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Sadako_Sasaki2.jpg]] [목차] == 개요 == 佐々木禎子 [[1943년]] [[1월 7일]] ~ [[1955년]] [[10월 25일]] (향년 12세) [[종이학#s-1.1|천 마리 종이학(센바즈루)]]을 접은 [[평화주의|반전]] 반핵의 상징이 된 소녀. 쉽게 말해서 '일본판 [[안네 프랑크]]'. == 생애 ==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2세였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히로시마에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사사키 가는 [[그라운드 제로#s-1|그라운드 제로]](폭격 지점)로부터 약 1.6km 떨어진 곳이었는데 폭발에 휘말린 사다코는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사다코의 어머니는 집에서 뛰쳐나와 딸을 찾아다녔다. 어머니는 사다코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사다코는 눈에 띄는 부상 없이 생존한 채 발견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사다코는 대피하는 동안 [[낙진|'''검은 비(낙진)''']]를 맞았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괜찮았지만 [[방사능]]은 사다코를 잠식했고 결국 사다코는 12세가 되던 1955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8월 [[나고야]] 지역의 고등학생들이 선물해 준 [[종이학]][* [[일본]]에는 몸이 아픈 사람에게 [[종이학]]을 선물하며 쾌유를 비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을 계기로 사다코는 1,000마리의 종이학을 접으면서 회복을 기원하기 시작했다. 사다코와 주변 사람들은 2개월 간 수많은 종이학을 접어 1,000마리를 넘겼지만 사다코의 병은 낫지 않았고 백혈병이 악화된 사다코는 결국 10월 25일 히로시마 [[적십자#s-2|적십자]] 병원에서 숨진다.[* 이때 사다코는 644마리의 종이학을 접은 상태였고, 그녀가 접지 못한 356마리는 사다코의 사후에 주변 사람들이 접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사다코의 유족들은 비영리단체를 설립하였고 사다코가 접은 종이학들은 반전과 반핵의 상징이 되어 오키나와 평화의 공원까지 나서게 되었다. 현재도 <천 마리 학(千羽鶴)>이나 <종이학(折り鶴)> 등 사다코의 종이학을 소재로 한 노래들이 작곡되어 기념식마다 불리고 있다.[* 문제는 [[일본]] 정계와 [[극우]]들이 이걸 [[일본의 피해자 행세|자국의 피해자 행세]]에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반핵, 반전운동가들은 이들 때문에 자신들의 숭고한 의도가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불만이 매우 크다.] 히로시마 원폭 추모공원, 기념관에도 사다코에 대한 전시 자료, 종이학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다. 이 이야기는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 출처 == * [[https://en.wikipedia.org/wiki/Sadako_Sasaki|영어 위키백과 사사키 사다코 문서]] [[분류:1943년 출생]][[분류:니시구(히로시마) 출신 인물]][[분류:1955년 사망]][[분류:백혈병으로 죽은 인물]][[분류:폭발물에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