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73d1f7><:> {{{#000000 '''『'''}}}[[서진|{{{#000000 '''진서'''}}}]]{{{#000000 '''』'''}}} '''{{{#000000 「상단염전(向段閻傳)」}}}''' || ||<:> [[상웅#s-1|상웅]] ||<:> [[단작]] ||<:> 염찬 || 向雄 (? ~ 283)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무백(茂伯)으로 상소의 아들. 사례 하내군 산양현 사람. 처음에는 군에 출사해 주부가 되어 하내태수인 [[왕경(삼국지)|왕경]]을 섬겼는데, 260년에 왕경이 [[사마소]]를 죽이려는 모의에 가담해 처형되자 상웅은 그를 기리고 통곡했다. 상웅은 제사에 쓸 소를 운송하면서 후임 하내태수[* 진서 상웅전에서는 유의(劉毅), 세설신어에서는 유회(劉淮), 세어에는 오분(吳奮)이라고 나오는데, 진서 교감기에 따르면 유회는 유준(劉準)의 잘못이라 한다.]에게 헌정하지 않고 예에 따라 곧장 낙양으로 운송했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군에서 도성으로 보내는 소가 대부분 더위를 먹어 죽었으며, 주군의 법이 엄정해 상웅은 태수로부터 소환되어 장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옥 중에서 [[종회]]의 부름을 받고 도관종사가 되었으며, 종회가 반란을 일으켜 264년에 처형되자 아무도 장사를 지내주려 하지 않았지만 상웅만이 종회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냈다. 이를 알게 된 사마소는 상웅을 불러 꾸짖었다. > 일전에 그대가 왕경을 위해 울었을 때 나는 죄를 묻지 않았소. 이번에는 종회가 반역을 저지르다 죽으니, 그대는 또 관용을 베풀어 장례를 치러주었구려. 이러면 왕법(王法)을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상웅이 답했다. > 과거 선왕(先王)들은 처형된 죄인의 뼈도 땅에 묻어주니, 그 인덕은 곧 썩은 뼈를 윤택하게 만들었는데, 그때 당시 공과 과를 따져보고 안장을 결정했습니까? 현재 형법은 이미 법령에 따라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도의에 감화되어 그의 장례를 치러준 것이고, 도의 교화에는 허물이 없는 줄 압니다. 또, 전하께서 그의 마른 뼈를 황야에 버리신 일은 후대에 어질고 현명한 사람이라 평가받기 아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사마소는 매우 기뻐했고, 이후 연회에서 상웅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여러 차례 승진해 황문시랑이 되었고, 과거 상관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태수가 시중을 지냈지만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를 안 [[사마염|무제]]가 칙령을 발포해 군신 간의 우호관계를 회복하라 명했다. 상웅은 마지못해 예전 상관을 찾아가 "일찍이 칙령을 받았으나 군신간의 관계가 이미 끊어졌으니 어찌 하겠습니까?"라 말한 뒤 떠났다. 무제는 아직도 화해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서 상웅을 불러 문책했다. > 내 군신의 우호관계를 회복하라 명했건만 어찌하여 일부로 절교까지 하였는가? 상웅이 답했다. > 과거 군자는 예의로 사람을 불러들이고, 예의로 사람을 물리쳤습니다. 현재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그 사람을 무릎 위에 올리는 것과 같으며, 사람을 물리치는 것은 그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와 내가 적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인데, 어찌 군신의 우호관계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무제는 그의 말을 납득하고 강제로 화해시키는 일을 포기하였다. 태시 연간(265년 ~ 274년) 동안 누차 승진해 진주자사가 되어 적당, 곡개, 고취 등과 20만 전을 하사받았다. 275년, 중앙으로 복귀해 어사중승으로 승진하고 시중을 더했으며, 얼마 뒤 정로장군으로 임명받고 다시 조정을 나갔다. 280년, 하남윤이 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 무제가 [[사마유]]를 영지로 보내려 하자 이를 극구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웅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간언하다가 결국 무제의 마음을 거슬렀고, 스스로 사직해 궁을 나와 이후 화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동생 상광(向𠥆)이 호군장군을 지냈다는 것 외에는 후사에 관한 기록이 없다. [[분류:조위의 인물]][[분류:서진의 인물]][[분류:28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