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근대사격제도)] [include(틀:신궁(신토))] ||<-2> {{{#FFF {{{+1 '''부여신궁'''}}}[br][ruby(扶, ruby=ふ)][ruby(餘, ruby=よ)][ruby(神, ruby=じん)][ruby(宮, ruby=ぐう)]}}} || ||<-2> [include(틀:지도, 장소=부여 삼충사, 너비=100%, 높이=100%)] || || {{{#FFF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br](忠淸南道扶餘郡扶餘面)[br]([[신자체]]: 忠清南道扶余郡扶余面)[br](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 || {{{#FFF '''제신(祭神)'''}}} || [[오진 덴노]][br][[진구 황후]][br][[고교쿠 덴노|사이메이 덴노]][br][[덴지 덴노]] || || {{{#FFF '''사격(社格)'''}}} || [[근대사격제도|관폐대사]](官幣大社) || || {{{#FFF '''창건'''}}} || 미진좌(未鎭座)[br][[1940년]]([[쇼와 시대|쇼와]] 14년) 6월 30일 착공 || || {{{#FFF '''해체'''}}} || [[1945년]] 11월 17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부여신궁(扶餘神宮)'''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에 창건될 계획이었던 [[신사(신토)|신사]]이다. 사격은 관폐대사(官幣大社)로 예정되어 있었다. == 제신 == 제신은 [[오진 덴노]]와 [[진구 황후]], [[고교쿠 덴노|사이메이 덴노]]와 [[덴지 덴노]]로 정해져 있었다. 고대 일본이 [[백제]]와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옛 백제의 수도 [[부여군|부여]]에 한반도 삼국과 관계가 깊은 천황 및 황후를 신으로 모시는 신궁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오진 덴노와 진구 황후는 서기 200년에 있었다는 이른바 '삼한정벌' 때문이었다. 사이메이 덴노와 덴지 덴노는 663년 [[백강 전투]]와 관련되어 있었다. 전부 한반도에 '군을 파병했던' 인물들이었다. == 건축 == >조선총독부에서는 전부터 백제의 도읍으로서 번영하였고 또 내지와 가장 인연이 깊어 많은 황실의 유적까지 있는 충청남도 부여의 땅을 선택하여 부여신사를 창립하기로 되었는데, 천황폐하께서 그 뜻을 들으시고 15일 특히 사호를 부여신궁, 사격을 관폐대사에 열하신다고 분부하셨다. 이 신궁은 [[오진 덴노]], [[사이메이 덴노]], [[덴지 덴노]], [[진구 황후]]를 모시는 것으로써…(중략) 백제의 고도인 부여의 땅에 약 20만 평의 신역에 본전 이하 제 건물의 조영에 착공할 예정이다. >----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4963650&from=신문%20검색|관폐대사 부여신궁 작일 창립을 분부, 『매일신보』, 1939.6.16.]] 일제는 1939년 6월 15일 [[쇼와 덴노|히로히토]] 천황에 의해 관폐대사 부여신궁의 사격과 이름이 정해진 것을 계기로, [[부여군]]에 부여신궁을 짓기로 결정했다.[* 식민지 업무를 담당하던 척무성(拓務省) 고시 제2호(1939년 6월 16일 발행 관보 3732호)] 1940년 5월에는 총독부 주관으로 부여신궁조영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본전 등의 형식을 확정하고, 공사비 3백만 원으로 22만 평의 부지에 학생과 청년, 관공서 직원 등 9만여 명을 동원하여 정지작업을 하기로 했다. 부여신궁은 [[백제]]의 [[사비성|사비]] 시대(538~660) 왕성 가까이 있는 [[부소산성]] 안쪽에 터를 닦았다. 1940년 6월 30일, 각지에서 청년들을 동원하여 근로봉사를 시작했다. 1941년에는 [[이광수(소설가)|이광수]], [[김동환(시인)|김동환]], [[백철]], [[유치진]] 등의 문화예술인들이 근로보국대를 꾸려 근로봉사에 다녀와서는 일제의 프로파간다 성격을 띠는 기행문과 문학 작품들을 남겼다. 근로봉사로 포장된 노역에는 약 3년간 조선 전역으로부터 11만 명이 동원하여 1943년에 기초공사를 완료했다. ||[[파일:byjingu01.jpg|width=500]]|| || 부여신궁 완공 예상도 ||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심 건물지의 규모는 7천 평가량이었다. 전체적인 구조는 교토의 [[헤이안 신궁]]과 비슷했고, 건물은 붉은 칠과 금칠로 장식해 장엄한 분위기를 낼 계획이었다. 건물에 사용될 목재는 일본에서 공수한 것을 강경에 있는 제재소에서 가공한 다음 현장으로 운반했다. 1944년 11월에는 [[상량식]]을 진행했다. 부여신궁 본전은 1947년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패망으로 계획의 80% 정도에서 중단되었다. 당초 부여신궁 조영은 5개년 계획으로, 1939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943년 10월에 신령을 자리에 모시는 진좌제(鎮座祭)를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인력과 물자 모두 부족해지자 공사가 지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신도(神都) 건설’이라 하여 부여신궁을 중심으로 부여군을 아예 광역도시로 만들고자 야심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시대의 흐름은 부여신궁이 완공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한창 공사 중이던 부여신궁은 진좌제도 하지 않았으므로 1945년 [[8.15 광복|광복]] 이후 신령을 돌려보내는 승신식 없이 바로 해체되었다. 만들다 만 부여신궁 건물은 부여청년동맹원들이 파괴하였다. 그 몇 해 전 [[충청남도청]] 이전에 든 비용이 당시 돈으로 16만 원이었는데, 부여신궁의 총공사비는 24만 원이었다. 오늘날 부소산 삼충사(三忠祠) 자리가 부여신궁을 짓던 터였다. == 여담 == * 부여신궁은 제관들의 생활공간과 제례공간이 언덕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두 공간은 지하도로 연결되었는데, 해방 후 지상 구조물은 파괴되었지만 이 통로는 남아 있다. 이 공간의 존치 여부를 놓고 부여군이 고민 중이다.[[https://n.news.naver.com/article/056/0011338015?sid=102|80년 된 일제 신궁 잔재…철거 vs 존치 고민]] * 1942년에 부여에서 출발해 [[조선신궁]]까지 달리는 릴레이 마라톤 대회가 있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이자 이 대회를 주최한 [[매일신보]]가 내세운 취지는 한마디로 일제가 벌인 전쟁에 징집될 조선 청년들의 체력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각 도에서 대표로 나선 선수들은 4월 26일에 부여로 모였다. 첫날은 수련을 하고 둘째 날에는 부여신궁 공사에 근로봉사 명목으로 동원된 후, 셋째 날부터 1박 2일간 약 250 km를 나누어 달렸다. 구간은 부여~논산~대전~천안(1박)~오산~수원~영등포~조선신궁이었다. 대회 종료일인 4월 29일은 쇼와 천황의 생일([[천황탄생일|천장절]])이었다. 이 대회는 이듬해인 1943년에도 열렸다.[[https://www.minjok.or.kr/archives/86297|#]] * 부여신궁 건설과 더불어 부여군을 도시로 만들고자 정비작업을 하였다. 부여군 시가지 모습을 보면 규모에 비해 도로망이 바둑판 형태로 상당히 잘 정비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도로에 깔기 위한 석재들을 모았는데, 광복 이후 그 자재들을 처리하지 않고 한쪽에 쌓아두었는데, 1948년 당시 국립박물관 부여분관 [[홍사준]] 관장을 비롯한 학자들이 발견한 것이 [[사택지적비]]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조선신궁, version=408)] [[분류:신궁(신토)]][[분류:일제강점기]][[분류:대한민국의 없어진 건축물]][[분류:부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