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謝裕[br]사유}}}''' || || '''성''' ||사(謝) || || '''이름''' ||유(裕) || || '''자''' ||경인(景仁) || || '''생몰''' ||370년 ~ 416년 || || '''부친''' ||사윤(謝允) || || '''조부''' ||사거(謝據) || || '''출신'''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現 허난성 저우커우시의 일부]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말기의 관료로 자는 경인(景仁)이며, [[무제(유송)|송무제]] 유유와 이름이 같아서 [[송서]]에서는 [[피휘|자를 사용했다.]] == 생애 ==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출신으로, 동진의 명재상 [[사안(동진)|사안]]의 형인 사거(謝據)의 손자이다. 아버지인 사윤(謝允)은 선성군 내사를 역임했다. 사유는 어린 시절에 작은할아버지인 사윤의 눈에 들었다. 이후 전군행참군, 보국참군사가 되었다. 회계왕세자 [[사마원현]]이 총애하는 장법순(張法順)이 권력을 좌우하자 많은 사람들이 장법순에게 아부했으나, 사유는 장법순을 찾지 않았다. 뒤에 저작좌랑이 되었다. [[환현]]이 사마도자 부자를 제거하고 태위가 된 뒤, 사유는 환현의 행참군이 되었고 환현이 대장군이 되자 다시 행참군을 맡았다. 환현이 초대(楚臺)를 세우자 사유는 황문시랑이 되었고, 환현이 제위를 찬탈한 뒤에는 효기장군을 겸임했다. 사유는 사물을 널리 읽고 잘 기억했으며 전대의 성현의 언행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여, 환현은 사유와 대화를 나누며 지치지 않았다. 사유는 무릉왕 사마준의 기실참군으로 임명되고 거듭 종사중랑이 되었으며, 사도좌장사로 전임되었다. 뒤에 유유가 진군장군이 되자 사마가 되고 진릉군 태수를 겸하였으며, 유유가 거기장군이 되자 다시 사마가 되었다. 409년, 유유가 [[남연]] 정벌을 조정에 건의할 때 조정에 반대 여론이 가득했으나 사유는 유유의 남연 정벌을 찬성하였다. 북벌이 결행되자, 사유는 [[안제(동진)|안제]]의 친동생이자 대사마인 낭야왕 사마덕문의 좌사마가 되었고 대사마부의 사무를 총괄했다. 또한 우위장군이 되고 급사중이 더해졌으며, 이부상서로 옮겼다. 당시 사유의 사촌형인 사혼이 좌복야로 있었는데, 유유는 복야 [[왕표지]]와 상서 왕소(王劭)의 전례를 거론하며 사유를 상서에서 해직시키지 않았다. 영사(令史) 형안태(邢安泰)가 묘릉을 참배했다가 어사중승 정선지에게 탄핵을 당하자, 사유는 여기에 연루되어 관직이 없는 상태로 이부상서를 겸하였다. 412년에 영군장군으로 옮겼다. 415년에 우복야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좌복야로 옮겼다. 이듬해인 416년에 사망하여 금자광록대부로 추증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 기타 == * 유유가 일찍이 무군장군 환수의 중병참군으로 있으면서 사유에게 정사를 자문할 때 사유는 유유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뻐하였다. 사유가 유유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환현의 사자가 사유를 불렀다. 유유는 여러 차례 나가려고 했지만 사유는 유유를 말렸고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환현의 부름을 받았다. * 여릉왕 [[유의진]]의 비는 사유의 딸이었다. * 사유는 성품이 정결했다. 한편 사유는 침을 뱉을 때 곁에 있던 하인의 옷에 침을 뱉고 하루 휴가를 내어 하인에게 옷을 빨래하도록 시켰다. 그래서 사유가 침을 뱉으려고 할 때마다 사유의 하인들은 앞다투어 사유의 침을 받으려고 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70년 출생]][[분류:416년 사망]][[분류:진군 사씨]][[분류:저우커우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