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김좌진)]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3 {{{#ffffff 북로군정서 {{{-2 北路軍政署 }}}}}}}}}'''}}} || || '''{{{#fff 활동시기}}}''' ||[[1919년]] ~ [[1921년]] || || '''{{{#fff 총재}}}''' ||[[서일]] || || '''{{{#fff 사령관}}}''' ||[[김좌진]] || || '''{{{#fff 주요 전적}}}'''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 [목차] [clearfix] == 개요 == '''{{{+5 北路軍政署}}}''' 1919년 북간도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 == 결성 == 북로군정서는 1911년에 조직된 [[대종교]] 계통의 항일운동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이 전신이 되어 발족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북간도에서 대종교 계열의 중광단을 모체로 공교회[* 孔敎會. 유교 계열의 단체이다. 공교회는 구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며 복벽주의 성향을 띤다.] 등의 단체가 참여하여 대한정의단이 결성되었고, 대한정의단 산하에 무장투쟁을 위한 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군정회는 군사 지도자로 [[서일]], [[김좌진]] 등을 초빙하여 군사훈련에 주력하였다. 대한군정회에 참여했던 김좌진은 신민회 회원들과 교류하고 공화주의 성향이었기 때문에 복벽주의 성향을 띤 공교회 계열 회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후 대한정의단 내부에서 공교회 계열 회원들이 이탈하였고, 1919년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 조직을 통합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고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하는 대한군정부가 조직되었다. 이후 대한군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로 조직을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였다.[* 다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있었고, 북로군정서는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접적 지휘는 불가능했다.] == 활동 == 북로군정서는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는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제에 대승하였다. == 와해 ==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간도 참변]]을 일으켜 간도의 양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는 다른 만주의 항일독립군들과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와 소련의 경계지대인 밀산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독립군들이 통합하여 서일을 총재로 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고, 대한독립군단은 일단 소련의 자유시로 향했다. 여기서 서일은 자유시로, 김좌진은 회군하여 만주로 향했는데 그뒤 1921년에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여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북로군정서도 큰 타격을 입었다. 김좌진은 이후 자유시 참변으로 흩어진 대원들을 모아 다시 독립군을 조직했지만, 전과 같은 독립군단은 편성되지 못했고, 1930년 암살자 박상실이 쏜 총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분류:1919년 설립]][[분류:1921년 해체]][[분류:김좌진]][[분류:한국의 독립군]][[분류:문화 통치기/단체]][[분류:한중관계]][[분류:한소관계]][[분류:만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