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금천구]][[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성채/대한민국]][[분류:산성]] [include(틀:대한민국의 산성)]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3px solid transparent" {{{#!wiki style="margin: 0px; margin-top: -12px; margin-bottom: -7px"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343호}}}]]''' || ||<-2> {{{#fff {{{+1 '''서울 호암산성 '''}}}[br]{{{-1 서울 虎巖山城 | Hoamsanseong Fortress, Seoul}}}}}}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호암산성,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서울)|시흥동]] 산83-1번지 외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fff 수량 / 면적}}}''' || 133,790㎡ || || '''{{{#fff 지정연도}}}''' || [[1991년]] [[2월 26일]] || || '''{{{#fff 관리자[br](관리단체)}}}''' || [[금천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우물및주변산성지.jpg|width=100%]]}}} || || {{{#fff '''호암산성 유적[*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4972&ccbaKdcd=13&ccbaAsno=0343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개요 == [[통일신라시대]]의 산성.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서울)|시흥동]]에 있다. == 역사 == [[나당전쟁]]기에 [[당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였던 곳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군의 주둔지로도 쓰였다. 1972년 8월 30일에 산성 안에 있는 우물 하나가 '한우물'이란 명칭으로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받았다. 1989년과 1990년에 이 일대를 발굴조사했으며, 이 때 연못 2군데와 건물 터 4곳을 확인했다. 이외에도 많은 유물들을 발굴했다. 1991년 2월 26일에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에서 산성 권역 자체를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343호로 승격시키고 등재 이름도 '한우물및주변산성지'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한우물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2011년 7월 28일에 다시 '서울 호암산성'으로 재개칭했다. == 구조 == [[산]]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지은 테뫼식 [[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긴 마름모 모양이다. 둘레는 1.25km로 이 중에서 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구간은 약 300m 정도이다. 성벽은 표고 325m이다. 호암산성의 주변은 방어에 유리한 조건에 들어맞는다. 동북쪽에는 [[관악산]]과 [[삼성산]]이 있고, 서쪽, 서남, 서북쪽으로는 [[안양천]]을 끼고 있다. 또한 산성 내부의 대지는 평평해서 유사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었다. == 한우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호암산성.jpg|width=100%]]}}} || || {{{#fff '''한우물[* [[https://www.cha.go.kr/html/yuyu2021/seng/html/ss_content.html?sido=9&gubun=9&grcd=2|두 번째 사진 출처 - 생생문화재.]]] '''}}} || 상술했듯, 1989년 ~ 1990년 발굴조사에서 [[우물]] 터가 두 곳이 나왔다. 위 이미지는 제1우물터의 사진으로 겉모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물보다는 [[연못]]같다. 길이 22m, 폭 12m로 주변 석축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85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호암산성(─虎巖山城)》 문서.]]] [[조선시대]]에 조성한 석축이 있었는데, 발굴조사 당시 그 아래에서 [[통일신라]] 때에 쌓은 석축의 흔적이 드러났다. 연못 내부에 쌓인 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층위를 보면, 땅 표면 기준 30cm 아래까지는 백자 조각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나왔다. 그러나 그 아래로는 유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굵은 모래층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모래층 아래에 있던 뻘층에서 다시 유물(나무로 만든 손잡이에 철제 날을 끼운 월형도끼, 토기 등)을 발견했는데 거의 전부 통일신라 시대의 것이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축 구조는 [[문무왕]] 때 만든 [[안압지]]의 구조와 매우 비슷했다. 안압지의 석축은 맨 아랫단을 내어쌓고 위로 올라갈 수록 들여쌓은 모습인데 여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제2우물터는 제1우물터 아래에서 발굴된 우물터이다. 여기에서는 '仍伐內力只乃末(잉벌내역지내말)'이란 글씨가 새겨진 청동숟가락 유물이 발견되었다. [[시흥군#s-2.1.1|잉벌]]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 붙였던 지명으로,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년)에 '곡양현(穀壤縣)'로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호암산성의 축조 연대를 757년 이전으로 유추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유물이다. 이밖에도 [[고려시대]] 유물도 발굴했다. [[고려]] [[문종(고려)|문종]] 시기에 [[중국]] [[북송]]에서 쓰던 화폐 희령원보(熙寧元寶)가 대표적인 유물이다.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서울_호암산성|한국어 위키백과: 서울 호암산성]]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26410&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호암산성]]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26409&cid=46655&categoryId=46655|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우물]]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57394&cid=42840&categoryId=42848|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한우물 및 주변 산성지]]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30158&cid=42856&categoryId=42856|대한민국 구석구석: 호암산성]]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3931&cid=40942&categoryId=33380|두산백과: 서울 호암산성]] == 사적 제343호 ==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3430000,11&pageNo__=5_1_1_0&pageNo=1_1_2_0|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 호암산성 (서울 虎巖山城)]] >호암산성은 산마루를 둘러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1,250m이며, 그 중 약 300m 구간에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 >한우물은 '큰 우물' 또는 '하늘 못(天井)'이라는 뜻으로 호암산성 안에 있는 2기의 연못 중 하나이다. 발굴조사에서 연못 2개 ·건물지 4개가 확인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의 한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이고 그 아래의 신라시대 석출지도 확인되었다. 다른 우물지에서는 ‘잉벌내력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는 글이 있는 청동숟가락이 나왔다. > >우물지 근처에서 개 모양의 동물상(석수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서울에 화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우물 근처에서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 연못이 석수상과 관련되어 석구지라고 불려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 >※(한우물및주변산성지 → 서울 호암산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