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십육국춘추)] ||<-2> '''서현후(西縣侯)[br]{{{+1 苻雅 | 부아}}}''' || || '''시호''' ||불명 || || '''작위''' ||서현후^^(西縣侯)^^ || || '''성''' ||부^^(苻)^^ || || '''휘''' ||아^^(雅)^^ || || '''자''' ||불명 || || '''생몰''' ||불명 || || '''출신'''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황족. 세조 선소황제 [[부견]]의 먼 친척. == 생애 == 권모술수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었고, 씩씩하고 굳센 성격을 지니고 있어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양장(良將)의 재주가 있다 칭찬하였다. 황제 [[부생]] 재위기에 우위장군에 제수받았다. 영흥 원년(357년) 6월, 선소제 [[부견]]이 천왕으로 즉위하자, 부아는 서현후(西縣侯)에 봉해지고 좌위장군으로 옮겨졌다. 건원 4년(368년) 3월, 선소제 부견이 5공의 난을 진압히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면서 무위장군 왕감(王鑒), 녕삭장군 [[여광(후량)|여광]]에게 군사를 주어 조공 부쌍(苻雙)과 연공 부무(苻武)를 토벌케 하고, 부아와 좌금장군 두충(竇衝)에게 우림군 7,000기를 맡겨 그 뒤를 잇게 하였다. 건원 4년(368년) 7월, 전진군이 상규(上邽)를 함락시켜 부쌍과 부무를 참수하고, 선소제 부견의 명령으로 그 처자는 사면해주었다. 이후 부아는 진주(秦州)자사에 임명되어 상규를 진수하였다. 건원 7년(371년) 3월, 사지절, 도독진진량옹4주제군사(都督秦晉涼雍州諸軍事), 진주목에 임명되었다. 이때 [[구지]]가 전진에 대항하자, 선소제 부견은 부아에게 명령을 내려 구지공 양찬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부아는 양주(梁州)자사 양안(楊安), 병주(并州)자사 서성(徐成), 우림좌감 주융(朱肜), 양무장군 [[요장]] 등과 70,000 군사를 이끌고 구지를 공격하였다. 건원 7년(371년) 4월, 부아가 취협(鷲峽)에 이르니, 구지공 양찬이 50,000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부아를 막았고, [[동진]]의 양주(梁州)자사 양량(楊亮)도 독호 곽보(郭寶), 복정(卜靖)에게 기병 1,000기를 주어 구지군을 도왔다. 부아는 취협에서 양찬과 싸워 대파하고 적군 3 ~ 4할을 전사시켰고, 아울러 동진이 보낸 구원군도 몰살하여 곽보, 복정을 모두 패사시켰다. 패잔병을 수습해 도망치던 양찬이 무도(武都)에 이르렀을 때, 그의 부하 양타(楊他)가 자신의 아들 양석(楊碩)을 은밀히 부아에게 보내 내응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를 포박한 뒤 전진군에게 항복하였다. 부아는 손수 양찬의 포박을 풀어주고, 그를 장안(長安)으로 호송하였다. 이로써 무도와 음평(陰平) 등이 모두 평정되었고, 구지국이 멸망했다는 소문을 들은 [[토욕혼]]은 전진에게 조공을 바치며 복종하였다. 이후의 기록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태평어람]]》에 따르면 중앙으로 돌아가 상서령을 지내던 중 건안 연간에 사망하였고, 시호는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정황상 [[비수대전]] 이전의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족]][[분류:몰년 미상]][[분류:톈수이시 출신 인물]][[분류: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