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居怡 [[1545년]]([[명종(조선)|명종]] 1) ~ [[1598년]]([[선조(조선)|선조]] 31) [목차] == 개요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보성 선씨|보성]](寶城)이며, 자는 사신(思愼), 이중(怡仲), 호는 친친재(親親齋)이다. 임진왜란 당시 무관으로는 최고위직(부원수 겸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있으면서 한산도대첩과 행주대첩에서 대공을 세운 유일한 장수이다. == 생애 == 1545년 [[전라도]] [[보성군]](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도사(都事:종5품) 선상(宣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선씨의 시조 '선윤지'의 8세손이며 우의정(정1품) '유성군 선 형'의 증손이다. 위로 형 선거정(宣居正)이 있었다. [[1569년]]에 선전관으로 등용되어 겸사복(兼司僕)으로 근무한 후 35세 되던 [[1579년]](선조 12) 식년시 무과에 병과 18위로 급제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79_150028|#]] [[1586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일]]의 계청군관(정3품)으로 근무하면서 조산만호(종4품)[[이순신]]과 함께 [[녹둔도]]를 침범했던 여진족을 막는 공을 세운다. 류성룡은 선거이를 '범장(호랑이 장수)이 조선 땅에 나타난 것과 같아 든든하다'고 하였다. [[1588년]]에는 거제현령,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591년]]에는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한산도대첩]]에 참전하였고, 동년 12월 [[독성산성 전투]]에서는 전투 중 크게 부상을 당했다. 다음 해에는 부원수 겸 전라병사로서 도원수 권율과 함께 [[행주대첩]]에서 공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거이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행주대첩이 가능했다'고 하였다. 동년 9월에 함안에서 왜군을 상대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이후 충청 병사(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전쟁이 한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을 때에는 [[한산도]]에 내려와 [[이순신]]을 도왔고 [[장문포 해전]]에도 참전하였다. 황해 병사로 보직이 바뀔때 이순신이 매우 아쉬워하며 이별주를 함께 나눴고, 직접 지어준 이별시가 [[난중일기]]에 남아있다. > 북쪽에서도 갔을 때에 어려움을 같이 겪고 >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했지 > 오늘밤 달빛 아래 술 한잔을 나누고 나면 > 내일은 이별의 정을 나누겠구나 > - 이순신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남해, 상주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598년]] 2월에 7도 병마절도사(명예직)로서 참전한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예조에서 내린 금석문에는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선거이'라고 기록하였다. 사후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굵직굵직한 큰 싸움들에 참전했고[* 3대 대첩 중 2개인 [[한산도 대첩]]과 [[행주대첩]]에 참전한 유일한 장군이다.] 부상을 입은 후에도 계속 공을 세우다 장렬히 전사했으므로, 최소한 원균(선무공신일등 이순신, 권율, 원균)의 앞자리 대우는 받아야 마땅했으나, 당시 영의정 권철의 아들이며 병조판서 이항복의 장인이기도 한 권율 장군에게 모든 공적이 돌아가는 바람에, 당파에 속해있던 문신들의 공적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선무공신 2등(5명), 3등(10명) 마져도 되지 못했다. == 여담 == 이러한 업적을 기리고자 60사단 162보병여단을 선거이연대라는 별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분류:조선의 무관]][[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보성군 출신 인물]][[분류:보성 선씨]][[분류:1550년 출생]][[분류:1598년 사망]] [각주][include(틀:표절, version=1, source=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