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십육국춘추)] [목차] == 개요 == 石聰 (? ~ 333) [[후조]]의 인물. 자는 불명. 본래 [[서진]] 사람으로, [[석감(팽성왕)|석감]]처럼 석륵을 따르면서 석(石)씨 성을 하사받았으나 양자는 아니다. == 생애 == 광초 7년(324년) 정월, 사주(司州)자사 [[석생]]이 [[이구(서진)|이구]]의 장수 곽송(郭誦)에게 대패하여 강성(康城)으로 도망쳐 농성하였다. 당시 급군(汲郡)내사를 지내고 있던 석총은 이 소식을 듣고 출병하여 이구와 [[곽묵]]을 격파하고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아 석생을 구원하였다. 광초 8년(325년) 6월, 중산공 [[석호(후조)|석호]]가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낙양으로 쳐들어온 전조군을 요격하러 갈 때 함께 종군하였다. 석호가 전조의 중산왕 유악(劉岳)과 진동장군 호연모(呼延謨)를 격파하자, 전조의 황제 [[유요(전조)|유요]]는 유악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발동해 망산(邙山) 금곡(金谷)에 주둔하였다. 이때 석총은 팔특판(八特阪)에서 전조의 전군장군 유흑(劉黒)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후 전조에 투항한 이구의 장수 곽묵을 격파했고, 곽묵은 처자식을 버린 채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으로 도망쳤다. 광초 9년(326년) 11월, 석총이 수춘(壽春)을 공격하니, 동진의 예주(豫州)자사 [[조약(동진)|조약]]은 조정에 여러 차례 구원을 요청했으나 동진의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석총은 수춘 남쪽으로 나아가 준주(逡遒)와 부릉(阜陵)을 경략하고 5,000여 명을 죽였다. 그러자 건강이 크게 진동하여 사도 [[왕도(동진)|왕도]]가 강녕(江寧)에 주둔하고 변고에 대비하였다. 그때 동진의 역양(歷陽)내사 [[소준(동진)|소준]]이 장수 한황(韓晃)을 보내 구원하자 석총은 수춘에서 물러나 퇴각하였다. 석륵은 석총의 공을 인정하여 봉거도위(奉車都尉)에 임명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6월, 조약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후조와 몰래 통하여 내응을 약속하였다. 이에 석륵이 석총과 [[석감(팽성왕)|석감]]을 파견해 회수를 건너서 수춘을 치게 하니, 조약의 무리들은 붕괴되어 역양(歷陽)으로 패주하였다. 석총과 석감은 수춘의 백성 20,000여 호를 이끌고 귀환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11월, 전조의 황제 [[유요(전조)|유요]]가 친히 갑병 100,000명으로 낙양의 금용성을 100여 일 동안 포위공격하여 형세가 위태로웠다. 석륵은 안팎으로 계엄령을 내린 후, 외지에서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석감, 석총, 도표(桃豹)에게 모두 군대를 인솔해 형양(滎陽)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12월, 석륵이 직접 40,000 대군을 거느리고 대알(大堨)에서 황하를 건너 성고(成皋)에 도착하였다. 석감 등도 성고로 나아가 석륵과 합류하니, 보병은 60,000명이었고 기병은 27,000명에 달했다. 이후 석륵은 낙양을 구원하기 위해 험로로 쉬지 않고 진군하여 공현(鞏縣)과 자현(訾縣) 사이에 이르자, 금용성을 포위한 채 술판을 벌이던 유요는 석륵이 이미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 듣고 놀라 금용성을 포위하던 100,000 병력을 거두어 낙수(洛水) 서쪽에 배치해 후조군을 대비하였다. 낙양성에 이른 석륵은 전조군의 진영을 보고 기뻐하며, 진로를 북쪽으로 우회하여 전조군을 피해서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먼저 낙양성에 들어갔다. 이후 중산공 석호로 하여금 보병 30,000명으로 낙양성 서쪽에서 전조군의 중군을 치게 하고, 석감과 석총은 각기 정예 기병 8,000명으로 낙양성 북쪽에서 전조군의 선봉군을 치게 하였다. 두 군세는 낙양성 서양문(西陽門)에서 크게 싸웠고, 석륵도 친히 갑주를 두르고 창합문(閶闔門)으로 나가 서양문에서 전조군을 공격했다. 유요도 서양문에서 친히 군사를 지휘했으나, 전투 전에 술을 한 말 넘게 마시는 바람에 너무 취하여 중간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유요가 도중에 퇴각하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전조군은 결국 붕괴되어 대패하였고, 황제 유요는 석감에게 사로잡혔다. 전조군을 대파한 석륵은 적군 50,000명을 참수하여 낙양을 구원하였다. 건평 4년(333년) 7월,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태자 [[석홍]]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중산왕 석호는 양위하겠다는 석홍의 제안도 마다하고 섭정하면서 석륵의 신임을 받았던 대신들인 우광록대부 정하(程遐)와 중서령 서광(徐光)을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석총과 초군(譙郡)태수 팽표(彭彪) 등은 불안감을 느껴 제각기 동진에 사자를 보내 투항 의사를 전달하니, 동진의 영군사마 공탄(孔坦)은 조정에 상소하면서 이들의 서신을 첨부하여 후조 정벌을 주청하였다. 이에 동진 조정에서는 독호 교구(喬球)를 보내 그들을 구원케 하였지만, 동진군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석호가 먼저 석총 등을 공격해 모두 주살하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33년 사망]][[분류:중국의 살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