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라의 대외 전쟁)] [include(틀:고구려의 대외전쟁)]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임진왜란의 공성전, rd1=사천성 전투, other2=임진왜란의 해전, rd2=사천 해전)] ||<-3> {{{+1 '''사천 전투[br]蛇川 戰鬪'''}}} || || '''시기''' ||<-2> [[668년]] [[7월 16일]] ~ || || '''장소''' ||<-2>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평양, 높이=224px, 너비=100%)]}}} [[평양성]] 근교 사천(蛇川)[* 현재 [[평양시]]] || || '''원인''' ||<-2> [[고구려]]의 내분으로 인한, [[당고종]]의 고구려 3차 침공 || || '''교전국''' || [[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40px]]]] '''고려'''[br]{{{-2 (방어)}}}[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red; font-size: 1.2em" {{{#white '''패'''}}}}}} || [[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px]]]] '''신라'''[br]{{{-2 (공격)}}}[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blue; font-size: 1.2em" {{{#white '''승'''}}}}}} || || '''지휘관''' ||<^|1> [[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40px]]]] '''[[연남건]]''' || [[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px]]]] '''[[문무왕]][br][[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px]]]] [[김문영]](金文穎)'''[br][[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px]]]] 김상경(金相京)[[전사|†]][br][[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px]]]] 본득(本得)[br][[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px]]]] 구율(求律)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200,000명[*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에 기록된, 고구려로 북진한 신라 총 병력의 수이다. 다만 668년 시점까지 그동안 보여왔던 신라의 국력으로 20만명은 전례가 없이 무리인 대군이라 해석에 이견이 존재한다. 이 총병력 중 사천 전투에 얼마나 참여했는지는 불명이다.] ||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 '''결과''' ||<-2> '''[[평양성 전투(668년)|신라군과 당군의 합류, 도성 평양성 포위]]''' || || '''영향''' ||<-2> '''[[고구려]]의 멸망''' || [목차] [clearfix] == 소개 == [[668년]], [[고구려]] 정복을 위해 [[수도(행정구역)|수도]] [[평양성]]으로 진격하던 [[신라]]군이 사천(蛇川)과 들판에서 [[고구려]] 군대와 맞붙은 전투. 사천이 현재 어느 곳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평양시]] 동쪽을 흐르는 합장강(合掌江)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제2차 [[고구려-당 전쟁]] 중 [[사수 전투]]의 사수와 같은 지명으로 여겨진다. '''수도로 진입하는 마지막 길목에서 결사대와 맞붙었다는 점에서 백제멸망전 당시 [[황산벌 전투]]의 고구려판과 같은 전투였다'''. == 배경 == [[고구려]]는 [[연개소문]] 생전에는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연개소문 사후 연씨 형제의 내분으로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 연남생이 당군의 길앞잡이를 맡으면서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한다. 신라 측은 일단 전쟁 초기 1년간은 참여하지 않고 전쟁 준비만 하면서 방관하고 있었지만 과거와 달리 고구려의 패색이 짙자 대대적인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668년 6월 22일에 [[김인문]], [[천존]], [[박도유]](朴都儒) 등이 이끄는 선발대가 [[한성]](漢城)에서 출진했으며 문무왕이 직접 이끄는 군대는 수도 [[서라벌]]에서 6월 27일에 출발했다. 이미 남쪽에서는 [[백제]]가 660년 멸망하고 [[백제부흥운동]]도 663년경에는 이미 진압되었으며 백제와 함께 신라 후방을 괴롭히던 일본도 664년부턴 백제 지원을 포기하고 신라와 우호관계로 전환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선 신라와 당이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번엔 일본으로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거란 걱정을 했다. 그래서 [[대마도]]와 [[다자이후]]에 백제식 방어성을 여럿 쌓고, 한편으론 얼마 전까지 적이던 신라에 사신을 여러 번 보낸다.] 후방 걱정없이 신라가 뽑아낼 수 있는 전국 각 주의 병력이 거의 총집결했다. 이미 고구려의 남부 방어선을 맡고 있던 [[연정토]]가 앞서 신라에 12개 성과 수천명의 백성을 통째로 바치며 항복했기 때문에 국경 방어선은 뻥 뚫려 있었고, 신라군이 본격적으로 출진한 시점에 고구려의 대곡(大谷)[* [[황해도]] [[평산군]]]과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한성#s-1.2]](漢城)[* [[황해도]] [[재령군]]]을 포함한 2군 12개 성이 추가로 귀순하여 항복했다.[* 이 때 별 저항없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황해도 지역은 이후 [[검모잠]], [[안승]]이 주도하는 친신라 반당 고구려부흥군의 활동거점이 되었고, [[나당전쟁]]에서 신라와 함께 당군에 맞서 싸운다.] 이렇게 국경 방어선에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황해도를 거의 무혈입성한 신라군은 평양 근교까지 다다랐다. == 진행 == [[연남건]]은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군을 투입해 성문을 열고 평양성 동쪽 근교 사천 들판에서 신라군을 저지하려 했고, [[김문영]]이 주축이 된 신라군과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사천 들판에서 본대가 맞붙었는데, 대당소감(大幢小監) 관직에 있는 본득(本得), 그리고 [[한산주]] 소감 김상경(金相京)이란 자의 전공이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 중 김상경은 여기서 전사했다. 이들에게는 문무왕이 이후 일길찬의 관등과 조 1,000섬을 내려 주었다. 신라군이 사천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는 아술(牙述,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사람으로 사찬(沙湌) 지위의 구율(求律)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한다. 구율은 고구려군이 사천 다리 일대를 지나갈 무렵,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몰래 건너 위에 있던 고구려군을 기습 공격해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구율의 이런 행동은 군령을 위반하고 자기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가 독단으로 행한 작전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이후 [[논공행상]]에서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했다. 구율은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목을 매어 [[자살]]하려 했지만 주위 사람들이 만류해 죽지는 못했다고 한다. == 결과 ==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이후 고구려 북쪽 방어선을 돌파한 당군과 신라군은 668년 9월 21일 평양성 앞에서 합류,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포위해 [[평양성 전투(668년)]]로 이어졌다. == 관련 문서 == * [[고구려-당 전쟁]] * [[평양성 전투(668년)]] [[분류:삼국통일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