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일본 덴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0%, #BE0026 20%, #BE0026 80%, #AF001F); color: #dca600" '''일본 제25대 대왕[br]{{{+1 부레쓰 덴노}}}[br]武烈天皇'''}}}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무열천황릉.jpg|width=100%]]}}} || ||<-2> {{{#dca600 {{{-2 가타오카노이와쓰키노오카노키타릉 전경}}} }}} || || '''출생''' ||[[489년]] || ||<|2> '''사망''' ||[[507년]] [[1월 7일]] (향년 18세) || ||[[왜국|왜]] [[나라현]] 박뢰열성궁[br](現 [[일본]] [[나라현]] [[사쿠라이시]]) || || '''능묘''' ||가타오카노이와쓰키노오카노키타릉([ruby(傍丘磐坏丘北陵, ruby=방구반배구북릉)]) || ||<|4> '''재위기간''' ||'''{{{#dca600 왜국 왕태자}}}''' || ||[[495년]] [[2월 13일]] ~ [[498년]] [[12월]] || ||'''{{{#dca600 제25대 대왕}}}''' || ||[[498년]] [[12월]] ~ [[507년]] [[1월 7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부왕 [[닌켄 덴노]][br]모후 가스가노이라츠메 황후 || || '''형제자매''' ||1남 7녀 중 장남 || || '''배우자''' ||카스가노이라츠메 황녀 || || '''관저''' ||쿠하츠세노나미키노미야([ruby(泊瀬列城宮, ruby=박뢰열성궁)]) || || '''한풍 시호''' ||'''부레쓰 덴노([ruby(武烈天皇, ruby=무열천황)])'''[* 한글로는 무열천황. 공교롭게도 [[신라]]의 제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과 [[시호]]가 같다(태종은 [[묘호]]이다). 물론 시호가 올려진 순서는 신라가 앞선다. 그리고 후술할 부레쓰 덴노의 악행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 || '''화풍 시호''' ||<(> {{{#!wiki style="margin: 0 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5px -11px -11px" ||소박뢰치초료존[br](小泊瀬稚鷦鷯尊)[* 오하쓰세노와카사자키노미코토][* 《일본서기》(日本書紀)] || ||소박뢰치초료천황[br](小泊瀬稚鷦鷯天皇)[* 오하쓰세노와카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 《일본서기》(日本書紀)] || ||소장곡약주명(小長谷若雀命)[* 오하쓰세노와카사자키노미코토][* 《고사기》(古事記)]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제25대 [[천황]]으로 '''일본판 [[후폐제(유송)|후폐제]]'''라 할 수 있다. == 생애 == 《일본서기》에는 오하쓰세노와카사자키노미코토(小泊瀬稚鷦鷯尊) 또는 오하쓰세노와카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小泊瀬稚鷦鷯天皇)로, 《고사기》에는 오하쓰세노와카사자키노미코토(小長谷若雀命)로 기록했다. '''오하쓰세와카'''(泊瀬)는 제21대 [[유랴쿠 덴노]]의 시호에도 있는데, 유랴쿠 덴노의 '''다이아쿠 덴노'''(대악천황) 일화 때문에 이들은 사실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이 사람의 진명 기재가 없다는 점도 가상인물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물론 부레쓰 덴노가 유랴쿠 덴노의 외손자이자 사위이기 때문에 시호를 물려받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기는 하다. 이외에도 화풍 시호에 있는 '鷦鷯'는 성군으로 이름난 제16대 [[닌토쿠 덴노]]의 시호에서도 볼 수 있는 글자이다. 제24대 [[닌켄 덴노]]의 황자로 어머니는 [[유랴쿠 덴노]]의 딸 가스가노오이라쓰메히메미코(春日大郎皇女)였다. 황후는 《일본서기》에만 가스가노이라츠메(春日娘子)라는 이름이 기재되었다. 태자 시절에는 모노노베노 아라카이(物部麁鹿火)의 딸인 가게히메(影媛)와 혼약을 맺으려 했으나, 가게히메는 이미 오오미(大臣)인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真鳥)의 아들 헤구리노 시비(平群鮪)와 맺어진 사이였다. 게다가 쓰바이치(海柘榴市)의 우타가키(歌垣)에서 벌어진 노래 시합에서 헤구리노 시비가 자신을 이기자, 격노해서 오오토모노 가나무라(大伴金村)를 시켜 시비를 나라 산(乃楽山)에서 죽이고, 같은 해 11월에는 그의 아버지 헤구리노 마토리도 잡아 죽인 뒤 12월에 오오키미('대왕')로 즉위했다. 오오키미로 즉위한 뒤에는 오오토모노 가나무라를 오오무라지(大連)로 삼았다. === 일본판 [[충혜왕]], [[걸왕|걸]][[제신|주]] === 오오키미로서 저질렀다는 악행이 어마어마하다. >2년(499) 가을 9월,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라서 그 태를 보았다. >3년(500) 겨울 10월,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 (그 손으로) 산마를 캐게 했다. >4년(501) 여름 4월,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고, 그 사람을 나무 위에 올라가게 한 다음, 나무 밑동을 베어 넘어뜨려서 (그 올라간 사람이) 떨어져 죽는 것을 보면서 즐겼다. >5년(502년도) 여름 6월, 연못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둑을 뚫어서 넣어둔 통 속으로 사람을 엎드리게 해서 들여보내고, 밖으로 흘러 나오는 것을 [[삼지창]]으로 찔러 죽이면서 즐겼다. >7년(504년도) 봄 2월, 사람을 나무 위에 올라가게 해서 [[활]]로 쏘아 떨어뜨리고 웃었다. >8년(505) 봄 3월, 여자를 벌거벗겨 판자 위에 앉히고, [[말(동물)|말]]을 끌어다 [[수간]]시켜서 [[음부]]가 젖은 자는 죽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관의 노비로 삼으면서 즐겼다. > >이때에 이르러 연못을 파고 동산을 쌓으며, 새와 짐승을 가득 넣었다. [[사냥]]을 좋아하여 개를 달리게 하고 말을 시험하기를 무시로 하였으며, 큰 바람과 폭우도 가리지 않았다. 옷은 따뜻하여 백성의 추위를 잊었고, 음식이 맛있음으로 하여 천하가 굶주리는 것도 잊었다. 난쟁이와 광대를 많이 끌어들여 음란한 노래와 춤을 하게 하고, 기괴한 놀이를 벌이면서 음란한 말을 마음대로 하였다. 밤낮으로 여인과 술에 빠졌고, 비단으로 방석을 지으니, 무늬 고운 비단과 가벼운 비단을 입은 자가 많았다. 참고로 이 행동들이 모두 '''18살이 되기 전에 벌인 짓'''들이다. 사실이라면 빼도 박도 못할 [[사이코패스]]인 셈. 하지만 그 악행이라고 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고사기]]》에는 없고,《[[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에 [[케이타이 덴노]]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들의 행적을 부레쓰 덴노에게 뒤집어 씌웠을 가능성이 있다. === 죽음 === 재위 8년 만인 12월 8일(507년 1월 7일), 후사없이 사망했다. 《부상략기》, 《미즈카가미》(水鏡) 등에는 사망 당시 그의 나이가 18살이라고 적혔다. 젊은 나이(18살)에 죽어 자식이 없었다고 하며, 오오무라지였던 오오토모노 가나무라가 에치젠으로 가서 부레쓰 덴노와 혈연관계가 옅은 오호도(케이타이 덴노)를 데려다 다음 천황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사후에는 가타오카노이와쓰키노오카노키타능(傍丘磐坏丘北陵)에 묻혔다고 한다. == 가족관계 == * 아버지: [[닌켄 덴노]] * 어머니: 가스가노오이라쓰메 황녀(春日大娘皇女) * 황후: 카스가노이라츠메(春日娘子) - 《[[고사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 여담 == <[[동방영야초]]>에 등장하는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의 이지 보스전 두 번째 [[스펠 카드(동방 프로젝트)|스펠 카드]] 야부(野符) 「부레쓰 크라이시스(武烈クライシス)」의 유래이다. [[분류:천황]][[분류:489년 출생]][[분류:50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