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서봉총 금귀걸이1.jpg]] [[http://kocis.go.kr/koreanet/view.do?seq=3921|사진 출처 : 해외문화홍보원 - 과학으로 밝혀진 서봉총 금관의 비밀]] [[파일:서봉총 금귀걸이2.jpg]] 서봉총 금제태환투조이식(金製太環透彫耳飾) 금귀걸이의 모습. [[http://blog.daum.net/gpdkswl1781/7869362|사진 출처 : 신라 금관이야기 = 경주 노서동의 신라 서봉총 금관(新羅 瑞鳳塚 金冠)과 유물들]] [[파일:서봉총 금귀걸이4.jpg]] [목차] == 개요 == [[경주시]] [[서봉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여성]]용 [[황금]] [[귀걸이]] 30여점. 현재 금제 가는고리귀걸이 5쌍이 [[일본]]에 불법 유출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내용 == || [[파일:서봉총 유리팔찌3.jpg]] || [[파일:서봉총 유리팔찌4.jpg]] || || [[파일:서봉총 유리팔찌5.jpg]] || [[파일:서봉총 유리팔찌6.jpg]] || |||| [[서봉총 금관]], [[서봉총 금팔찌]], [[서봉총 금반지]], [[서봉총 유리팔찌]] 등의 유물들과 함께 전시된 모습.[[http://blog.daum.net/gpdkswl1781/7869348|사진 출처 : 테마전-과학으로 풀어보는 서봉총 금관]] || 1926년에 경주 [[대릉원|노서동 제129호분]] [[서봉총]]에서 당시 [[스웨덴]] 황태자였던 [[구스타프 6세 아돌프|오스칼 프레드리크 빌헬름 올라프 구스타프 아돌프]](Oscar Fredrik Wilhelm Olaf Gustaf Adolf)가 [[서봉총 금관]] 등과 함께 발굴한 신라시대 [[황금]] 공예품 10여점이다. 이때 다수의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중 은제대합(銀製大盒)에 [[고구려]]의 연호인 연수 원년 신묘년 3월에 왕이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 금귀걸이들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서기 391년, 451년, 511년 중 하나인데 서봉총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축조되었으므로 511년은 너무 멀고 서기 391년이나 451년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유물들의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5세기 사이로 추정된다. [[파일:서봉총 금귀걸이3.jpg]] [[http://www.dapsa.kr/blog/?p=25160|사진 출처 : 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신라인과 황금]] 서봉총에서는 약 30여점의 금귀걸이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금제태환투조이식 금귀걸이가 가장 유명하다. 귀걸이 맨 상단의 굵은 고리를 끌이나 톱으로 도려내어 장식한 것으로, 다른 고분에서는 실례를 찾아보기 힘든 서봉총만의 독창적인 장식 기법이다. 지금으로부터 1,7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금귀걸이들로, 오직 [[신라]]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 일본 불법 유출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21&aid=0001294620|뉴시스 : 일제 발굴 신라 '서봉총'의 팔찌·반지·귀고리 사라져]]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확인한 결과 과거 [[서봉총]]에서 출토된 황금 유물 중 9점이 [[일제강점기]] 때 몰래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금귀걸이 또한 '세환이식'(細環耳飾·가는 고리 귀고리) 5점이 쥐도새도 모르게 일본으로 유출되어 사라졌다. [[분류:신라의 금제유물]] [[분류: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 [[분류:경주시의 문화재]] [[분류:해외 소재 문화재]] [[분류:서봉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