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서창석}}}'''[br]'''徐倉錫[*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1697|독립유공자 공적정보]]와 [[http://db.history.go.kr/id/npsd_1925_01_10_v0002_0500|1925년 1월 10일 시대일보 기사]]에는 徐'''{{{+1 昌}}}'''錫으로 기재하고 있으나,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01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0109&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1925년 3월 13일 수형인명부]] 등 독립운동 관련 행형기록물과 [[http://db.history.go.kr/id/npsd_1924_12_07_v0002_0350|1924년 12월 7일 시대일보 기사]], 이천서씨병부상서공파보 권4 295쪽 등 여러 자료에서 모두 徐倉錫으로 기재하고 있다.]'''}}}}}} || || '''호''' ||추강(秋崗) || || '''본관''' ||[[이천 서씨]][*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익롱공파(益聾公派)-난정공계(懶亭公系) 31세 수(洙) 항렬. 족보명은 서택수(徐宅洙).] || ||<|2> '''출생''' ||[[1892년]] [[10월 25일]] || ||[[전라도]] [[나주시|나주목]] [[암태도]] 오산리[br](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 993번지) || || '''사망''' ||[[1953년]] [[3월 10일]] (향년 60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서상렬(1920)|서상렬]]은 조카이고[* 서상렬은 서창석의 첫째 남동생 서광수(徐光洙, 1902. 8. 26 ~ 1961. 5. 28)의 장남이다.], [[서태석]]은 7촌 재종질(再從姪)이다. == 생애 == 1892년 10월 25일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오산리(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 993번지)에서 아버지 우정(又亭) 서진현(徐珍鉉, 1860. 6. 26 ~ ?)[* 초명 서진기(徐珍奇), 자는 문보(文甫).]과 어머니 [[밀양 박씨]](1855. 2. 6 ~ 1895. 6. 21)[* 박학언(朴學彦)의 딸이다.] 사이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밀양 박씨는 아버지 서진현의 첫째 부인이고, 둘째 부인 [[김해 김씨]](1868. 5. 10 ~ ?) 김라율(金羅律)의 딸은 슬하에 서광수 등 2남 3녀를 두었다.] 이후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 989번지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01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0109&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이주해 본적을 옮겼고]], 암태면 도창리에 거주하기도 했다. 1923년 12월 고향 [[무안군]] 암태면에서 암태도소작인회 위원장에 취임했고, [[서태석]]과 함께 지주들의 부당한 소작료 징수에 저항하여 소작료 저감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4년 7월 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소요죄|소요]] 및 [[상해죄|상해]]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14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5934&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구류갱신 처분을 받았고]], 1924년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소요 및 상해 혐의로 징역 1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99&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2852&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아]] 목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에 공소하여 서태석·손학진(孫學振)·김연태(金淵泰)와 함께 대구복심법원에 송치돼 있던 중, 11월 11일 [[보석(법)|보석]]으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52&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9916&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출옥했다]]. 1924년 12월 22일 암태공립보통학교에서 개최된 암태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암태청년회가 기존의 회장제를 위원제로 개혁하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20|박복영]](朴福永)은 위원에, 서창석은 서태석·손학진·김연태·박응언(朴應彦)·[[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8123|박용규]](朴用産)·서동오(徐東五, 1896. 5. 14 ~ 1980. 3. 22)[* 호는 소성(小聲), 족보명은 서기수(徐奇洙), 초명은 서기열(徐奇烈). 서창석과는 30촌 지간이다.]·손길언(孫吉彦)·박종식(朴鍾植)·김상규(金相奎)·강봉춘(姜奉春)·김정순(金正順)·조군명(曺君明)·서병석(徐邴晳, 1902 ~ 1931. 11. 7)[* [[독립유공자]] [[서태석]]의 동생이다. 이명 서병석(徐丙晳), 서민석(徐岷晳), 족보명은 서상택(徐相澤), 이천서씨병부상서공파보 권4 283쪽에는 1897년 5월 20일생으로 등재돼 있다.]·서동수(徐東洙)·박재일(朴在一)·손채옥(孫采鈺)·김문일(金文一)·김문철(金文喆)과 함께 집행위원에 [[http://db.history.go.kr/id/npsd_1924_12_26_v0002_0290|선임되었다]]. 1925년 1월 17일에는 김문일과 함께 암태도 동부에 거주하는 천병래(千炳來) 등 10여 명의 청년들을 독려해 암태도에 사립학교를 세울 교육비를 징수해 중앙교육기관에 [[http://db.history.go.kr/id/npsd_1925_01_25_v0002_0290|납부하도록 했다]]. 이후 지난 [[암태도 소작쟁의]]에 대해 검사 측에서 공소했으나 1925년 3월 13일 대구복심법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144&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5955&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1925년 3월 13일 집행원부]]에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기재돼 있다.]에서 이른 바 소요 및 상해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5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9937&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공소 이유 없음]]으로 기각되었고,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까지 했으나 1925년 5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 및 상해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6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3696&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어]] 불구속처분을 받고 다시 풀려났다. 1926년 7월 23일 개최된 제18회 암태농민조합 집행위원회에서 김상규·박덕용(朴德用)과 함께 [[모내기]] 기간에 무리하게 소작료를 질수하려던 지주 천후빈(千后彬)과 소작인을 무리하게 감금한 경관에게 파견할 질문위원에 [[http://db.history.go.kr/id/npsd_1926_07_28_v0003_0590|선임되기도 했다]]. 1926년 9월 무안군 자은면에서 자은도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당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된 소작인들의 석방을 주선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구류 25일을 받기도 했다. 출옥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포목상을 경영했으며, [[8.15 광복]] 이전까지도 일본 제국 경찰의 시찰 대상에 포함되어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1945년 3월 생산된 《[[https://historybank.kr/product/detail.html?product_no=81&cate_no=1&display_group=4|昭和二十年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쇼와 20년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에 등재돼 있었다.] 이후 1953년 3월 10일 별세했다. 202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신안군 출신 인물]][[분류:이천 서씨]][[분류:1892년 출생]][[분류:195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