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조선]] 제6대 왕 [[단종(조선)|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안장된 능 == [include(틀:조선왕릉)] === 개요 === 思陵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있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조선)|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1440년|1440]]~[[1521년|1521]])의 무덤([[조선왕릉]])이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 상세 === 사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능 규모가 소박한 편이다. 이는 사릉이 [[해주 정씨]] 가문의 선산에 조성됐으며 조성될 당시에는 대군 부인의 예로 장사지내졌기 때문이다. 정순왕후가 묻힌 사릉은 [[해주 정씨]] 가문의 선산인데 여기에 무덤이 만들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순왕후는 남편인 단종과의 사이에 후사 없이 사별하면서 시누이 [[경혜공주]]의 아들이자 시조카인 [[정미수]]를 수양아들로 두었고 이러한 이유로 사후 해주 정씨 선산인 지금의 사릉에 묻혔다.[*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까지 해주 정씨 가문에서 제사를 지냈다.] 때문에 사릉 주변으로는 지금도 해주 정씨 가문의 개인 묘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일반적인 왕릉의 경우 능 주변 10리 이내에는 민가 및 묘가 정리되기 때문에 사릉 같은 경우는 사후 추존된 왕릉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한편 [[중종(조선)|중종]]대에 당시에는 노산군인 단종의 묘지와 봉분을 정비하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는 등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종 16년([[1521년]]) 사망한 정순왕후는 대군 부인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이후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이 복위 및 추존되면서 정순왕후도 복권되었고 그녀의 무덤 또한 왕릉인 [[사릉]]으로 승격되었다. 능호에는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한 점을 담아 생각할 사(思)가 들어갔는데 참으로 그녀의 일생에 걸맞는 능호라 할 수 있다. === 기타 === 여담으로 사릉의 소나무들은 하나 같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능 주인인 정순왕후가 남편인 단종이 묻혀있는 동쪽의 영월 쪽을 바라봐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사후라도 부부를 함께 이어주자는 뜻에서 1999년 4월 9일 사릉의 소나무 한 그루를 영월 장릉으로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이름을 붙여주었다. --2021년에 실제 방문해서 보았는데 동쪽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인근에 [[광해군묘]], [[성묘(공빈김씨묘)|성묘]]([[공빈 김씨]]), 안빈묘([[안빈 이씨]])가 있으며 사릉 관리소에서 같이 관리하고 있다. 연계노선은 시내버스로는 [[남양주 버스 23]], [[남양주 버스 55]], [[남양주 버스 땡큐30]], [[남양주 버스 땡큐60]]이 있으며, 마을버스는 [[남양주 버스 64]], [[남양주 버스 땡큐20]]이 있다. '''세계유산조선왕릉사릉.송능2리적성골입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이름과는 달리 [[사릉역]]보다 [[금곡역(경춘선)|금곡역]]에서 접근하기 용이하므로 방문시 참고할 것. == 중국황릉 == === [[명나라]] 16대 황제 [[숭정제]]가 안장된 사릉(思陵) === 思陵. 제 16대 황제 의종 숭정제의 능. 이 시기의 명나라는 이미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 숭정제의 무덤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북경이 함락당하였고 숭정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숭정제와 황후 주씨의 시신을 전 귀비의 무덤으로 쓰려고 한 묘역에 합장하였고 때문에 명십삼릉 중 규모가 가장 작고 부장품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들어선 [[청나라]]도 숭정제의 무덤을 새로 만들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사릉은 명십삼릉의 마지막 능이 되었다. 사실 숭정제의 무덤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명나라가 멸망한 뒤 청나라 황제들이 안장되면서 [[청동릉]]이 되었다. [[분류:조선왕릉]][[분류:남양주시의 문화재]][[분류:경기도의 무덤]][[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중국황릉]][[분류:숭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