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씨 || [[부여(성씨)|부여(扶餘)]] || || 이름 || 준(準) || || 국적 || [[당나라]] || || 관직 || 삭방기장(朔方騎將) [br] 예왕부사마(澧王府司馬)[* 당나라 예왕부의 사마(司馬).] || || 생년 || 미상 || || 몰년 || 미상 || [목차] == 개요 == >[원화] 12년(817) 젠뽀가 죽었다.[* 기록 오류인데, 당시 젠뽀 치데송젠은 [[815년]]에 사망했다.] 사신 논걸염(論乞髯)이 와서 (알리니), 우위장군(右衛將軍) 오중기(烏重玘)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단균(段鈞)을 보내 조문했다. 가려가족(可黎可足)이 젠뽀에 등극했다. 오중기(重玘)가 부여준(扶餘準), 이참(李驂)과 함께 돌아왔다. '''부여준(準)은 동명(東明)[* 660년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세운 5개의 도독부 이름 중 하나이다.] 사람으로, 본래 삭방기장(朔方騎將)이었고''', 이참(驂)은 농서(隴西) 사람으로 정원(貞元) 초에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구해 돌아올 수 있었다. 조를 내려 부여준은 예왕부사마(澧王府司馬)로, 이참은 가왕우(嘉王友)로 삼았다. >- 신당서 권 196 상 토번전 [[당나라]]의 인물. 부여씨인 점을 볼 때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백제 유민 출신의 장수인 [[흑치상지]]처럼 대토번 전선에서 복무했다. == 생애 == 787년 [[당나라]]와 [[토번]](티베트)은 평량에서 회맹을 가지게 되었는데, 토번이 회맹을 깨트리고 당군을 공격했다. 이 때 당군은 대패하고 60여명의 인사들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부여준 역시 이 때 토번의 포로로 잡혀 선주(鄯州)[*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칭하이성]] [[시닝시]] 일대로 비정된다.]에 구금당하게 되었다. 당시 부여준의 관직은 대장, 열장(列將)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817년 귀환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삭방 지역의 기병대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부터 30년 뒤, 817년 [[토번]]으로 보내진 우위장군 오중기, 단균이 돌아올 때 부여준은 이참과 함께 당으로 귀환하게 된다. 당나라는 부여준을 예왕부사마(澧王府司馬)로 임명했다. 예왕부사마로 임명한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30년 간 구금 상태 후 풀려난 점을 보면 이미 당으로 귀환했을 때 노령의 나이었기에 귀환 후 머지않아 사망했을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 기타 == 18세기 [[청나라]] 시기 편찬된 《고금도서집성》에도 등장한다. 정확히는 [[무왕]], [[의자왕]]과 함께 부여씨 인물로 당나라의 무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헌데 부여씨의 연원을 서술할 때, 오나라 부개왕(夫概王)이 초나라로 도망친 뒤, 그의 아들이 초나라에서 부여를 씨로 삼았다는 명대에 저술된 《풍속통》의 기록을 대고 있다.[*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선산고》에서 《풍속통》에 등장한 기록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만 《오주연문장선산고》에는 부개왕 일화는 소개하고 있지만, 부여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부여태비]], [[사타충의]], [[흑치준]], [[물부순]], 예소사, 예인수, 난원경 등과 함께 8세기에 당나라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몇 안되는 백제계 유민이다. 위의 인물들의 생존시기가 8세기 전반에 끝나는 점을 고려하면,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에 등장한 백제계 당나라인이기도 하다. 부여준과는 상관없지만 2010년 방영된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계왕]]이 '부여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 출처 ==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17_0216_0680#self|동북아역사재단 중국정사조선전]] [[분류:백제의 유민]][[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