁#s-2|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고(1912), 영토를 둘러싼 발칸 동맹 내부의 마찰로 인하여 [[발칸 전쟁#s-3|2차 발칸 전쟁]](1913)이 일어났다. 제 1차·2차 [[발칸 전쟁]]으로 인해 [[삼국동맹]]-[[삼국협상]]의 경쟁 구도와 대립도 악영향을 받았고, 세르비아는 영토 확장에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 조직 [[검은 손]] 소속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작위)|대공]] 부부를 암살하는 [[사라예보 사건]](1914. 6.)이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했다(1914. 7.). 또한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에 [[독일 제국]]이 선전포고했다(1914. 8.). 이렇게 제1차 세계 대전은 [[삼국동맹]]의 국가들인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 주축이 되는 [[동맹국]] 진영과 [[삼국협상]]의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이 주축이 되는 [[협상국]]이 경쟁하는 형태가 되었다. ||
[[파일:army-officers-British-trench-ANZAC-Cove-World.jpg|width=100%]] || || [[갈리폴리 전투]](1915~1916) || ||[[파일:external/rhpverdun.weebly.com/6744650_orig.jpg|width=100%]] || || [[베르됭 전투]](1916) ||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함락시키고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방면으로 집중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1914년에 8월에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에 침공하기 위해 중립국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침공하였고(1914) 이 과정에서 많은 벨기에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에 벨기에와 동맹인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1914. 8.). [[프랑스]]와 [[독일]] 사이 서부전선에서는 [[프랑스 파리|파리]] 앞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정체되며 1914년에서 1917년까지 참호전이 고착화되어 수많은 인력이 소모되었다. 그 중 [[베르됭 전투]](1916), [[마른 전투]](1916), [[솜 전투]](1916), [[파스샹달 전투]](1917)에서의 인명피해가 매우 극심했다. 국제정세를 주시하던 [[이탈리아 왕국]]은 [[런던 밀약]](1915)을 통해 [[협상국]]으로 편을 바꾸었고, 또한 [[불가리아 왕국]](1915), [[루마니아 왕국]](1916), [[오스만 제국]](1916)은 [[동맹국]]의 편으로 참전했으며 이러한 참전으로 [[갈리폴리 전투]](1915-1916) 등 협상국에 큰 타격을 입혔다.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는 기병과 열차를 이용한 기동전이 주로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독일과 오헝제국이 크게 동진하였다. [[러시아 제국]]에게 패배하며 난전을 겪던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배신자로 매도하며 강제 이주 정책을 자행했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여 [[아르메니아인 대학살]](1915-1917)을 일으켰다. 한편 제국주의가 주된 원인이 된 전쟁인 만큼 동서부전선을 가리지 않고 식민제국들이 징집한 식민지인 군인들 또한 대규모로 투입되었는데, 정치적 지위 향상과 경제적 동기 등을 이유로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인도인들이나 프랑스의 식민지인 [[알제리]]와 [[서아프리카]] 지역의 아프리카인들이 대규모 참전하였다. 식민지인들의 활약은 때로 새로운 국가 정체성과 독립심을 불어넣었는데, 예를 들어 [[비미 리지 전투]](1917)에서 큰 활약을 거둔 캐나다군의 경우가 있다.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과 같은 중립국의 선박까지도 공격하였다. 독일은 미국의 여객선인 [[RMS 루시타니아]]를 격침시켜(1915) 민간인들이 사망하여 미국의 반독감정이 격해졌고, 이후 독일이 밀지를 보내 [[멕시코]]에게 미국을 공격할 것을 청한 [[치머만 전보]]가 발각되며 미국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1917. 4.). 미국의 물량과 인력은 협상국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전세는 동맹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이 [[2월 혁명]](1917. 2.)으로 무너지고 이후 [[10월 혁명]](1917. 10.)으로 수립된 [[소비에트 러시아]]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전쟁에서 이탈하자(1918) 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하였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제정이 각각 평화조약으로 [[트리아농 조약]](1920. 6.)과 [[세브르 조약]](1920. 8.)을 맺으며 국체가 해체되고 전쟁에서 이탈하며 독일의 전세는 더욱 불리해졌다. 결국 독일에서 또한 [[킬 군항의 반란]]을 계기로 [[빌헬름 2세]]가 퇴위하며 제정이 무너졌고 이에 독일 또한 최종적으로 항복하였으며(1918. 11), [[독일 11월 혁명]]의 결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1919). ||
[[파일:external/media-2.web.britannica.com/121178-004-945062DD.jpg|width=100%]] || || [[10월 혁명]](1917), [[블라디미르 레닌]]의 연설 || >자본가의 정부는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왕관을 쓴 강도 [[빌헬름 2세|빌헬름]]을 우두머리로 하는 독일 자본가도, 그 밖의 모든 나라 자본가도 자본주의 이윤의 분배를 위해, 세계 지배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수억 명의 사람들과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이 범죄적인 전쟁에 끌려 들어가고 있다. 모든 나라 인민들에게는 죽음, 기아, 파멸, 야만을 가져다주지만 자본가에게는 파렴치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높은 이윤을 선사하는 ‘수익성 있는’ 사업에 수천억 금의 자본이 투자되고 있다. 이 끔직한 전쟁에서 빠져나와 강압적이지 않고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강화를 맺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데, 그것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모든 국가 권력을 쥐는 것이다. >------ >''[[블라디미르 레닌]] - <4월 테제> (1917) 中'' 1차대전에서 러시아는 난전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전쟁에 대한 회의와 차르에 대한 불만이 늘었다. 이에 1917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전제군주제 반대, 전쟁 반대, 노동자 처후 개선, 성평등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진압군이 시위에 동참하며 노동자·군대·농민의 대의원 [[소비에트]](평의회)가 형성되었다(1917. 2.). 이 [[러시아 2월 혁명#s-2.3|2월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섰으며 [[러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멘셰비키]]가 장악한 임시정부는 전쟁을 이어갔고 실질적 변화는 이뤄지지 않아 러시아인들의 신의를 잃었다. 이에 소수 엘리트를 공산 혁명의 주체로 파악한 전위당론을 주창한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가 이끈 [[볼셰비키]]는 4월 테제를 통해 모든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 전쟁 즉각 중지,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부를 요구하며 인민의 지지를 얻었다.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로 [[러시아 혁명#s-2.7|10월 혁명]](1917. 10.)이 일어나 임시정부는 붕괴되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레닌의 통치 아래의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1918)을 맺어 동유럽의 영토 양도를 대가로 1차대전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또한 레닌은 토지와 산업의 국유화 등 사회주의 개혁에 착수하였고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을 창당하여(1919) 세계 각국의 노동 운동과 반제국주의 및 식민지 해방 운동을 물질적으로 지원했다. 한편 반볼셰비키 세력이 다시 규합해 [[러시아 내전]](1917~1922)이 일어났으나 끝내 볼셰비키가 승리하였다. 레닌은 [[신경제정책]]을 통해 사회 수습에 힘써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이후 안정된 생산력과 정부를 바탕으로 주변국들의 소비에트 정부들과 연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건국되었다(1922). ||
[[파일:Bundesarchiv_Bild_183-R52907,_Mannschaft_mit_Gasmasken_am_Fla-MG.jpg|width=100%]] || || [[방독면]]을 착용하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독일군]] 병사들(1916) || >가스! 가스! 서둘러! — 정신 없이 더듬거리며 >투박한 방독면을 겨우 시간에 맞춰 썼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소리지르고 비틀거리며 >버둥거렸다. 마치 불 속이나 횟물에 빠진 사람처럼... >희미하고 자욱한 녹색 빛과 김 서린 방독면 너머로 >녹색 바다에 익사하는 그를, 나는 보았다. >... >벗이여, 구사일생의 무용담을 갈구하는 아이들에게 >그리 열변을 토하지 말라.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복되고 영광스럽도다"라는 케케묵은 거짓말을. >----- >''[[윌프레드 오언]] - <복되고 영광스럽도다{{{-3 Dulce et Decorum est}}}> 중 (1920, 사후 출간)''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양상은 기존의 전쟁들과 달라 최초의 현대전으로 평가받는데, 우선 [[전투기]]가 도입되어 공중전이 일어나며 [[공군]]이 매우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전차]]와 [[잠수함]]이 도입되어 육전·해전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기관총]], [[수류탄]], [[화염방사기]] 또한 개량되어 더욱 살상력이 커졌고, [[독가스]] 또한 사용되어 가스전이 벌어지며 [[방독면]]의 중요성이 커졌다. 또한 [[서부전선]]에서는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인해 양측이 [[참호]]를 파서 대기하다 군인들이 [[기관총]] 세례를 뚫고 무인지대(no man's land)를 건너 적의 참호로 달려나가는 [[참호전]]이 고착화되었는데, 축축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한 [[참호족]], 그리고 전쟁 스트레스로 인한 [[셸쇼크]]를 호소하는 군인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피해로 인해 유럽의 지식인들은 제국주의 침탈과 더불어 1차 대전을 돌아보며 [[근대]]과 [[유럽]] 문명에 대한 회의감을 보이기도 했다. ||
[[파일:Affiche-guerre_Femmes-au-travail.jpg|width=100%]] || || [[영국]] 여성 노동자들의 물자 생산을 독려하는 프로파간다 포스터 || 1차 대전은 또한 [[전면전]]으로, 참전한 나라들이 가능한 모든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남성들이 군인으로 징집되어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군수 공장과 농장에 투입되어 군용 물품을 생산했고 이에 여성의 사회 참여가 높아졌다. 그 예로 독일에서는 중공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1/3을 차지할 정도였다. 이에 여성의 전통적인 성 역할이 전복되었고, 또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활발히 이루어져 [[뉴질랜드]](1894)와 [[호주]](1902)에서 여성 참정권 인정이라는 성과를 이룬 [[서프러제트]] 운동이 1차 대전 이후 큰 힘을 얻어 서구권의 많은 여성들이 투표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페미니스트 운동가 중 한 명인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노예로 사느니 반역자가 되겠다"며 상점 유리창 깨기 등의 과격 투쟁을 통하여 목소리를 냈다. 이에 [[소비에트 러시아]](1917), [[독일]](1918), [[영국]](1918), [[미국]](1920) 등의 국가에서 여성의 투표권이 보장되는 성과를 이뤘다. 전쟁의 최후반부인 1918년경에는 [[스페인 독감]]이라고 흔히 불리는 인플루엔자 범유행이 일어났으며 전세계적으로 대규모의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1차 대전의 인명 피해와 물자 피해는 그 전례가 없었던 것이었고 이에 [[협상국]] 주도 하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다(1919). 회의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 평화 원칙에 의거하여 진행되었으며 [[민족자결주의]]가 주요 의제가 되었다. 이에 [[국제 연맹]]이 형성되었고 군비 축소와 영토 유지 등의 안건이 가결되었으며 [[협상국]]과 독일 사이에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졌다. 많은 승전국들은 식민지를 계속 가지게 된 반면 패전국들은 민족자결주의로 다양한 민족들이 독립하며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특히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막대한 보상금, 군비 대규모 감축, 그리고 모든 식민지 상실이라는 처지에 처해졌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일본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동아시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강점기|한반도]]에서는 항일 투쟁인 [[3.1 운동]](1919. 3.)이 일어났고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1919. 4.). [[중화민국]]에서 또한 민족자결주의와 [[신문화운동]]을 바탕으로 학생 운동인 [[5.4 운동]](1919. 5.)이 일어났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쑨원]] 등에 의해 [[중국국민당]] 창당(1919), 그리고 [[천두슈]] 등에 의해 [[중국공산당]] 창당(1921)이 이뤄졌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1차 국공합작]](1924~1927)으로 함께 힘을 함쳐 군벌 소탕 및 대일 항쟁을 벌였다. [[쑨원]] 사후 국민당의 [[장제스]]는 [[국민혁명]](1926~1928)을 단행해 [[북벌]]을 진행하고 [[베이징]]을 장악하여 [[난징]]에 정부를 둔 통일된 [[중화민국]]을 선포하자 이에 공산당이 반발하며 [[국공결렬]]이 일어났으며(1927) 국민당은 [[초공작전]]을 통해 공산당 섬멸을 시도했다. [[오스만 제국]]이 쇠락하자 이에 오스만의 지배를 받던 [[아랍]] 민족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가 일어 범아랍주의 등의 사상이 힘을 얻었다. [[영국 육군]]과 아랍인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영국이 지지한다고 약속했고, [[영국 육군]]의 후원을 받아 봉기를 일으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와 [[파이살 1세]] 등의 주도 하에 아랍 반란(1916)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이크스-피코 밀약(1916)을 맺어 중동 지역을 분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후 유대인들의 협력을 받기 위해 [[벨푸어 선언]](1917)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방에 [[시오니즘]]에 근거한 [[유대인]]의 국가 수립을 약속하는 이중적 행보를 보이자 아랍인들의 큰 반발을 일으켰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발생한 중동 갈등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
[[파일:main-qimg-12848799cc095fe8cb0f8f0b59e67395.jpg|width=100%]] || || [[터키어]]의 새로운 문자로 도입된 [[라틴 문자]]를 직접 써보이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928) || 1차 대전과 아랍 반란으로 튀르크인이 살지 않는 영토를 잃게 된 [[오스만 제국]]은 국가적 영향력이 줄고 내정 간섭에 시달렸는데, 협상국이 오스만 제국의 분할을 계획하고 이에 반발한 튀르키예 민중들의 대항으로 [[튀르키예 독립전쟁]](1919~1923)이 일어났다. 이에 [[오스만 제국]] [[육군]] 장군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주도로 튀르키예는 [[아나톨리아]] 영토를 지켰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 공화국]]을 수립하고(1923) 근대적 [[국민국가]]로서의 튀르키예를 만들었다. 또한 [[아타튀르크]]는 국가적 근대화에 앞장섰는데, [[세속주의]]와 [[정교분리]]를 추구하며 [[칼리파]] 제도를 폐지하고(1924)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였다(1930). 또한 아타튀르크는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짙게 받은 기존 [[터키어]]의 순화·표준화 운동을 벌였고, 어려운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를 도입하여 문자 개혁을 일으켰다. 다만 민족주의 정책에 의해 소수민족 박해 또한 이루어져, 데르심 반란(1937)을 진압하며 많은 [[자자족]], [[쿠르드]]족, [[아르메니아인]]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아일랜드]]는 온건 자치 운동이 영국의 반응을 얻지 못하자 [[마이클 콜린스(정치인)|마이클 콜린스]] 주도의 [[부활절 봉기]](1916)를 시작으로 [[IRA|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설립되어 무장 독립 투쟁이 일어났다.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신페인]]이 개신교도가 많은 [[북아일랜드]] 지방을 제외한 아일랜드의 모든 의석을 석권하자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을 선언하여 아일랜드 독립 전쟁(1919~1921)이 발발하였다. 이에 영국이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의 자치령으로 인정한다는 조약을 제안하자 찬성하는 자유국파와 반대하는 [[IRA]]파 간 [[아일랜드 내전]](1922~1923)이 일어났고, 자유국파 승리로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었다(1923). 아일랜드는 이후 1937년에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 [youtube(giJ0YMaAc8s,height=150)] || || 1936년 [[찰리 채플린]] 감독·주연 〈[[모던 타임즈]]〉 [br] {{{-2 [[찰리 채플린|채플린]]은 〈[[모던 타임즈]]〉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기계 문명의 폐해와 [[대공황]] 시대의 혼란상을 익살스레 풍자했다.}}} || 1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 성장이 이어졌다. 특히나 미국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주가는 연일 급등했다. 이러한 호황 덕분에 [[자동차]]와 [[라디오]]가 미국 가정에 보급되고,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영화 산업 또한 발달해 [[찰리 채플린]] 등의 인물이 출현했으며, 미국 흑인 음악인 [[재즈]]가 크게 유행하여 [[루이 암스트롱]] 등의 인물이 출현하는 등 문화적인 발전도 이어졌다. 이를 미국에서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혹은 '[[재즈]]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과잉 생산으로 인한 재고 증가 등 여러 이유가 맞물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 이후 기업들과 은행들이 파산하여 [[대공황]](1929~1930년대 후반)이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전세계적 삶의 질 악화, 노사 갈등, 시장 경제에 대한 회의, [[쿠 클럭스 클랜]]이나 [[반유대주의]]과 같은 차별주의의 부상 등의 사회적 갈등 심화가 일어났다. [[미국]]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추진,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정부 지출 및 확대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또한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고, 식민지와 본국을 연결하는 파운드 블록과 프랑 블록을 형성했다. [[소련]]에서는 레닌의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여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을 통해 강력한 중공업 육성을 추진하였고 [[소련]]의 모든 산업과 경제 활동을 국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하여 소련은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서구권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강력한 사회적 검열, 정치범들의 강제수용소인 [[굴라크]] 등을 이용하여 반대파와 소수민족을 탄압하여 [[대숙청]]이 일어났고, [[코민테른]] 약화 및 반소비에트적이라고 여겨지는 문화를 탄압하는 등 강력한 [[전체주의]]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
[[파일:베니토 무솔리니.jpg|height=150]] || [[파일:1_Adolf-Hitler-.jpg|height=150]] || || [[베니토 무솔리니]] [br] {{{-2 (1883~1945)}}} || [[아돌프 히틀러]] [br] {{{-2 (1889~1945)}}} || 이러한 사회 혼란을 바탕으로 [[전간기]]에는 [[극우]] [[전체주의]] 사상인 [[파시즘]]이 부상했다. 1차대전 종전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개념을 창시, [[국가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여 [[로마 진군]](1922)을 통해 일당 독재를 확립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선 [[베르사유 조약]]의 무리한 배상금 요구로 인한 경제적 침체와 이어진 [[초인플레이션]], 그리고 이후 [[대공황]]으로 독일인들의 분노가 커졌는데, 이를 바탕으로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출현하여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 [[우생학]]을 근본으로 한 파시스트 사상인 [[나치즘]]을 내세우며 각종 사회 갈등의 책임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전가함과 동시에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했고, 독일 민족이 [[레벤스라움|'살 공간']]을 내세우며 침략 전쟁을 선동했다. 나치당은 선거를 통해 제1당이 되었고 히틀러는 [[바이마르 헌법]]을 무력화 한 뒤 [[나치 독일 총통]]이 되었다(1933). 히틀러는 [[국제연맹]] 탈퇴, [[베르사유 조약]] 파기 선언, [[라인란트 재무장]]을 감행했으며(1936), 비밀 경찰인 [[게슈타포]]를 설치하여 군국 독재를 강화시켰다. [[5.15 사건]](1932) 등이 벌어지는 등 [[군국주의]]가 부상하던 [[일본 제국]] 또한 대공황으로 인한 혼란을 침략 전쟁으로 타개하려 하였는데, 군부의 급진파들이 [[만주 사변]](1931~1932)을 일으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옹립하고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고, 이에 국제 사회의 비판이 일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1933). [[일본 제국]]은 이어 [[중일전쟁]]을 일으켜(1937) 중국 대륙을 침략했다. 중국 본토에서는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는 상황에서도 [[중국국민당]]이 공산당 섬멸에만 총력을 기울이자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과 [[주더]] 등 하에 [[대장정]](1934~1936)을 벌여 근거지를 [[장시성]]에서 [[산시성(섬서성)|산시성]]으로 옮겼다. 이러한 좌우 분쟁을 중단하고 함께 항일 투쟁에 앞장서자며 [[서안 사건]](1936)이 일어났고 이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 [[2차 국공합작]](1937~1946)이 일어나 초당적 항일 투쟁이 이뤄졌다. 일본은 침략 중 [[난징 전투]](1937)에서 승리하여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포로]]와 [[민간인]]을 대규모로 학살, 고문, 성폭행한 [[난징 대학살]](1937)을 일으켰다. ||
[[파일:external/www.pablopicasso.org/guernica3.jpg|width=100%]] || ||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 1937년 || || [[파일:Members_of_the_Maquis_in_La_Tresorerie.jpg|width=100%]] || ||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대원들(1944) ||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우파 반란군 사이에서 인해 일어난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프랑코를 지원하는 것을 계기로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추축국]]을 형성하였고(1936), 이후 [[일본 제국]]도 가입하면서(1937) 추축국 3국의 침략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해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1935~1936)을 일으키며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병합]](1938)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을 요구했는데, 소련의 부상을 염려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완충지로 하기 위해 히틀러에 유화 정책을 펼쳐 [[뮌헨 협상]]을 통해 수데텐을 넘겨주었으나 히틀러는 약속을 깨고 6개월 후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병탄했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의 영토도 요구했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거부하자 좌우로 대립하던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이 동유럽에 각자 진출하는 대신 상호간에 공격하지 않는다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1939)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나치 독일은 조약을 바탕으로 [[폴란드 침공]]을 감행,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본격적인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1939). [[나치 독일]]은 빠르게도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점령했다(1940). 프랑스 남부에는 독일의 괴뢰국인 [[비시 프랑스]]가 세워졌고, 이에 [[영국]] [[런던]]에 [[샤를 드골]]이 이끄는 [[망명 정부]]인 [[자유 프랑스]]가 세워졌다. 유럽 전역으로 나치에 맞서는 파르티잔 대원들의 항전이 활발히 이뤄졌다. 드골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레지스탕스]] 운동을 독려했다.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등에서도 전투가 일어나며 [[아프리카]]로도 전선이 확대되었다. 1941년 추축국은 [[발칸 반도]]에서 연합군을 밀어내 유럽 일대를 장악했으며,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했다(1941). 일본은 지하자원을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 국가들을 침공하였고, 이에 미국이 일본에 물자 판매를 중단하자 일본은 [[진주만 공습]](1941)을 감행했다. 이에 미국이 태평양 전선에 참전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어 독일의 선전포고로 유럽 전선에도 참전했다. 일본군은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푸아뉴기니]] 등 서구 열강의 동남아시아 태평양 식민지들을 점령하며 확장하였고 이에 [[호주]]와 [[뉴질랜드]] 또한 일본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
[[파일: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jpg|width=100%]] ||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1945) ||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1942)에서,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에서 승리하여 추축국의 팽창을 저지했으며, 영국에서는 [[컴퓨터과학|컴퓨터과학자]] [[앨런 튜링]]이 독일군 암호인 [[에니그마(기계)|에니그마]]를 해독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국민들의 신의를 잃고 실각되었고, 연합군의 상륙과 [[파르티잔]]의 활약으로 전세가 밀리자 이탈리아는 항복했다(1943). 또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프랑스 파리]]를 수복했고(1944), 이후 동서로 나치를 죄어오며 [[베를린 전투|베를린에 상륙]]하자(1945) 히틀러는 자살했고 나치 독일은 항복했다(1945. 5.). [[해리 트루먼]], [[윈스턴 처칠]], [[장제스]]는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미국이 [[맨해튼 계획]]에서 개발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사상 최초로 투하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소련]]이 만주로 진격해오자 일본은 항복했다(1945. 8.). 연합국은 [[카이로 회담]](1943), [[얄타 회담]](1945), [[포츠담 회담]](1945)에서 전후 수습을 토의했다. 전후 독일은 [[얄타 회담]]에 따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분할 점령했고, 일본은 [[연합군 점령하 일본|연합군 사령부가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고(1949),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에 따라 주권을 회복한다. 또한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 [[극동국제군사재판]]을 통해 전범들을 처벌했다. ||
[[파일:66935A-1400x1005.jpg|width=100%]] || ||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어린이 생존자들 || >1943년 1월 13일 수요일 >매일 밤 수백 대의 비행기가 네덜란드를 지나 독일의 마을로 가 폭격을 퍼부어 쑥대밭을 만들어. 소련과 아프리카에서는 매 시간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아무도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어. 온 세계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연합군에게 유리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아. >... >전쟁이 가지고 온 고통에 대해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럼 내 자신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질 것 같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고통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일뿐이지. 유대인과 기독교인, 그리고 온 세상이 고통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거야.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겠지. >----- >''[[안네 프랑크]] - <[[안네의 일기]]> (1947, 사후 출간) 中'' [[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유발한 전쟁으로 남았으며 특히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다. 그러한 피해 중에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 절멸을 위해 유럽 내 900만여명 중 600만여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살해한 [[홀로코스트]]를 일으켰으며, 또한 [[집시|롬인(집시)]], [[슬라브인]], [[장애인]], [[성소수자]], [[정치범]] 등 또한 학살했다. 또한 민간인을 향한 대규모 폭격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사상 최초 원폭 투하]], [[난징 대학살]] 등 전례 없는 규모의 대규모 [[학살]], [[식민지]]인들의 강제 징병·노동, 대규모 [[1938년 황허 홍수|홍수]]나 [[벵골 대기근|기근]] 등의 인재(人災), [[일본군 위안부|일본군이 자행한 성노예제]]나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등 [[성폭행]],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인종차별로 인한 민간인의 강제 이주]] 등 매우 심각한 인권 유린이 이뤄졌다. 따라서 [[세계평화]]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공감대와 [[국제연맹]]의 부실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에 샌프란시스코 회의(1945)의 결정으로 [[1945년]] 10월 24일 공식적으로 [[연합국]] 주도 하에 [[국제연맹]] 이후로 세계를 아우르는 범세계적 기구인 [[유엔|국제연합(유엔)]]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유엔은 분야별 전문 기구를 갖고 [[국제연맹]]과 다르게 분쟁 해결을 위해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가 총회보다 우선시 되게 되었으며, 2차대전 당시 연합국이었던 5개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에 거부권이 부여되어 이후 강대국들의 정치적 경쟁에 이용되는 등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 현대 시대(1945년~현재) == === 냉전과 탈냉전 === || [[파일:1920px-NATO_vs._Warsaw_(1949-1990).png|width=100%]] || || 파랑: [[북대서양 조약 기구]] [br] 빨강: [[바르샤바 조약기구]] || ‘[[냉전]](冷戰)’은 물리적인 전쟁인 '열전(熱戰)’에 반대되는 말로, 적성국 관계인 두 나라가 실제로는 ‘뜨거운’ 일대일 전면전을 하지 않지만 군비경쟁, 대리전, 첩보전, 선전전, 심리전, 문화전 등의 방법으로 ‘차갑게’ 대치하는 상황을 말한다. 세계사에서 '냉전'이라고 한다면 주로 2차대전 종전 이후 20세기 중후반 [[미국]]과 [[소련]] 사이의 대립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 대립에서 비롯된 이 두 강대국의 대치는 세계를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로 분할시켰고, 이로 인해 제3차 세계대전이나 핵전쟁에 가까웠던 위기들이 찾아와 전세계인이 몇번이고 마른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종전 후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 확장과 팽창,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화가 이뤄졌으며 이를 [[윈스턴 처칠]]은 ‘[[철의 장막]]’이라고 불렀다. [[미국]]은 [[공산권]]에 대항하는 경제적 조치인 [[트루먼 독트린]](1947)을 발표했고 이후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군사·재정적 지원인 [[마셜 플랜]](1947)이 시행되었다. 또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가 창설되었으며(1947) 이후 나토에 서독이 가입하자 소련은 이에 대항해 [[바르샤바 조약기구]](1955)가 탄생했다.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를 대량 제조하며 군비 경쟁에 돌입했고, 이는 [[뉴클리어 아포칼립스|핵전쟁으로 인한 세계 멸망]]의 공포와 [[상호확증파괴]]의 개념을 확립했다. [[스탈린]] 사후(1947) 서기장으로 취임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며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였으나 미국과의 체제 경쟁은 계속되었고, 헝가리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인 [[헝가리 혁명]](1957)을 유혈 진압 하는 등 여전히 동구권에 대한 통제를 공고히 하였다. || [[파일:6.25 2.jpg|width=100%]] || ||||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작전]](1950) || [[그리스 왕국]]에서는 정부와 공산당 사이에서 발발한 2차 [[그리스 내전]](1946~1949),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가 장악한 서[[베를린]]을 [[소련]]이 봉쇄하여 [[미국]]이 시민들에게 비행기로 식량을 조달한 사건인 [[베를린 봉쇄]](1948~1949) 등 물리적인 냉전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공산당]]과 [[장제스]]의 [[국민당]]의 불화로 일어난 제2차 [[국공내전]](1946~1950)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국민당]]이 [[대만]]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옮긴 [[국부천대]]가 일어났다(1949).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1950~1953)에 [[유엔군사령부|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중국군]]이 참전하여 국제적 대리전으로 이어졌으며, 휴전 후 현재까지 남북한은 분단되어 있다.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전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가 침략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가 일어났으며 종전 협정 후 프랑스군 철수 및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의 분단(1955)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첩보|첩보전]] 또한 진행되었는데, 미국의 [[CIA]], 소련의 [[KGB]], 영국의 [[MI6]], 동독의 [[슈타지]] 등의 정보기관들은 [[스파이]]를 이용하여 적국의 정보를 수집했다. [[프로파간다]] 또한 경쟁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은 [[영화]], [[방송]], [[연극]], [[포스터]] 등을 통한 선전물로 서로의 체제의 불안정성과 인권 탄압을 비판했다. 이러한 사회상으로 1950년대 미국에서는 광적인 반공주의 운동인 [[매카시즘]]이 일어나기도 했다. || [[파일:89449B89-4C95-41B0-B29F-98137647B65C.png|width=100%]] || |||| 반둥 회의(1955) [br] {{{-2 왼쪽부터 [[자와할랄 네루]], [[콰메 은크루마]], [[가말 압델 나세르]], [[수카르노]], [[요시프 브로즈 티토]]}}} || 한편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탈식민지화가 진행되며 이러한 새로운 독립국들을 중심으로 반둥 회의(1955)가 개최되었고, 이후 냉전에서의 중립을 내새우는 [[제3세계]]가 탄생했다. 이는 기존 서방 식민제국들에 반하는 [[탈식민주의]] 운동과도 밀접하다. 이들은 미국의 [[제1세계]] 진영과 소련의 [[제2세계]] 진영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비동맹운동]]을 주창했다. 비동맹 운동의 주요 인물로는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등이 있으며, 이들은 1961년 베오그라드 회의에서 미국이나 소련이 주관하는 군사 훈련 불참 및 비동맹 국가들 간의 협력을 선언했다. 이러한 제3세계와 식민제국 간 분쟁으로 [[수에즈 위기]](1956~1957)가 발발하기도 했는데, [[가말 압델 나세르]]가 영국이 통제하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였고, 이에 군사적 부담을 느낀 [[미국]]과 [[소련]]의 압박으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하였으며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에게 국유화되었다. 한편 세계 각지의 국가들을 각자의 이념 체제로 편입하려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다툼이 거세졌는데, [[미국]]의 [[CIA]]는 제3세계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다양한 우익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이란]]의 [[팔라비 왕조]] 수립(1952), [[과테말라]] 쿠데타(1953), [[콩고 내전#s-2|콩고 분쟁]](1960~1965), [[피노체트]]가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집권한 [[칠레]] 쿠데타(1973), [[엘살바도르]] 쿠데타(1979), [[이란-콘트라 사건]](1987) 등이 일어나 인권 탄압이 거세졌다. 미국은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1959)으로 이뤄진 [[쿠바]]의 공산 정권 또한 [[피그만 침공]](1961)으로 전복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에 쿠바의 요청으로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며 미국과 소련 간의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쿠바 미사일 위기]](1962)의 아찔한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호르헤 비델라]]가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의 군정들과 연합하여 미국 [[CIA]]의 묵인 하에 좌익 및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콘도르 작전을 벌였고, 이에 [[더러운 전쟁]](1976~1983)을 일으켜 게릴라 단체들을 색출 및 진압하며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성고문을 자행했다. || [youtube(sjzZh6-h9fM,height=150)] || || [[우드스탁 페스티벌]](1969) 중 [[지미 헨드릭스]]의 [[미국 국가]] 연주 [br] {{{-2 굉음을 섞은 해당 연주는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미국과 60년대 반문화 운동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손꼽힌다.}}} || 냉전 중반기부터는 자본·공산 진영 내의 다각화가 이뤄졌다. [[소련]]과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주의]]의 차이로 인한 사상적 갈등, 그리고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인해 [[중소결렬]](1959)이 일어났다. 자본 진영에서는 [[서독]]과 [[일본]]의 경제력이 커지며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이 기존의 식민제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을 압박하는 행보를 보인 [[수에즈 위기]] 이후 [[프랑스]]가 [[북대서양조약기구]] 통합군을 탈퇴하고(1966) 독자적 핵무장을 추진하였다.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해 [[베트남 전쟁]](1955~1975)에 참전해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상대로 싸웠으나 참전의 정당성에 국내외적 비판이 생겼고, [[68운동]]을 위시한 세계적 반체제 운동에 힘입어 반전 여론이 일었다. 미군의 전범 행위에 악화된 여론, 전국적 반체제 운동, 그리고 [[워터게이트 사건]](1972)으로 혼란해진 정세에 미국은 결국 1973년 철군하였고 2년 후 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해 통일되었다. [[캄보디아]]에서는 영토 내의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학살이 일어났고 이에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 정권이 친미 군부를 전복하여 집권하였으며 또한 집권 기간 동안 [[킬링필드]]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권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에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1968)이 일어났는데,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시위를 유혈 진압하였고 이에 같은 공산권 국가들 포함한 세계적 비판을 받았다. ||
[[파일:C9DF4F21-48A6-4572-B2F8-EAAA0B5CD560.jpg|width=100%]] || ||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1969) [br] {{{-2 [[버즈 올드린]]이 [[성조기]]에 경례하고 있다. 깃발 왼쪽으로 보이는 것은 착륙선인 '이글(Eagle)'이다.}}} ||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 경쟁을 시작으로 [[우주]] 진출과 개발을 두고 대결하여 [[우주 경쟁]]이 이뤄졌다.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1957), [[라이카(개)|라이카]] 등 여러 동물들의 우주 진입 성공, 그리고 [[유리 가가린]]의 인류 최초 우주 진출 성공(1961)을 달성했다. 이에 미국은 유인 [[달]] 탐사 계획인 [[아폴로 계획]]을 진행하여 수번의 시행착오 끝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고, [[닐 암스트롱]]이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을 내딛으며 인류는 처음으로 [[달]]에 진출했다(1969). 이후로도 1972년까지 총 12명의 미국인 우주비행사들이 달을 방문했다. 1970년대의 미국과 소련 양측은 국내외 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국제적 다극화로 인한 대립에 부담에 의해 미소간 경쟁이 완화되는 [[데탕트]]가 이뤄졌다. [[미국]]과 [[소련]]은 군비 경쟁의 완화를 목표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체결했다(1차: 1972, 2차: 1979). 데탕트는 1979년부터 시작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으로 인해 난항을 겪었는데, 소련은 아프간의 친소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를 파병했고, 이에 맞서 미국의 [[CIA]]는 쿠데타 세력인 [[무자헤딘]]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이란]]에서 [[이란 혁명]](1979)이 일어나며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서자 [[사담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며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또한 대리전으로 불거졌다. ||[[파일:마오쩌둥.jpg|height=150]]||[[파일:Deng-Xiaoping-1978.jpg|height=150]] || || [[마오쩌둥]] [br] {{{-2 (1893~1976)}}} || [[덩샤오핑]] [br] {{{-2 (1904~1997)}}} ||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로 자리잡은 [[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주석으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농민들을 혁명의 기반으로 파악한 사상인 [[마오주의]] 아래 은행과 대기업의 국유화, 토지 개혁, [[간체자]] 배포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마오쩌둥]]은 농공업 대증산 정책인 [[대약진 운동]](1958~1962)과 구습 타파 운동인 [[문화대혁명]](1966~1976)을 일으켰으나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의 속출과 인권 탄압이 이뤄졌다. [[마오쩌둥]] 사후(1976)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펼쳐 중국에 시장 경제를 적용하며 외국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였다. 데탕트 이후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닉슨-마오쩌둥 회담]](1972) 이후 관계가 완화되었는데, 미중 수교(1977)로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경제적 개혁으로 제1세계와 교류하며 중국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으며 중국인들의 삶의 질 또한 매우 향상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내의 부패와 탄압 및 제한된 [[표현의 자유]]에 반대하며 정치적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으며 이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유혈 진압하여 [[천안문 6.4 항쟁]](1989)이 발생했다. [[베트남]]의 경우 [[캄보디아]]를 두고 [[중국]]과 국경 분쟁이 생겨 [[중국-베트남 전쟁]](1978)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나친 군비 지출로 인해 경제사회적 혼란이 생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 개방 정책인 [[도이머이]]를 추진하였다. || [[파일:attachment/베를린 장벽/join.jpg|width=100%]] || ||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 [br] {{{-2 서독 경찰관이 무너진 [[베를린 장벽]] 너머로 건너오는 동독 군인과 악수를 하고 있다.}}} || 1985년 소련 서기장으로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부정부패, 경제 침체, 국민 분열,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패전과 [[체르노빌 사고]](1986) 등으로 인한 사회 혼란의 해소법을 모색했다. 이에 언론 검열 철폐 등 사회적 개방인 [[글라스노스트]]와 정치·경제적 개혁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시행했다. 이로 인해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정치·경제적 간섭이 줄어들며 사회적 급변과 혼란이 일어나자 동구권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었고,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동유럽 혁명]](1989. 6-12.)이 일어났다. 그중 1961년 [[동독]]의 인력 유출 방지를 위해 세워졌던 [[베를린 장벽]]을 시민들이 무너뜨린 사건(1989. 11.)은 냉전 종료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았으며 1년 후 [[독일 재통일]](1990)이 이뤄졌다. [[루마니아]]의 경우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무력 진압을 시도하며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유혈 사태가 일어났으나 시민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1989. 12.). 고르바초프는 [[몰타 회담]](1989. 12.)에서 미국의 [[조지 H. W. 부시|부시]]와 냉전 종료를 선언했다. 그렇게 [[유럽]]에서는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한 정권들은 몰락하였고, 그 외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도 정치경제적 개방을 시행하거나 독자적 노선을 걸어 [[소련]] 체제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소련 내부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지속되어 소련 내의 각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했고, 이러한 소련의 개방과 약화에 반발하는 공산당 보수파에 의해 [[8월 쿠데타]](1991. 8.)가 일어났으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자 독립파인 [[보리스 옐친]]의 주도로 진압되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사임을 발표하며 소련 구성국의 독립 인정 및 [[독립국가연합]](CIS) 출범을 발표하였고 이에 [[소련 해체|소련은 해체되었다]](1991. 12.). 냉전의 한 축이 사라짐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대립 체제는 막을 내렸으며 이로써 냉전은 완벽하게 종료되었다. |||||| [[파일:usa-cia-brennan.webp|width=100%]] || || [[버락 오바마]] [br] {{{-2 (1961~)}}} || [[블라디미르 푸틴]] [br] {{{-2 (1952~)}}} || [[시진핑]] [br] {{{-2 (1953~)}}} || [[옐친]]의 경제 개혁 실패,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등 민주주의 후퇴, [[체첸 사태#s-3.1|1차 체첸 전쟁]](1994~1996)의 패배 등으로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큰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옐친을 이어 2000년에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여 현재까지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크림 위기]](2014)와 [[돈바스 전쟁]](2014~진행중)으로 친서방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거나 인권 탄압을 행해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으로 인해 폭발하여 군사적 대립으로 다시금 이어졌으며, 미국과 서방 세계는 경제 제제로 보복하고 있다. 탈냉전 시대 미국은 강력한 국력으로 국제 정세와 문화를 재정립했고, 세계질서는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로 개편되었으며 [[걸프 전쟁]](1990~1991)에 참전하여 [[쿠웨이트]]를 침략한 [[이라크]]를 상대로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키며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2001)과 그에 이어 [[이라크]]를 [[이라크 전쟁|침공]](2003)하여 국제적 비판에 직면했고, [[이라크]]에서는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및 미군의 전범 행위가 밝혀지거나 아프간 철군 이후 [[카불]]이 [[탈레반]]에게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순식간에 함락되는]] 등(2021) 위신이 실추되었다. 또한 [[대침체]] 등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위기가 찾아왔고, [[중국]]과의 [[미중 패권 경쟁|패권 경쟁]]으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약화되었다. [[덩샤오핑]]의 개혁 이후 자본주의 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경우 21세기에 들어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의 통치 아래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시진핑]]은 기존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에서 마오쩌둥 시대를 연상시키는 1인 독재 체제로 변혁을 꾀하며 기존 제3세계 국가들에 강력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새로워진 국제 정세에 그 귀추가 주목된다. === 탈식민지화 === [[탈식민지화]]는 말 그대로 식민지배를 받던 국가들이 독립하는 현상으로, 세계사에서는 대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줄지어 독립한 현상을 일컫는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일어났었으나 그러한 흐름이 세계적 인정을 받고 본격적인 탄력을 얻은 것은 2차대전 이후였다. 1960년 [[유엔]]이 유엔 결의 제1514호를 통해 식민지 국가와 인민의 자결권을 인정함에 따라 식민지배는 국제법에 위반되는 것이 되었다. 21세기 현재 식민 착취 형태의 [[식민제국]]은 모두 해체되었으며 일부 [[속령]]이 그 잔재로 남아있다. ||[[파일:모한다스간디.jpg|height=150]]|| || [[마하트마 간디]] [br] {{{-2 (1869~1948)}}} || 1857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에서는 약 90년간 [[독립운동]]이 이루어졌다. 인도 독립운동에서 단연 핵심적인 인물은 [[마하트마 간디]]로,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며 [[비폭력주의]]와 [[시민 불복종 운동]]를 강조하였고, 영국의 소금세 제정에 반대하는 소금 행진(1930) 등을 벌이는 등 다양한 사회 참여 독려로 세계적인 지지와 존경을 얻었다. 또한 [[자와할랄 네루]]와 인도국민회의 계통의 독립운동,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 등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 운동 또한 목소리를 얻었다. 인도의 독립운동이 지속되며 인도인들의 자치권이 확립되어 인도인들에게 [[민주주의]] 의식이 정착되었고, 이에 [[1947년]] [[8월 15일]] 영국은 인도를 [[자치령]]으로 지정해 독립을 승인했다. [[일본 제국]]이 패망하며 일본의 점령 및 지배 하에 있던 식민지들도 독립을 선언했다. [[베트남]]은 [[호찌민]]의 지도 아래 독립을 선언했으나 기존 식민 지배국이었던 [[프랑스]]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침공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5~1954)을 일으켰고, 이 결과로 베트남은 독립하였으나 호찌민의 공산당 지배 하인 [[북베트남]]과 서방 세계의 지지를 받는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인도네시아]] 또한 독립을 선언했으나 역시 이를 인정하지 않은 기존 식민 지배국 [[네덜란드]]에 의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이 발발하였으며 인도네시아는 [[수카르노]]의 지도 하에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거머쥐었다. ||
[[파일:African_nations_order_of_independence_1950-1993.gif|width=100%]] || ||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1950~2011) || 또한 [[아프리카]]에서도 탈식민 운동이 전개되었다. 19세기 이후로 [[에티오피아 제국]]과 [[라이베리아]]를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이 식민지배에 놓여있던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헤레로족]] 봉기 등 반제국주의 운동이 꾸준히 일어났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범아프리카주의와 아프리카 민족주의가 생겨나며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다. 영국령 골드코스트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가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는 학문적 개념으로서의 탈식민주의를 정립한 핵심적인 인물로 손꼽히는데, 그는 [[아프리카]]의 현 문제는 서구가 가져온 자본주의의 악영향 때문이며 해결책은 해결책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범아프리카주의라고 주장했다. 종전 이후 [[알제리]]와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운동에 자극을 받아 아프리카의 독립 운동이 거세졌다. 그중 1960년에는 아프리카 17개국이 한꺼번에 독립하여 [[유엔]]에 가입함에 따라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리기도 했다. 독립으로의 여정 중에는 [[가나]], [[모로코]], [[튀니지]]의 경우와 같이 공식적인 외교적 방법으로 독립한 경우도 있었으나, [[케냐]]나 [[알제리]] 등 유럽 식민제국의 유혈 진압 또한 있었다. [[케냐]]의 경우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항한 마우마우 봉기(1952~1960)가 이뤄졌는데, [[영국]]은 독립 운동 관련자들의 처형은 물론 독립 운동 주축을 이룬 키쿠유족을 대규모로 고문, 학살, 강제이주시켰다. [[알제리]]의 경우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알제리 전쟁]](1954~1962)이 일어났는데, [[프랑스]]는 이를 상대하며 포로과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포르투갈]]의 경우 식민지들의 독립을 거부하여 포르투갈 정부와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의 독립 무장단체들 간에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1961~1974)이 일어났으며 이는 [[카네이션 혁명]](1974)으로 포르투갈이 민주화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파일:Frantz_Fanon.jpg|height=150]]|| || [[프란츠 파농]] [br] {{{-2 (1925~1961)}}} || >[[태평양 전쟁]]에서 부상당한 한 절름발이 고참 병사가 내 동료들에게 이렇게 고한다. "내가 내 의족에 익숙해진 것처럼 그대들도 그대들의 피부색에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익숙해져 보라구. 우린 어차피 모두 피해자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이 절단된 불구성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다. [...] 나는 주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게 절름발이의 겸양을 수용하라고 닥달한다. 어제, 세상의 아침을 향해 깨쳐 일어나면서 나는 하늘이 철저하고 완전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나 역시 똑바로 서고 싶었다. 그러나 내장이 다 드러난 침묵이 내게로 무너져 왔다. 날개가 마비된 채. 책임감도 없이 한 발로는 무(無), 다른 한 발로는 무한을 떡 버티고 선 채, 나는 긴 울음을 울었다. >----- > ''[[프란츠 파농]] - 《검은 피부, 하얀 가면》 中 (1952)'' 식민지의 지식인들은 정치적 독립 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철학적으로도 유럽에서 벗어나는 [[탈식민주의]]를 추구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 출신 정신과 의사이자 정치철학자 [[프란츠 파농]]은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지식인인데, 그는 그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등에서 [[정신분석학]]을 이용해 식민주의가 확립한 인종주의의 구조를 지적하며 진정한 의미로서의 탈식민은 정신적, 문화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철학, 사회학 사조로서의 탈식민주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 뿐 아니라 [[아메리카]]·[[오세아니아]] 원주민·소수민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
[[파일:merlin_161753625_a35b8f9a-0710-430d-8cf7-ee5eb0292038-superJumbo.jpg|width=100%]] || || [[인도]]-[[파키스탄]] 국경의 국기하강식 [br] {{{-2 [[영국]]에서 독립한 후 두 나라 사이에서는 [[카슈미르]] 등을 두고 계속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 오랜 유럽 열강의 식민지배로 인한 인프라의 부족과 [[분할통치]]로 인해 거세진 종교, 민족간 갈등은 매우 극심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우 힌두 민족주의와 이슬람 민족주의 간의 갈등이 식민지배 시대부터 형성되어 독립 이후 종교 [[내전]]이 발발하여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고,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수천만 명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강제이주 이후 무슬림 다수 지역인 인더스강 유역과 동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그 밖의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서로 분리 독립하게 되어 이후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그리고 [[인도 공화국]]이 되었다. 이 국가들은 현재까지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특히나 [[카슈미르]]를 둔 영토분쟁 또한 이러한 갈등에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대립으로 인해 [[뭄바이 연쇄 테러]](2008) 등의 무력 충돌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의 경우 탈식민 이후에도 수많은 갈등이 이어지며 인명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식민 착취로 인해 아프리카 국가들의 인프라는 매우 부족하였고 고등 교육을 받은 식민지인들은 턱없이 적었다. 그렇기에 독립 이후 수많은 독재 정권들이 출현했으며, 이는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 간에 제3세계의 주도권 싸움에 이용되었다. 또한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의 다양한 역사적, 민족적, 언어적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어진 직선 국경선과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분할통치]] 등에서 보이듯 독립된 [[국민국가]]로서 기능하기보다는 식민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상태로 유지되었기에 독립 후 혼란이 가중되었다. ||
[[파일:1920px-DRC_raped_women.jpg|width=100%]] || || [[2차 콩고 전쟁]](1998~2003)의 성폭행 피해 여성들의 권익 단체 모임 [br] {{{-2 [[2차 콩고 전쟁]]은 [[르완다 학살]]이 주된 계기였다. 탈식민 아프리카에서의 군사 갈등은 큰 민간인 피해로 이어졌다.}}} || [[르완다]]의 경우 신분 상의 차이에 가까웠던 투치족과 후투족의 구분을 [[벨기에]]가 식민통치 중 [[분할통치]]로 투치족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형태로 이용하였는데, 이렇게 누적된 민족 갈등이 후투족 [[쥐베날 하뱌리마나]] 대통령의 암살로 폭발하여 후투족 군경과 민병대가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을 대규모 학살한 [[르완다 학살]](1994)이 일어났으며 [[자이르]]로 대규모 난민이 유입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민주콩고 대통령인 [[파트리스 루뭄바]]가 암살되고(1961) 들어선 [[모부투 세세 세코]] 정부가 난민 문제와 경제 악화로 민심을 잃자 [[로랑 데지레 카빌라]]의 쿠데타가 일어나 발발한 내전에 [[르완다]]와 [[우간다]] 등이 참전하여 [[콩고 전쟁#s-2|제1차 콩고 전쟁]](1996~1998)이 발발했고, 휴전 이후 반정부 세력에 의해 [[콩고 전쟁#s-3|제2차 콩고 전쟁]](1998~2003)이 발발해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참전, 이른바 '아프리카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으며 큰 민간인 피해로 이어졌다. 이후 [[르완다 내전]]과 [[콩고 전쟁]]의 군사 작전에 관여한 [[르완다]]의 [[폴 카가메]]는 종전 이후 [[르완다]]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전후 수습, 경제 발전, 안전한 치안 확립 등에 있어서 성과를 이뤘으나 지금까지 이어지는 철권 독재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식민주의와 그로 인해 뒤따른 폐해의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해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은 해결책을 도모했다. 주목할 만한 예시로는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의 자유민주주의 개혁, [[부르키나파소]]의 5대 대통령 [[토마 상카라]]의 사회주의 개혁,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리콴유]]의 권위주의적 경제 발전 등이 있다.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이러한 혼란상과 더불어 해당 국가의 국민들은 [[세계화]] 이후 경제적으로 기존 서방 식민 세력이나 동아시아의 새로운 자본주의 강국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제적 식민지배나 다를 바가 없는 국가적 무기력감을 한탄하기도 하며, 이는 '신식민주의'라고 불린다. [[콰메 은크루마]]는 의해 아프리카에서의 영국과 미국이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비판하며 이러한 신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고 주장했다. === 현대 사회의 형성과 과제 === ||
[[파일:EC-EU-enlargement_animation.gif|width=100%]] || || [[유럽연합]]의 변천사(1957~2020) || || [[파일:세계맥도날드.png|width=100%]] || || 세계 각지의 [[맥도날드]] 매장 [br] {{{-2 [[맥도날드]]는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서방식 정치·경제·사회적 [[세계화]]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미국인 사회학자 조지 리처는 이를 국제 사회의 '맥도날드화'라고 칭했다.}}} || 현대 사회는 교통 및 통신 수단의 급격한 발달, 그리고 통신 기술의 보급으로 인해 혁신적인 변화를 겪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인류의 근본적인 삶의 방식의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는 대중사회의 형성 및 권력과 정보의 [[세계화]], [[민주화]], [[정보 혁명|정보화]] 등으로 이어졌다. 정치·경제적 세계화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는 [[유럽 연합]]의 탄생이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유럽 국가들은 정치·경제적 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해 1957년 창설된 유럽 경제 공동체를 바탕으로 하여 체결된 [[마스트리흐트 조약]](1993)으로 [[유럽연합]]이 탄생했다. 1985년에는 국가간 왕래를 쉽게 하는 [[솅겐 조약]]이 맺어졌으며 1999년부터는 단일 통화 단위인 [[유로화]]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다자화된 외교와 전세계적 정치 협력이 형성되었으며 유럽인들에게 [[교육]], [[취업]], [[소비]], [[여행]] 등에 있어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 1967년에 동남아 국가들간에 설립된 [[ASEAN|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과 2002년에 구성된 [[아프리카 연합]] 등 또한 이러한 초국가적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자유 무역이 활성화되었고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세계무역기구]](WTO)로 대표되는 경제적 세계화로 무역 자유화와 금융 부문에서의 자본 이동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이러한 다자화 및 이민자 유입 등의 이유에 불만을 느낀 유럽 연합 탈퇴파에 의해 [[브렉시트]](2020)가 이뤄지는 등 갈등 또한 이어지고 있다. 한편 1970년대의 [[오일 쇼크|석유 파동]] 이후 1980년대에 들어 서구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비용을 삭감하고 기업 [[민영화]]를 확대하며 시장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인 [[신자유주의]] 체제가 제시되었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이는 [[빈부격차]]를 매우 극심하게 하였으며 세계화를 통해 서구 모델이 [[개발도상국]]들에게도 반강제됨에 따라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의 [[양극화]]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비용 절감과 효율 극대화를 위해 원재료 구입, 제조, 포장, 판매가 세계 각지에서 이뤄지는 [[다국적 기업]]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가간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지역 경제를 침체시키며, 노동자들의 인권 침해가 일어나는 등의 문제점이 생겨났다. 문화적 세계화도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세계 각지가 연결되고 [[이민|이민자]]들의 이동으로 각지의 문화가 공유, 융합, 발전되어 [[다문화주의]]가 출현했다. 특히나 [[대중문화]]의 출현과 [[인터넷]]의 발달은 세계적인 문화매체의 확산과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파일:the-beatles-are-coming-michael-ochs-archives.jpg|width=100%]] || ||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미국 상륙]](1964) || || [youtube(qwtGIBS7m6c, width=300, height=150)] || || [[스티브 라이히]]의 네 작품을 위한 [[발레]] 중 일부 [br] {{{-3 〈피아노 위상〉, 〈Come Out〉, 〈바이올린 위상〉, 〈박수 음악〉}}} || 20세기 이후 국제사회 문화에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로는 [[대중문화]]의 발달이 있다. 세계적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고 [[중산층]]이 부상하며 저렴하고 실용적인 대중문화가 확산되었고, [[라디오]], [[텔레비전]], [[스마트폰]]의 보급 및 [[세계화]]로 인해 고급 문화와 민속 문화의 이분법적 분리가 사라졌으며, 시장경제의 확산과 소비주의의 등장으로 대중 사회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한편 이러한 대중문화와 소비주의는 인간의 동질화와 획일화라는 문제점이 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실을 모방하고 왜곡하는 대중매체를 '시뮐라크르'이라 부르며 비판했다. 현대의 [[대중음악]]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이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래그타임]]과 [[블루스]] 등의 미국 흑인 음악을 바탕으로 [[재즈]]가 탄생하여 [[루이 암스트롱]],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등이 출현했다. 또한 [[록 음악]]이 탄생해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 [[데이비드 보위]], [[너바나]] 등이 활약했다. 미국 흑인 음악의 계보는 [[소울]], [[펑크|펑크(Funk)]], [[디스코]] 등을 바탕으로 한 [[R&B]], 그리고 이후 [[힙합]]으로 이어진다. [[밥 딜런]]과 [[투팍 샤커]] 등은 문학적인 가사로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장르들을 혼합하여 [[마이클 잭슨]], [[마돈나]], [[방탄소년단]] 등의 팝스타들도 출현했다. 주로 [[영미권]]의 인물들이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21세기 이후 [[케이팝]]이나 [[라틴 팝]]이 세계적 인기를 끄는 등 그 국경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다. [[영화]], [[텔레비전]] 쇼, [[연극]] 또한 발달했고, 그중 [[영화]]는 [[헐리우드]]를 위시한 영화 산업이 급격한 발달을 겪어 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예술로 자리잡았다. 또한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애니메이션]]을 넘어 예능 산업 최대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스포츠]]도 핵심 방송 문화 중 하나로, [[올림픽]]과 [[월드컵]] 등은 세계인이 열광하는 행사로 자리잡았으며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부상했다. 또한 20세기 후반에 들어 [[비디오 게임]]이 탄생하여 다양한 프랜차이즈들이 탄생했다. [[현대미술]]의 경우 [[입체파]],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개념미술]] 등 다양한 미술사조가 등장했으며, [[만화]], [[팝아트]], [[그래피티]] 등의 대중미술 또한 발달했다. [[클래식 음악]]의 경우 [[아르놀트 쇤베르크]]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으로 인해 [[현대음악]]이 출현하며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고, [[전자음악]], [[총렬주의]], 우연성 음악, [[미니멀리즘]] 등의 음악 사조가 발달했으며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같이 음악의 본질 자체를 묻는 시도까지도 생겨났다. 문학의 경우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존 스타인벡]] 등이 현대 사회의 인간 군상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묘사하였으며 [[알베르 카뮈]]나 [[사무엘 베케트]] 등은 실존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부조리]]를 주 테마로 사용했다. 또한 일반 대중들에게 즐겨 읽히는 대중문학이 발달해 [[J. R. R. 톨킨]] 등의 작가 또한 출현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미국 독립선언서|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 주|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 > ''[[마틴 루터 킹]] 목사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 中 (1963)'' [[제국주의]]와 두번의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현대 시대에는 [[인권]]과 [[민주화]] 의식이 정립되었으며, 그 어떤 천부적·사회적 요건에 제약받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 마땅하다는 개념 또한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현대적 인권 의식의 탄생은 20세기 시민 운동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인간의 천부적·사회적 특성을 바라보는 인류의 의식이 크게 바뀌게 된다. ||||[[파일:71OGcfvhZVL._AC_SL1000_.jpg|height=150]] || || [[마틴 루터 킹]] [br] {{{-2 (1929~1968)}}} || [[말콤 X]] [br] {{{-2 (1925~1965)}}} || [[미국]]은 1865년의 흑인 노예 해방 후에도 19~20세기 동안 다수 주에서 [[백인]]과 [[유색인종]] 간의 이용 시설이 분리되었고 흑인의 투표권이 거부되었으며 [[쿠 클럭스 클랜|KKK단]]을 위시한 백인의 [[린치]]와 [[테러]]가 잦았다. 이러한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공민권 평등을 요구하는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이 [[로자 파크스]], [[마틴 루터 킹]], [[말콤 X]] 등의 인몰들에 의해 1950~60년대에 활발히 이뤄져 짐 크로 법 폐지(1965), 민권법 개정안의 통과(1968) 등의 성과를 이루었다.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1948년부터 전국적으로 흑백간 거주지·시설 분리, 흑인의 정치 활동 금지, 토착 문화 탄압 등 철저한 [[백인우월주의]]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자행되어 이에 맞선 [[넬슨 만델라]], [[데즈먼드 투투]] 등의 반인종차별 및 민주화 운동이 이루어졌다. 지속된 저항 끝에 [[넬슨 만델라]]는 석방되어(1992) 남아공 헌정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1994), 남아공은 이후 [[아파르트헤이트]] 완전 폐기를 선언해(1994) 법적 평등이 보장되었다. 만델라는 '무지개 나라'를 표방하며 다양성과 관용 정책을 강조하였다. 서양의 [[서프러제트]] 운동 이후 대다수 국가에서 [[여성]]이 [[남성]]에 준하는 법적 권리를 갖게 되었으나 여전히 [[여성]]은 [[남성]]에 비해 [[성차별|사회적 소외와 폭력에 노출되어 왔다]]. 이에 1950~60년대에는 근본적 [[성평등]]의 개념이 대두되며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났다. [[시몬 드 보부아르]]이나 케이트 밀렛 등의 지식인들은 [[가부장제]] 비판, 여성의 실질적 해방과 성적 자기결정권 요구, [[성폭력]]·[[가정폭력]] 반대 등을 제시하였다. 이로 인해 세계적으로 여성 교육권의 확대 및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일어났다. 현재도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 착취, 높은 여성 [[문맹]]률, [[성범죄]], [[유리천장]] 등에 저항하는 [[여성]] 인권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사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이 있다. 성 혁명 물결은 여성 뿐 아니라 [[성소수자]] 인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공권력의 성소수자 억압에 반발하여 일어난 [[스톤월 항쟁]](1969)을 계기로 20세기 후반부터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LGBT]])로 대표되는 [[성소수자]]의 인권 운동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이에 21세기에 들어 다양한 국가들이 [[동성결혼]]과 [[성별 정정]]을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그러나 아직 법적·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며 성소수자들을 기소 및 처벌하는 국가도 있어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사회 변화 뒤에는 [[학생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서구권의 대학생 운동권을 중심으로 [[베이비붐]] 세대의 젊은 시위대들은 탈권위주의 운동을 벌여 기성세대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 질서와 체제를 비판하였다. 그러한 반체제운동은 1968년 [[미국]], [[프랑스]], [[동독]]과 [[서독]], [[체코슬로바키아]], [[일본]], [[파키스탄]], [[멕시코]] 등에서 전세계적으로 일었는데, 특히 프랑스에서의 [[68운동]](1968)은 [[프랑스 파리|파리]]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노동자 파업으로 확산되어 전례없는 규모로 불어났고 이후 전세계 학생 운동, 그리고 학계와 문화계에 영향을 끼쳤다. ||
[[파일:612.jpg|width=100%]] || || [[스레브레니차 학살]](1995)로부터 피난하는 [[보스니아]]인 난민들 || 격동의 근현대를 거치며 많은 지역에서 역사·민족·종교·인종·언어적 갈등이 생겼고, 때문에 [[분리주의]] 운동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아일랜드]]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무장 단체인 [[IRA]]가 격렬히 저항하여 [[북아일랜드 분쟁]](1960년대~1998)이 일어났고, 무력 갈등은 [[성금요일 협정]](1998)을 통해 중재되었다.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퀘벡 독립운동]], [[티베트 독립 운동]] 등 또한 일어나고 있다. [[남수단]]은 민족적인 이유로 긴 내전을 거친 후 국민투표를 통해 [[수단 공화국]]에서 독립하였다(2011). 이러한 갈등이 극대화된 경우로는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유고슬라비아 전쟁]](1991~1999), 특히 그중 [[보스니아 전쟁]](1992~1995)이 있으며, [[냉전]] 종료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과정 중 극단적 민족주의와 분리주의로 인하여 민간인을 향한 [[학살]]과 [[성폭행]] 등의 극심한 피해가 일어났다.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도 계속 지속되고 있는데, 2차대전 종전 이후 [[유대인]]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에 의해 서구의 후원을 받아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1946), 이후 [[식민주의]]와 [[냉전]]으로 인한 4차례의 [[중동전쟁]] 등을 거치며 복잡한 대립 관계가 21세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미국]] 등 서방 세계가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팽창과 이에 대항해 아랍권의 지지를 받는 [[팔레스타인]]의 독립 운동(인티파다)이 계속되고 있으며, 여기엔 중동의 외교적, 종교적 분쟁 또한 맞물려 있다. ||
[[파일:3ece00580a8dfe627299076528da593c.jpg|width=100%]] || || [[9.11 테러]](2001) || [[중동]]에서는 [[빈부 격차]], [[냉전]]으로 인한 외세의 개입, 지역·민족·종교 간의 대립 등 각종 문제가 빈발하여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부상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에게 군사적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의 분파였던 테러 단체 [[알 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은 항공기 납치 자살 테러로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붕괴 이전|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 건물을 공격하는 [[9.11 테러]](2001)를 일으켰다. [[조지 W. 부시|부시]] 행정부는 이에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2001~2021), [[이라크 전쟁]](2003~2017)을 일으켜 [[알 카에다]]와 연루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의 추출(2001)과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했다고 짐작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의 추출(2003)을 벌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후 [[미국]]의 [[버락 오바마|오바마]] 행정부에 의해 사살되었다(2011). 그러나 이로 인한 중동의 큰 사회 혼란과 민간인 피해, 인권 탄압, 그리고 미국의 독주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발로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미국의 영향력 축소는 [[대공황]] 이후 다시 [[미국]] 근원의 세계 경제 위기인 [[대침체]](2008~2010년대 초반?)가 발생하며 더욱 커졌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2007)로 인한 미국 부동산 버블 붕괴를 시작으로 [[리만 브라더스]] 등의 대규모 은행사들이 파산하여 심각한 불황이 이어졌으며 전세계적인 침체가 발생해 금융 거래에 의존하는 [[북미]], [[남미]], [[유럽]] 국가들에게 큰 피해가 발생했다. ||
[[파일:tunisiaRally.jpg|width=100%]] || || [[튀니지 혁명]](2011),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 || 2010~2011년에는 독재 정권에 분노한 아랍권 시민들의 연속적인 시위인 [[아랍의 봄]]이 발생했다. [[벤 알리]] 대통령의 독재와 [[대침체]]로 인한 경기 불황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튀니지 혁명]](2011)이 그 방아쇠를 당겼는데, 혁명의 정보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유되며 [[아랍]] 문화권 전반에서 인권 향상을 요구하는 다발적인 시민 혁명이 일어났다. 발원지인 [[튀니지]]의 경우는 혁명에 성공해 [[민주화]]를 이뤄냈으나 타 아랍 국가들의 경우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맞물리며 큰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다. 특히나 [[시리아 민주화 운동]]은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 시민군의 [[저항권]] 발동, 외세의 개입, 그리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발흥 등으로 [[시리아 내전]](2011~진행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 [[중국]]이나 [[러시아]] 등의 경제 발전으로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조금씩 줄어들게 된다. 흔히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로 위시되는 [[신흥공업국]]들과 [[이머징 마켓]] 국가들의 부상으로 [[미국]]을 포함한 서방 세계의 경제적 입지가 줄어들고 있고, 특히 [[중국]]은 21세기부터 엄청난 속도의 경제 성장을 누렸으며 [[상하이]] 등의 도시가 급격하게 [[도시화]]되었다. 21세기 국제 세계에서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은 크게 증가했으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기존 [[제3세계]] 국가들에 강력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
[[파일:Robot Urumuri to support screening of temperature at Airport.jpg|width=100%]] || || [[키갈리 국제공항]]에 [[코로나19]]로 인한 무인 안내와 체온 측정을 위해 투입된 [[로봇]] '우루무리'(2020) || 현대 인류는 과학의 발달과 기술력의 격변을 목도했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으로 인하여 [[현대 물리학]]이 정립되었으며 [[스티븐 호킹]] 등의 과학자가 출현했다. 또한 [[핵무기]]의 개발 중 [[핵물리학]]이 발달하여 [[원자력]]이 개발되었다. [[원자력 발전]]은 그 효율성이 아주 높다는 장점이 있으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1986)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2011) 등 치명적인 [[원자력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에 대한 우려도 크다. [[냉전]] 기간에 이루어진 [[우주 경쟁]]은 우주항공기술의 발달로 이어졌고, [[인공위성]], [[GPS]], [[우주 정거장]], 달 탐사선과 화성 탐사선 등이 군사·방송·통신·기상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중력파]] 검출 성공(2016) 등의 성과가 있었으며 [[우주]]의 근본적 원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지질학]]에선 [[판 구조론]]이 정립되어 [[지진]], [[해일]], [[화산]] 활동 등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생물학]]에서는 [[DNA]]의 구조 발견 이후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이 시작되었으며, [[장기이식]], [[시험관 아기]], 그리고 [[GMO]]로 인한 식량 증산 등으로 이어졌으나 한편으로는 [[생명윤리]]에 대한 논쟁 또한 존재한다. [[앨런 튜링]]과 같은 선구자들로 인하여 [[컴퓨터과학]]도 시작되어 [[컴퓨터]]가 크게 발달하였고 [[인공지능]]이 탄생했다. [[로봇]] 공학 또한 발달하여 많은 노동력을 대체하였고,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이 결합하며 많은 곳에서 응용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수준이 그 임계점을 넘어서는 [[기술적 특이점]]에 대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의학]] 기술 또한 크게 발달하였다. [[백신]]이 보편화되며 [[천연두]]가 완전 박멸되었고(1980), [[홍역]], [[소아마비]] 등의 질병이 크게 자취를 감췄다. [[배란조절형 피임약|경구피임약]] 또한 1960년대에 보편화되어 가족계획과 여성의 삶의 질 향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안전한 [[낙태]]와 [[제왕절개]] 기술이 정착되었다. 또한 신생아의 사망률이 크게 줄어 인류의 [[기대 수명]]이 올랐으며 세계 인구는 지난 1세기간 20억여명에서 80억여명에 가깝게 4배 증가했다. 한편 극도로 체계화된 세계화로 인한 전염병의 빠른 확산은 현대 의학의 숙제로 남았는데, 그중 1980년대에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로 인한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AIDS)이 발생하여 의료 시설이 열악한 지역을 중심으로 큰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또한 21세기에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등의 질병이 유행하였고, 그중 2019년에 발생해 2020년 [[범유행전염병]]이 된 [[코로나19]]의 경우 막강한 전염성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으며 세계적 방역이 이뤄지며 국제 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
[[파일:544bab04ecad04a6486a0940.jpg|width=100%]] || || [[https://internet-map.net/|인터넷의 지도]] || [[인터넷]]의 발명과 확산은 21세기에 들어 인류의 정보 공유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69년 [[아파넷]]이 발명되어 주로 군사적, 학술적 용도로 사용되었고 1989년 [[팀 버너스리]]가 [[월드 와이드 웹]]을 발명해 1990년대를 기하여 [[정보 혁명]]이 일어났다. 21세기에 들어 [[구글]], [[유튜브]], [[위키백과]],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온라인 플랫폼들이 생성되었고 [[개인용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어 다양한 사람들이 쉽게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사회의 격변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등으로 인해 세계를 언어학적, 수학적, 논리학적으로 분석하는 [[분석철학]]이 등장하였다. 또한 두번의 세계대전과 [[냉전]]은 20세기 [[지식인]]들 사이서 이성, 근대성(近代性), 객관적 진리 등에 대한 회의감을 주었고, 이에 [[마르틴 하이데거]],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등에 의해 [[실존주의]], [[테오도어 아도르노]]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에 의해 [[비판 이론]], 그리고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에 의해 [[포스트모더니즘]]이 출현했다. [[심리학]]의 경우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제시하며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한 이후 [[카를 융]] 등의 인물이 출현하였으며, [[벌허스 프레더릭 스키너]], [[앨버트 반두라]] 등에 의해 실증적 연구가 중요시되었다. [[사회학]]의 경우 [[피에르 부르디외]] 등의 인물이 [[에밀 뒤르켐]],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가 성립한 토대를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새로운 요소들을 분석하였다. [[언어학]]에서는 [[놈 촘스키]]가 등장하여 보편 문법이론을 개창하였다. ||
[[파일:Common Era Temperature.svg|width=100%]] || || 지난 2천여 년 간의 지구 표면 온도 변화 [br] {{{-2 파란 선: 빙하 코어 측정치, 빨간 선: 직접 측정치}}} || || [[파일:호주 산불 우주.jpg|width=100%]] || || 우주에서 관측한 [[2019-2020년 호주 산불|호주의 대규모 산불]](2020) [br] {{{-2 [[2019-2020년 호주 산불]]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인도양 쌍극이 주된 원인이었다. 기후 변화는 현재의 인류에게 가장 시급한 위기 중 하나이다.}}} || 한편 전세계적인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와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나날이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해 [[지구 온난화]] 문제가 심각해졌고, 이로 인해 [[해수면 상승]] 및 [[강수량]]의 변화, 아열대 사막 지방의 확장, 지속적인 [[빙하]]와 [[해빙]]의 감소, 해양 산성화, 다양한 생물의 멸종 및 [[생태계]]의 극심한 파괴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한 [[자연재해]]가 폭중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근미래에는 [[사막화]]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기후 난민들의 속출, 더욱 잦은 [[폭염]]·[[홍수]]·[[가뭄]]·[[한파]], 그리고 세계적 농산물 수확량 감소 등의 재앙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어 전세계적인 우려가 생겨나고 있다. 또한 지하자원 남용, 오염 물질 범람, 대규모 쓰레기 방출 등으로 인한 [[대기 오염]], [[수질 오염]], [[토양오염|토양 오염]], [[방사성 폐기물|방사능 오염]], [[플라스틱#s-5|플라스틱 오염]] 등의 [[환경 문제]] 또한 극심해졌다. 이러한 환경오염은 미래 세대에게 큰 피해로 돌아올 수 있으며, 수많은 동물들이 플라스틱으로 인해 떼죽음을 당해 생태계가 크게 훼손되는 등 인류로 인한 지구 공동체의 피해가 크다. 이러한 기후 위기와 환경 위기로 인하여 인류는 [[핵전쟁]]의 위협 이후로 또 다른 존속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국제사회는 탄소 배출에 대한 협약인 [[교토 의정서]](1997)를 맺고, 이후 교토 의정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각 국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나눠 책임지는 [[파리협정]](2015)을 타결시킨다. [[왕가리 마타이]]나 [[그레타 툰베리]] 등의 인물 및 [[그린피스]]나 [[세계자연기금]] 등의 단체들 또한 기후·환경 위기의 경각심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파리협정을 탈퇴하였다가(2017) 다시 복귀하거나, COP26(2021) 회담에 [[중국]], [[러시아]], [[인도]]가 불참하는 등 탄소 배출에 대해 적극적인 국제적 동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기후·환경 위기라는 직접적인 존속 위기서부터, [[양극화]] 등의 사회 문제와 영토, 종교, 민족 등을 놓고 벌어지는 갖가지 분쟁, 그리고 도시화와 더불어 급증하는 현대인들의 [[정신질환]] 등 21세기 우리에게는 많은 숙제가 주어졌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인류 최대이자 최악의 전쟁]]이 끝난지 백 년도 지나지 않았으며 핵전쟁의 위협이 아직 도사리고 있는 지금의 세대는 더더욱 이러한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성숙한 세계 시민들의 연대와 노력이 필요하며, 그렇기에 세계사를 배우는 의의는 인류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분석, 연구, 반성하여 현재 세대의 존재에 의의를 부여하고 미래 세대에 희망을 물려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관련 문서 == * [[세계사/분류]] * 특정 [[연도]]를 입력하면, 당시 [[세계지도]]를 보여주는 [[웹사이트]] - [[http://geacron.com/home-en/]][* 다만, 고대 동양사는 별로 정확하지않다.] * [[세계사(고등학교 과목)]] * [[AP 세계사]] * [[역사]] * [[역사 관련 정보]] * [[세계사능력검정시험]] * [[세계사 마이너 갤러리]] * [[개론서/역사학]] [[분류: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