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후한의 인물, rd1=사마준(후한), other2=서진의 인물, rd2=사마준(화용왕), other3=북위의 귀족, rd3=사마준(북위),other4=유희왕의 등장인물, rd4=인섹터 하가)] ||<:> '''사마준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사마의의 아들들)] ---- [include(틀:진서)] ---- [include(틀:서진의 계보도)]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0080 0%, #800080 0%, #800080 80%, #800080)" '''{{{+1 {{{#fecd21 서진의 황족[br]부풍무왕(扶風武王)[br]{{{+1 司馬駿 | 사마준}}}}}}}}}'''}}} || || '''[[시호|{{{#FEDC21 시호}}}]]''' ||무^^(武)^^ || || '''[[작위|{{{#FEDC21 작위}}}]]''' ||평양정후^^(平陽亭侯)^^ → 평양향후^^(平陽鄉侯)^^ → 평수후^^(平壽侯)^^ → 동모후^^(東牟侯)^^ → 여음왕^^(汝陰王)^^ → 부풍왕^^(扶風王)^^ || || '''[[직위|{{{#FEDC21 최종직위}}}]]''' ||산기상시^^(散騎尙侍)^^ → 둔기교위^^(屯騎校尉)^^ → 보병교위^^(步兵校尉)^^ → 산기상시^^(散騎尙侍)^^ → 평남장군^^(平南將軍)^^ → 안남장군^^(安南將軍)^^ → 안동장군^^(安東將軍)^^ → 진서장군^^(鎭西將軍)^^ → 정서장군^^(征西將軍)^^ → 표기장군^^(驃騎將軍)^^ → 대사마^^(大司馬)^^[* 사후 추증] || || '''[[성씨|{{{#FEDC21 성씨}}}]]''' ||사마^^(司馬)^^ || || '''[[휘|{{{#FEDC21 휘}}}]]''' ||준^^(駿)^^ || || '''[[자(이름)|{{{#FEDC21 자}}}]]''' ||자장^^(子臧)^^ || || '''아버지''' ||친아버지: [[사마의]]^^(司馬懿)^^ || || '''생몰기간''' ||[[232년]]? ~ [[286년]] [[11월 2일]][* 음력 9월 29일이다.] || || '''고향''' ||사례^^(豫州)^^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現 [[허난성]] [[자오쭤시]]의 일부] || ||<|2> '''재위기간''' ||<#800080> '''{{{#fecd21 서진의 여음왕}}}''' || ||266년 ~ 277년 || ||<|2> '''재위기간''' ||<#800080> '''{{{#fecd21 서진의 부풍왕}}}''' || ||277년 ~ 286년 11월 2일 || 司馬駿 (232년? ~ 286년 11월 2일)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서진]]의 [[황족]]이자 [[사마의]]의 6남으로[* 세설신어에 따르면 17남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복부인(서진)|복부인]]. 자는 자장(子臧)으로 출신지는 [[사례(중국)|사례]] 하내군 온현. [[시호]]는 무(武).[* 동복형 사마주와 같은 시호이다.] 시호를 따 부풍 무왕이라고도 부르며, [[사마량]], [[사마주]], [[사마경]]의 동복 형제이다. 아내 태비 장씨(臧氏) 사이에서 자식을 10명이나 두었는데, 이들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사마창]][* 부풍왕 직위를 이었고, 후에 순양왕에 봉해지졌으나, 사마창은 아버지와 달리 성품이 포악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다만 동생에게는 우애가 있었는지 부풍왕에 봉해졌을 당시에 어린 소년이였던 사마흠에게도 식읍을 분봉하길 원했다고 한다. 후에 사마창은 [[영가의 난]]에 휘말려 생사 불명.]과 [[사마흠]][* 이 작은아들 사마흠이 [[팔왕의 난]]에 휘말리게 되는데, 신야현공으로 [[분봉]]을 받은 후 제왕 [[사마경]]의 조왕 [[사마륜]] [[토벌]]에 참여하여 신야군왕이 되었다. 이후로 이렇게 저렇게 줄타기를 하다가 [[장창]]의 [[반란|난]] 때 [[반란군]]에게 살해당한다. 형 사마창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성품을 지녔는데, 그의 폭정이 반란의 원인이었다.]이다. == 생애 == 사마준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은혜로웠다. 특히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대여섯 살에는 글을 써 소통하고 경전을 읽고 외웠으며, 자신의 논술을 쓸 수 있었고, 일찍이 순양과 인효의 선후를 논한 바 있어 글의 문채에는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를 본 사람들마다 사마준이 기이한 재주를 가졌다고 여겼다. 여덟 살에는 산기상시가 되어 [[위(삼국시대)|조위]]의 [[황제]] [[조방]]에게 글을 강론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사마팔달]]'''을 배출한 당대의 명문가 사마씨 가문에서도 '''촉망받는 기대주'''였다. 조위 [[경초]] 연간[* 237 ~ 239년이다.]에 평양정후(平陽亭侯)로 봉해졌다가 이후 보병교위, 둔기교위 등을 역임했다가 다시 산기상시가 되었으며, [[작위]]가 평양향후(平陽鄕侯)로 오른 뒤에는 평남장군, 가절, [[도독|도독회북제군사]]가 되면서 평수후로 고쳐 봉해 안남장군으로 옮겨졌고 대오 전선을 책임졌다. 264년에는 동모후로 봉해졌고 안동대장군으로 옮겨 [[허창]]을 지켰으며, 265년에 [[서진|진나라]]가 건국되자 여음왕에 봉해졌고 [[식읍]]이 1만호가 되었다. 그리고 사마준은 도독예주제군사가 되어 허창에 주둔하였다. 이때 [[세설신어]] 덕행편에 나온 일화로는 당시 서진의 [[명사(동음이의어)#s-2.2|명사]] [[유보(서진)|유보]]가 죄를 지어 도형에 처해지면서 노역을 하고 있었는데, 사마준이 오백 필의 베로 대속시켜 줬다가 유보를 종사중랑으로 기용하자 사람들이 사마준의 미덕에 대해 칭찬하며 훌륭한 일이라 여겼다고 한다. 268년에는 사마준이 허창에 주둔하고 있었을 당시 합비 침공을 준비중이던 오나라 장군 [[정봉]]이 이간책으로 동요를 퍼뜨려 당시 도독양주제군사였던 [[석포]]가 오나라와 내통을 하고있다는 보고가 회북감군 [[왕침(서진)|왕침]]에게서 올라왔다. 평소 [[왕침(서진)|왕침]]은 [[석포]]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빌미로 [[석포]]를 모함하자 [[양호(삼국지)|양호]]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무제(서진)|사마염]]이 석포를 의심하니 곧 그를 파면하여 [[사마망]], [[사마주]] 등을 시켜 석포가 있는 곳으로 가게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손삭]]은 석포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허창으로 갔다가 사마준을 만났다. 사마준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에 더해 조정에서 군사를 파견해 석포를 토벌하려 한다는 사실까지 손삭에게 알려주었다. 사마준으로부터 조언을 얻은 손삭은 곧장 석포에게로 갔고, 사마준이 알려준대로 석포에게 화를 없애라는 충고를 전했다. 그러면서 석포가 수춘을 나와도 죽지 않을 것이니 병사를 풀고 도정에 걸어가 죄상을 알리도록했고, 석포는 이를 따랐다. 사마염이 이 소식을 듣고 의심을 풀어 석포의 병권만을 빼앗고 낙릉공의 신분으로 집에 돌아가게 했다. [[정봉]]의 이간계 시도가 어쨌든 성공을 하자 [[정봉]]은 합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석포가 없어도 사마준이 건재하였다. 사마준은 [[작피]]를 공격한 [[정봉]]의 군세를 격퇴했으며, 또한 [[합비]]에서 [[정봉]], [[제갈정]]의 공세를 막아냈다. 그 후, 군권을 포기하고 조정으로 간 석포를 대신해서 사마준이 사지절, 도독양주제군사가 되어 대오 전선의 [[지휘관]]으로 [[수춘]]을 지켰다. 이 때의 활약으로 서진 [[조정]]은 사마준의 능력에 주목하게 되어 이는 나중에 그가 이민족이 일으킨 반란 진압에 투입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269년에는 양양의 도독형주제군사 [[양호(삼국지)|양호]], 임치의 도독청주제군사 [[위관]], 하비의 도독서주제군사 [[사마주]]와 함께 수춘의 도독양주제군사로서 대오 전선의 한축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도독예주제군사로 복귀해 허창을 지켰다. 그때 동년에 신설된 진주[* 서진 수립 후, 옹•양주 일부를 떼어내어 새로 신설한 주다.]를 다스리던 진주자사 [[호열]]에게 큰일이 닥쳤다. 진주자사에 부임한 1년이 지난 270년, 진주 일대에서 [[독발수기능]]이 '''[[독발수기능의 난|반란을 일으켰기 때문.]]''' 이에 맞서 호열이 독발수기능을 토벌하려 나섰고, 만곡퇴(오늘날의 감숙성 고란현)에서 독발수기능과 대치하지만 오히려 호열이 수세에 몰렸다. 호열이 위험해지자 [[사마량]]이 구원에 나섰으나 [[사마량]]의 명을 받고 지원하러 온 [[유기(서진)|유기]]가 도와주지 않아 [[호열]]은 결국 크게 패하고 [[전사(죽음)|전사]]한다. 한편, [[유기(서진)|유기]]가 호열 구원에 실패하자 [[사마량]]이 책임을 대신 지고 경질되었다. 호열이 죽고 사마량이 파면된 상태에서 진주, 양주 등이 무너지자 안서장군, 도독진주제군사으로 [[석감(서진)|석감]]이, 안서군사, 진주자사로 [[두예]]가 부임했으나, 석감이 두예를 모함해서 날려버리고 정작 석감도 진압에 실패해버리는 사고를 터뜨렸다. 석감마저 독발수기능 토벌에 실패하자 대오 전선의 한축이자 세간에 주목을 받고있던 예주의 사마준을 [[관중#s-4|관중]]에 진수시킨 다음 진서대장군, 사지절, 도독옹양등주제군사로 옮겨 [[옹주(중국)|옹주]], [[양주(중국)|양주]]의 모든 군사를 총괄시켰다. 그리고 면직된 [[사마량]]을 대신해 관중을 지키며 곤면, 시중의 옷 등을 더했다. 한편, 그러면서 청주의 [[위관]]을 [[유주(중국)|유주]]로 배치켜 동쪽의 이민족 방면을 맡기기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사마준은 선정을 베풀어 위엄이 있었고 농사, 양잠을 권해서 노역을 함께 했으며, 사졸들과 고역을 나누었다. 그리고 [[공무원|관리]], [[병사]] 등도 사인과 같이 밭을 10무로 제한하고 표문을 올렸으며, 이에 [[무제(서진)|사마염]]이 [[서진|진나라]]의 [[주(행정구역)|주]], [[현(행정구역)|현]]들에게 사람을 보내 관리들이 농사에 힘쓰도록 했다. 첫 1년은 [[독발수기능]]과 대치하며 전선의 소강 상태를 이끌어냈고, 양주자사로 [[견홍]]이 합류하였지만 이후 [[관중]] 지역의 기근과 더불어 독발수기능이 금성을 침공하자 [[견홍]]은 독발수기능과 격돌하였으나 도리어 청산으로 패퇴하고 적의 포위망을 뚫지 못해 결국 [[전사(죽음)|전사]]하고 말았다. [[견홍]]의 전사로 진주와 옹주의 [[약탈]]을 허용하고 말았으며, 사마준은 결국 패전의 책임을 지고 경질되는 굴욕을 맛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사령관이 [[가충]](...). 사실 가충은 본인이 원해서 사마준의 후임이 된 것이 아니었다. 가충을 변방으로 보내려는 속셈을 가진 [[임개]]의 추천으로 상서령 가충을 도독옹양주제군사로 임명된게 발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가충이 권력의 맛에 취해있었다는 것. 물론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해야 하는 것도 능력 밖인 가충에게 큰 부담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심한 문제가 일단 중앙에서 멀어진다는것은 곧 권력에서 멀어진다는 걸 의미하였기에 가충은 이를 두려워하여 전방 파견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자신의 딸 [[가남풍]]을 [[혜제(서진)|사마충]]의 황후 후보로 내밀었고, 혼인이 성사되어 가충은 황제와 사돈이 되는것으로 다시 중앙에 눌러앉아 진주, 서량행을 피했다. 272년, 낙양에 돌아와있던 사마준은 결국 경질된 지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양주자사에는 [[양흔]]이 임명되었고, 사마준은 평로호군 [[문앙]]에게 명하여 양주, 진주, 옹주의 군사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로써 사마준은 [[양흔]]과 [[문앙]]이라는 A급과 S급 장수를 양옆에 끼고서 [[독발수기능]] 토벌에 나섰다. 전임 담당자들인 [[호열]], [[석감(서진)|석감]], [[견홍]] 등이 독발수기능을 얕보고 무작정 진압하려다가 패했던것을 보고 느낀바가 있었던 사마준은 독발수기능 토벌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발수기능과의 직접대결을 피했으며, 전번의 기근을 교훈삼아 각지에 [[둔전(삼국지)|둔전]]을 설치하여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 정책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독발수기능은 더이상 세력확장을 위한 탄력을 받지 못했고 사실상 파탄난 관중의 인프라 복구에 공헌했다. 사마준은 방비를 철저히 하여 자잘한 이민족들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고, [[약라발능]]을 비롯하여 아직 독발수기능에게 확실히 편들지 않은 이민족들과 화친을 맺어 해가 갈수록 독발수기능의 세가 약해져가고 있었다. 이후 274년 사마준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으며, 4년에 걸친 그의 공세에 독발수기능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 때의 전공을 대강 정리해 보자면. * 274년에 금성군을 침공한 [[오랑캐]]를 격퇴하고 그 수령 [[걸문니]](乞文泥)를 참살. 여세를 몰아 독발수기능을 격파하고 그의 본대 3,000여 명을 참살해 정서대장군으로 진급하고 [[개부의동삼사|의동삼사]]가 되어 지절, [[도독]]은 예전과 같이 함. * 274년에 독발수기능은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내고 휴전을 맺는다. 사마준은 독발수기능과 휴전을 맺는 한편으로 그의 연맹을 해체시키기 위해 다른 연맹의 일원들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간다. * 275년에 서역무기교위 [[마순]]을 보내 배반한 [[선비족]]을 토벌. * 276년에 서역무기교위 마순을 보내 변경을 침범한 오랑캐를 격파. * 276년에 아라다(阿羅多)가 이끄는 선비족을 패퇴시키고 4,000 명을 죽이고 9,000 명의 포로를 사로잡음. * 277년에 사마준에게 조서가 내려졌고, 사마준의 군사 7,000 명이 양주 방위군과 교대하자 입지가 좁아진 독발수기능은 후탄발(侯彈勃)과 함께 둔전하는 병사를 위협하였다. 그러자 사마준은 문앙을 시켜 양주, 진주, 옹주의 군사들을 전진배치하며 수기능을 거꾸로 위협하니, 선비족 연맹은 와해되었다. 이 때의 투항자 수만 무려 '''이십여 만.''' '''사실상 [[독발수기능]]의 몰락은 [[사마준]] 대에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토벌하기 직전, 문앙은 중앙으로 불려들어졌고 사마준 또한 조정에 입조하여 중앙으로 돌아왔다. 278년에 양주자사 [[양흔]]은 [[약라발능]]과의 화친을 일방적으로 끊고 강족을 공격, 이에 화가 난 약라발능의 역공으로 양흔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양흔의 죽음으로 졸지에 서량의 진나라군은 리더를 잃었는데 변방의 약소 군세로 몰락한 독발수기능은 그 틈을 타 끝내 재기에 성공했다. 279년 1월, 독발수기능은 금산을 침공했고, 양흔의 후임인 [[소유(서진)|소유]]를 금산에서 패사시키고 [[서량|양주]]를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를 벌인다. 서진의 총 병력 1/3에 달하는 양주 방위군 전원이 10,000 명이 채 안되는 독발수기능의 군사에게 패하여 전투불능이 된 것이었다. 심지어 양주는 [[위(삼국시대)|위나라]] 시기부터 여러 이민족들과 [[촉한]]의 위협을 지속적으로 받았던 지역이지만 함락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양주의 상실로 근심에 빠진 [[사마염]]은 서량 방면으로 [[마륭]]을 파견보내서 독발수기능을 마침내 토벌한다. 마륭에게는 정예병이라지만 고작 3,000 명의 병력만 주어졌는데, 소수의 병력만으로 마륭은 반란 진압에 성공을 하였다. 남들이 그토록 쩔쩔매던 독발수기능을 고작 삼천의 병력으로 토벌한 마륭도 대단했지만, 그 독발수기능이 마륭에게 패할정도로 세력을 약화시킨 사마준의 공도 크기 때문에 사마준은 부풍왕의 작위에 봉해졌다. 280년, 사마준은 표기장군으로 진급했고, 개부·사지절·도독옹량등주제군사 직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오나라 정벌에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충]]은 오나라 정벌을 반대[* 반대 이유로는 표면적으로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토벌하지 않았다점을 들었지만, 실상은 밖에 적을 두어야 안이 조용해진다는것을 알았기에 그 점을 가충의 노린것이다.]했으나 황제의 명때문에 강제로 대오 전선의 대도독을 맡았야 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대오 진나라군을 총괄 지휘하는것은 [[장화(삼국지)|장화]]였는데, 문제는 장화가 전투 경험이 일천한 문관이였다. 그러나 10여 년간 대오 정벌을 준비하던 [[양호(삼국지)|양호]]가 병으로 죽기 전 모든 작전 계획을 장화에게 [[인수인계]]를 했기 때문에 오나라 정벌은 장화가 이끌어야했다. 그래서 그의 파트너로서는 오랫동안 오나러 정벌을 같이 외쳤으며, 전투 경험이 많은 [[두예]]가 적임자였다.[* 두예는 이때 진남장군이였으므로 사마준보다 직급이 아래였다.] 때문에 사마준이 오나라 정벌에 동참하기에는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여 직급상 야전에 직접 서기가 애매했으며, 또한 중앙에 입조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마준이 [[오멸망전]]에는 참가하지 않은것으로 추정된다. 282년에는 [[사마유]]를 대사마 겸 도독청주제군사로 임명해 쫓아내려 한 [[순욱(서진)|순욱]], [[풍담]]에 맞서 그를 [[산둥성|청주]]로 보내는 것을 [[왕혼]]과 함께 강력히 반대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 사마유는 청주로 보내졌다. 그리고 사마유는 청주에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죽고말았다. 286년 9월 29일, 사마준이 병사했다. 그의 후사는 아들 [[사마창]]이 그대로 이어 부풍왕으로 봉해졌다. 또 다른 아들 [[사마흠]]은 형 사마창의 요청으로 식읍을 분봉받아 신야현공으로 봉해졌다.[* 나중에 사마흠은 [[팔왕의 난]]에 가담하여 줄타기 끝에 죽고 말았다. 사마창은 [[영가의 난]] 당시 실종되었다.] 사후 [[사마(관직)|대사마]]로 추증되고 [[시중]], 황월이 더해졌으며, 서방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는 자들이 많았고 백성들은 그 비석을 세워 장로들이 그 비석을 보면 절했다. 후에 알려지는 [[팔왕의 난|역사]]를 보면 험한 꼴 보기 전에 [[적절히]] 잘 간 셈이다. == 평가 == 아버지 [[사마의]]와 큰형 [[사마사]], 둘째형 [[사마소]]에 비교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로 평가된다.[* 사실 큰형과 둘째형과는 아버지뻘, 아버지와는 할아버지뻘의 나이 차이다. 큰조카인 사마염하고 나이차이가 고작 3살이니. 사실 세 아들 모두 아버지 사마의 능력을 잘 물려받은 케이스이지만, 각각 두드러지는 능력을 보여준다. 사마사는 정치력, 사마소는 군사능력, 사마준은 인품이다.] 사마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면 일단 떡잎부터가 남달랐다. 사마준은 앞서 말했듯이 어려서부터 학문으로 이름이 알려졌었는데, 여덟 살에는 산기상시가 되어 [[위(삼국시대)|조위]]의 [[황제]] [[조방]]에게 글을 강론했을 정도였다. 물론 [[사마씨]] 입장에서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신세였던 조위황제를 조롱할 의도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제에게 글을 가르칠정도로 머리가 매우 명석했고 이후 장성해서도 비뚤어지지 않아 청렴결백하고 도를 지켰기에 '''[[서진]] [[사마(성씨)|사마씨]] [[종실]] 내 최고의 준걸'''로 기대를 받았다. 이 평은 결과적으로 사마준의 행보에 딱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사마준은 효행이 있어 어머니 [[복부인(서진)|복부인]]이 형 [[사마량]]이 임관할 때 따르자 이를 사모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병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나 걱정했으며, 때에 따라 관직을 위임하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했다고 한다. 또한 저술, 이론에 능해 순의와 인효의 선후에 대해 논했고 문장은 칭찬을 받았다. 사마준은 보병교위로 무관에 임관하여 차례대로 승진한 끝에 실무적으로 대오 전선 방면을 담당하는 중임을 맡았다. 특히 [[정봉]]의 이간계를 간파하여 [[석포]]를 구명하였고, 합비에 들이닥친 [[정봉]]과 [[제갈정]]의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며 공을 세우자 종실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후에 독발수기능 때문에 고통받던 조정은 대오 전선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사마준을 높게 평가하여 그를 반란 토벌군 사령관으로 낙점하였다. 그리고 사마준은 조정의 기대에 부응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발수기능의 난]]이 일어날 당시, 용맹하기로 소문난 [[호열]]과 [[견홍]]조차 독발수기능을 상대로 이기지 못하고 패배한 끝에 목숨을 잃었던 반면에 사마준은 별다른 피해 없이 독발수기능을 빈사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비록 처음엔 견홍의 패배 + 이민족들의 단결로 인해 진주, 옹주등의 지배권이 넘어가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어지며 사령관에서 면직당하긴 했었지만, 뒤를 이어 부임하게된 가충이 중앙을 떠나지 않으려 하면서 사마준이 사령관으로 복직하게 되었다. 다시 기회를 얻게된 사마준은 이전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독발수기능을 무작정 토벌하기보다는 황폐화된 땅에 [[둔전]]을 실시하며 차츰 전력을 다듬어 나갔고, 독발수기능의 강해진 요인에는 그에게 호응하는 이민족들이 많아진것임을 간파하여 아직 독발수기능 세력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은 선비족들을 포섭하고 분열시켰다. 사마준이 [[이이제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독발수기능의 빈틈을 노려 공격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세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독발수기능을 약화시켰다. 또한 [[사마씨]]로부터 중용받지 못하던 [[문앙]]을 사마준이 적극적으로 써먹은것으로 보아 그가 편협한 시각을 갖지않고 능력만으로 인재를 등용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것을 알 수 있다. [[가충]]등의 실권자들의 내부암투로 인해 독발수기능 토벌이 오랫동안 늦춰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서진 조정에서 내세운 인재중, 그 강력한 독발수기능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건 사마준밖에 없었던것만 봐도 그의 능력이 입증된 셈이다.[* [[호열]], [[견홍]], [[석감(서진)|석감]]은 독발수기능에게 쪽도 못쓰고 당해버렸다. [[사마량]]은 호열을 구원하기 위해 [[유기(서진)|유기]]를 파견했으나 유기가 독발수기능에 겁을 먹고 지체하는 바람에 결국 호열이 전사하였고 그 책임으로 면직되었다. 그리고 사마준과 함께 독발수기능의 진압을 담당했던 [[양흔]]의 경우, 사마준이 선비족들을 포섭해 독발수기능의 세력을 약화시켜놓았던 것이 무색하게도 사마준이 사라지자마자 이제는 독발수기능의 세력이 줄었으니 더이상 그들을 견제할 필요가 없다고 독단으로 판단했다. 양흔은 선비족과의 화친을 일방적으로 끊은 후 공격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되려 역습을 당해 죽고말았는데, 이렇게 양흔이 자충수를 두며 자멸한 사이에 그 틈을 타 독발수기능이 금산을 침공하여 양주자사 [[소유(서진)|소유]]를 죽여버리며 독발수기능은 다시 재기했다.][* 호열, 견홍, 양흔은 [[촉한멸망전]]때 군공을 세웠던 나름 서진의 A급 베테랑 장수들이였음에도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삽질끝에 목숨을 잃었다. 석감의 경우, 병주자사를 역임하며 흉노족과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 온 경력이 있었고, 같이 갔던 두예도 유주 출신이라 이민족 상대 경험이 제법 있었다. 그럼에도 둘의 의견 충돌로 한쪽을 날려버리는바람에 석감도 패배하며 진압에 실패했다. 즉, 이러한 전임자들의 행태를 보아서 유일하게 독발수기능을 말그대로 압살한 사마준의 전장장악능력은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진압이 마무리 되기도 직전 [[무제(서진)|사마염]]이 사마준을 중앙에 입조시키는 바람에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끝내버리지 못했다. 결국 [[마륭]]이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토벌하고 나서야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때 마륭에게 주어진 군사가 3천 명 뿐이였는데, 이 병력으로 토벌에 성공한 마륭도 대단했지만, 사마준이 독발수기능을 약화시켜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요인도 있었기에 사마준의 공 또한 적지 않았다. 또한, 사마준은 부하를 좋게 어루만져 거느려 위엄과 은혜가 있었고, 뽕나무 농사를 감독할 때는 사졸과 더불어 일을 나누었다는 일화와 그가 졸 했을 때는 서쪽땅에서 그의 죽음을 듣고 우는자가 길에 가득했고, 사람들이 슬퍼하며 비석을 세웠다는 것만 봐도 인품 또한 훌륭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종합적으로 사마준에게는 훌륭한 인품,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시선, 능력있는 인재의 적극등용, 실패요인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분석하여 보완하는점,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올바른 판단력을 지녔다. 한마디로 여러모로 완벽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설명할수 있다. == 기타 == >서진 [[태시]] 6년(270년) 이래 진나라 초 부풍왕(扶風王) 사마준이 진서대장군 도독옹량주등제군사(都督雍凉等州諸軍事)로 관중을 진수할 때, 사마 고평(高平, 연주 산양군 고평현)사람 [[유보(서진)|유보(劉寶)]], 장사 형양(滎陽, 하남윤 형양현)사람 환습(桓隰) 등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 제갈량에 대해 함께 논했다. 이때 논의하는 자들 다수는, '제갈량이 잘못된 곳에 몸을 맡겨 촉 백성들을 수고롭게 했으며, 힘은 적으면서 계획만 거창했으니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 >금성(金城)사람 [[곽충]]은 '제갈량의 임기응변과 지혜, 뛰어난 지략이 [[관이오|관중]], [[안영]]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해 논자들이 미혹되었다'고 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관한 다섯 가지 일(이른바 곽충5사)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보 등이 또한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부풍왕은 개연(慨然)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 >「촉기」 ==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아직 미등장. 사마씨 가문에 흔치 않은 호걸형 인물이기 때문에 나오면 충분히 인기가 있을 법 하지만 아직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나오면 일단 매력하고 통솔만은 80대 이상을 응당 받아야 하는 인물이기에 인물 부족에 시달리는 삼국지 후반부에 유용한 인재가 될 것이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형들이 [[청의 엑소시스트]]으로 패러디되면서 자연스럽게 [[아서 A 엔젤]]로 패러디됐다. 독발수기능의 난 (3)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사마의의 7남으로 여러모로 완벽한 능력자라고 서술되어 있다. 전투외편 8편에서 처음 등장. [[석포]]가 의심을 받아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서 [[손삭]]이 대책을 물으러 찾아오자 싸울 필요가 없는 싸움은 피하라고 조언했다. 이후에는 작피로 공략을 들어온 [[정봉]]과 [[제갈정]]을 [[개발살]]내기도 했다. 이후에는 군사권을 포기한 석포 대신 도독양주제군사로서 수춘에 주둔했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독발수기능의 난 편에서는 [[호열]], [[석감(서진)|석감]]/[[두예]] 콤비가 전부 독발수기능의 난 제압에 실패하자 [[견홍]]과 함께 세 번째로 서량에 보내졌다. 그러나 사마준이 뭘 해 보기도 전에 견홍이 싸우러 뛰쳐나갔다 죽어버리면서(...) 난의 조기 진압은 물 건너 가게 되었고, 사마준은 견홍의 상관으로서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그러나 이후 후임으로써 서량으로 향할 예정이었던 가충이 이런저런 이유로 빠지게 되면서 이번에는 [[양흔]]과 [[문앙]] 등을 데리고 다시 옹양주 방면의 사령관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사마준 본인은 이를 하늘이 다시 준 기회로 여겨 이번엔 반드시 성공시킬 것임을 다짐하며 다시 서량으로 향했다. 사마준은 서량에 도착한 뒤 독발수기능의 토벌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보았고, 호열, 석감, 견홍 모두 상대 페이스에 말리고 실패하며 그때마다 주변 이민족들이 독발수기능에게 가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으니 일단 독발수기능이 상대의 뻘짓에 편승하지 않고도 세력을 키울 수 있는지 확인부터 해 보자고 생각하여 직접 대결을 피하고 둔전을 다시 시작해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사마준의 판단은 적중하여 독발수기능은 더 이상 세력 확장을 위한 탄력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런 대치 상태에서 몇 년의 세월이 쭉쭉 흘러갔다고 묘사됐다. 사마준은 자잘한 공격은 철저한 방비로 막아내고, 양흔 등을 시켜 아직 독발수기능의 편에 붙지 않은 이민족들과 화친을 맺었으며, 이에 독발수기능의 세력은 해가 갈수록 힘이 떨어졌다고 언급되었다. 결국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독발수기능이 선제 공격을 해 오자 문앙을 보내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박살냈다. 이 승리로 인해 독발수기능 휘하의 이민족이 20만명 가까이 투항을 했지만, 이 엄청난 대승리가 역으로 작용해 중앙에서는 독발수기능의 난을 제압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겨 사마준을 다시 중앙으로 불렀으며, 결국 미처 난을 다 제압하기도 전에 중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사마준(동명이인), version=91)] [[분류:서진의 황족]][[분류:232년 출생]][[분류:286년 사망]][[분류:자오쭤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