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rgba(50%, 50%, 50%, 30%) 0%, transparent)" {{{+1 {{{#000000,#e5e5e5 ''' 독일의 축구감독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illibald Kreß2.jpg|width=100%]]}}} || ||<-2> {{{#000000,#e5e5e5 ''' 이름 ''' }}} || {{{+1 '''빌리발트 크레스'''}}}[br]'''Willibald Kreß''' || ||<-2> {{{#000000,#e5e5e5 '''출생'''}}} ||[[1906년]] [[11월 13일]] [br]{{{-1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헤센나사우]]주 [[프랑크푸르트]] [[독일 제국|[[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8]]]] [[프로이센 왕국|[[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width=28]]]]}}} || ||<-2> {{{#000000,#e5e5e5 '''사망'''}}} ||[[1989년]] [[1월 27일]] (향년 82세) [br]{{{-1 [[독일]] [[헤센]] 주 [[기센]]}}} || ||<-2> {{{#000000,#e5e5e5 ''' 국적 ''' }}} ||[[독일]] [[독일|[[파일:독일 국기.svg|width=28]]]] || ||<-2> {{{#000000,#e5e5e5 ''' 신체 ''' }}} ||183cm / 75kg || ||<-2> {{{#000000,#e5e5e5 ''' 직업 ''' }}} ||축구선수([[골키퍼]] / ^^은퇴^^)[br][[축구 감독]] || ||<|2> {{{#000000,#e5e5e5 ''' 소속 ''' }}} || {{{#000000,#e5e5e5 ''' 선수 ''' }}} ||로트바이스 프랑크푸르트 (1922~1932)[br][[FC 뮐루즈]] (1932~1933)[br]'''[[드레스드너 SC]] (1933~1944)'''[br][[FSV 프랑크푸르트]] (1945~1949) || || {{{#000000,#e5e5e5 ''' 감독 ''' }}} ||[[FSV 프랑크푸르트]] (1947~1949)[br][[FSV 프랑크푸르트]] (1952~1956)[br][[보르마티아 보름스]] (1957~1959)[br][[부퍼탈 SV]] (1959~1961) || ||<-2> {{{#000000,#e5e5e5 ''' 국가대표 ''' }}} ||16경기^^([[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 / 1929~1934)^^ || [목차]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선수 생활 === ==== 클럽 ==== ===== 로트바이스 프랑크푸르트 ===== 어린 시절 [[문제아]] 수용 시설에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던 크레스는 축구와 인연을 맺으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데뷔할 때 크레스는 인사이드 포워드였고 16살에 1군팀에 데뷔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로트바이스 프랑크푸르트는 지역에서 손꼽히는 강팀 중 하나였다. 그리고 1926년에 크레스는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하였다. ===== FC 뮐루즈 ===== 1932년 크레스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프랑스의 FC 뮐루즈로 팀을 옮겼다. 하지만 프로화가 되던 프랑스 축구계와는 다르게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던 [[독일 축구 연맹]]은 '전문 도박꾼'이라는 이유로 1년간 크레스의 선수 자격을 정지시켜버렸고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 축구 연맹]]이 이 결정에 동조하는 바람에 크레스는 [[알자스-로렌|알자스]]에서 친선 경기 하나밖에 뛰지 못하였다. 크레스의 회고에 의하면 로트바이스의 동료들에게는 돈 때문에 파업을 하고 클럽을 버렸다는 식으로 매도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디프테리아]]까지 앓게 되며 출전을 거의 못한데다 1000제국 마르크의 벌금까지 내야했다고 한다. 1년 후 독일로 다시 돌아가게 되자 크레스는 대표팀 동료 [[리하르트 호프만]]의 설득으로 원소속팀 대신 [[작센|작센주]]의 드레스드너 SC로 이적하게 된다. ===== [[드레스드너 SC]] ===== 당시 드레스덴에는 [[헬무트 쇤]] 같은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고 가울리가[* [[나치 독일]] 시기 최상위 지역리그. 여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할 수 있었다.] 작센에서 6회나 우승한 작센 지방의 강팀이 되었다. 크레스가 입단한 첫 시즌부터 드레스드너는 골득실차로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조별예선에서 [[1. FC 뉘른베르크]]에 반대로 골득실에 2위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드레스드너는 그 이후에 독일 축구 챔피언십과 [[DFB-포칼|참메르포칼]]에서 각각 2회의 우승을 차지하며 독일 전국에서 통할말한 전력임을 증명하였고 크레스는 이 때마다 항상 뒤에서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제2차 세계 대전|2차 대전]]때 크레스는 V로켓 보안 부대에서 복무했다. ===== [[FSV 프랑크푸르트]] ===== 2차 대전이 끝나고 크레스는 잠시 감옥살이를 했고, 7월에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38살의 노장 골키퍼는 FSV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여 1947년에는 2경기 연속 [[페널티 킥]] 선방을 보여주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4시즌 동안 93경기에 더 출전했다. 크레스의 마지막 경기는 1949년 5월의 [[VfB 슈투트가르트]]전이었고 이 경기를 끝으로 27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 크레스는 1929년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되어 그의 우상이던 [[하인리히 슈툴파우트]]를 만나게 되었다. 크레스가 자신의 이름을 독일팬들에게 알리게 된 계기는 1930년 5월의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와의 시합이었다. 시합은 3대3으로 비겼지만 크레스의 플레이는 잉글랜드와 독일 팬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930년 슈툴파우트의 대표팀 은퇴 이후 독일 대표팀의 골키퍼진의 주전 경쟁 구도는 처음에는 크레스, [[한스 야코프|야코프]]간의 경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크레스의 프랑스 이적으로 인한 선수 자격 정지로 인해 [[프리츠 부흐로|부흐로]]가 새로 경쟁에 끼어들면서 다른 경쟁 체제가 만들어졌고, 크레스가 1934년 1월에 다시 대표팀에 복귀하면서 3파전으로 바뀌었다. 대표팀 감독 [[오토 네르츠|네르츠]]는 결국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월드컵]]에 3명의 골키퍼를 모두 데려갔다. 처음 네르츠의 선택은 크레스였고 그는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라운드#s-1.7|1라운드]],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8강 이후#s-1.4|8강전]]에서 모두 독일의 골문을 지켰다. 하지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라운드#s-2.2|준결승전]]에서 크레스는 엄청난 부진을 보이며 [[올드르지흐 네예들리]]에게 [[해트 트릭]]을 내준 끝에 1대3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결국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8강 이후#s-3.1|3,4위전]]에서 야코프로 골키퍼가 교체되었다. 크레스는 이후 드레스드너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 감독 생활 === 1947년부터 크레스는 [[FSV 프랑크푸르트]]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에 선수에서 은퇴한 후로는 대표팀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의 휘하에서 축구 아카데미와 헤센 주 축구 연맹에서 강사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52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더비 매치에서 패배하고 잘린 율리우스 투르나우어의 후임으로 4년 더 FSV를 지휘했으며 그 이후에는 [[보르마티아 보름스]]와 [[부퍼탈 SV]]에서 감독을 맡았다. 부퍼탈 감독 생활을 마무리 한 이후에는 주로 아마추어팀 감독과 축구 강사직을 수행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볼에 대한 감각이 좋은 골키퍼. 우아한 플레이 스타일로 schöne Willibald(아름다운 빌리발트)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크레스는 리하르트 호프만, [[헬무트 쇤]] 등과 함께 드레스드너를 대표하는 레전드로 대접받고 있으며 유럽 무대로 범위를 넓혀도 스페인의 [[리카르도 사모라|사모라]], 이탈리아의 [[잔피에로 콤비|콤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플라니치카]],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하이덴|하이덴]] 등과 더불어 당대 유럽 최고급 골키퍼로 이름을 남겼다. > 그는 골라인에만 붙어서 플레이하지 않았고 말 그대로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관리자였다. 위기 상황에서 실수가 적었고 결정적인 개입으로 상황을 끊어냈다. 빌리발트는 자신의 역할을 필드의 열한 번째 선수로 활용했다. >---- > [[헬무트 쇤]] > 내가 크레스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대표팀에 빨리 자리를 잡는게 쉽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우아한 게임, 뛰어난 위치 선정, 필드 플레이어들을 이끄는 능력은 자극을 주었다. >---- > [[한스 야코프]] == 뒷이야기 == * 크레스의 대표팀 복귀전은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전이었다. == 수상 == === 클럽 ===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2회: 1943, 1944(드레스드너 SC) * [[DFB-포칼|참메르포칼]] 우승 2회: 1940, 1941(드레스드너 SC)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40(드레스드너 SC) * 가울리가 작센 우승 6회: 1934, 1939, 1940, 1941, 1943, 1944(드레스드너 SC) === 국가대표 === * [[FIFA 월드컵]] 3위 1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 [각주] [[분류:1906년 출생]][[분류:1922년 데뷔]][[분류:1949년 은퇴]][[분류:1989년 사망]][[분류:프랑크푸르트 출신 인물]][[분류:독일의 축구선수]][[분류:독일의 축구감독]][[분류:FSV 프랑크푸르트/은퇴, 이적]][[분류:드레스드너 SC/은퇴, 이적]][[분류:FSV 프랑크푸르트/역대 감독]][[분류:보르마티아 보름스/역대 감독]][[분류:선수 겸 감독/축구]][[분류:부퍼탈 SV/역대 감독]][[분류:독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