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의 왕립 사찰)] [목차] == 개요 == 廣通普濟寺 [[고려]]시대에 세워진 [[개성시]]의 도심사찰. 다른 지역의 보제사와 구별하기 위해 풀네임인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충목왕 ~ 조선시대엔 연복사(演福寺)라고 불렸다. 거대한 5층 [[목탑]]이 있었던 사실로도 유명하며 [[흥왕사]]와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이었지만 현재는 사라져 터만 남았다. 유명한 절이지만 북한에 있어 연구는 커녕 발굴조차 못 하는 상황이다.[*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진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만 자유롭게 확인해볼 수 있는 상황인데, 그나마 이 비의 정확한 소재지도 2013년에서야 파악됐다.] 그래서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북한은 단독으로 보제사에 대해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으나,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남북 학술 교류가 모두 끊겼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최근 동향을 접할 수 없는 상황이다. == 명칭 == 가장 널리 알려진 사찰명은 보제사(普濟寺)로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를 줄인 것이다. 조선시대엔 연복사(演福寺)로 이름이 바뀌어 연복사로도 유명하다. 이 외에도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보제사는 천선원(天禪院)으로도 불린다고 기록했고, 고려도경은 보제사가 당사(唐寺)와 대사(大寺)로도 불린다고 기록했다. 오랜 역사와 큰 규모를 가진 절이기에 그 명칭과 별칭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 역사 ==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919년 [[태조(고려)|태조]]가 개경으로 천도하며 지은 10개의 사찰 중 하나라고 한다. [[정종(고려 10대)|정종]] 3년(1037)에 왕이 이 절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종(고려)|의종]]이 친동생 대령후를 내쫓을 때 자신을 막아설지도 모르는 어머니 [[공예태후]]를 이 사찰에 잠시 모셔 놓았다. [[명종(고려)|명종]] 대인 [[만적의 난]] 때는 노비군의 집결지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공민왕]], [[공양왕]] 등이 관심을 기울여 문수회(文殊會)나 담선회(談禪會) 등을 참관하기 위해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1391년에는 [[공양왕]]의 명으로 보제사 중창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이 공사비가 엄청나다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단청]] 공사만 남기고 중단되었다.[* 유학자들은 [[불교]]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조선]]이 개국한 이듬해인 [[태조(조선)|태조]] 2년(1393)에는 [[단청]]공사를 마치게 하고 목탑 위층에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중간에는 대장경을 보관하게 하였다.[* [[회암사]]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성계]]는 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태조 이후로 점점 숭유억불이 강화된 조선시대에는 결국 억압을 받았을 터. 16세기 무렵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화재 등을 겪고 결국 폐사지가 된 듯하다. == 사찰 구성 == === 규모 === 규모가 매우커서 당사(唐寺) 혹은 대사(大寺)로 불리었다. 건물이 1천여채나 되었으며 절 안에는 세개의 연못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승당과 법당은 100명의 인원을 수용하는 규모였다. === 가람 === 보제사의 가람 배치에서 특기할 점은 금당과 [[탑]]을 일직선 위에 건립하는 일반적인 평지 가람배치가 아니라 동쪽에 금당(나한보전)을, 서쪽에 탑을 나란히 배치하는 동전서탑(東殿西塔)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배치는 일본의 [[호류지]] 등[* 법기사(法起寺), 법한사(法翰寺)도 있다고 하는데..]에서만 볼 수 있었으나, 보제사 발굴 덕분에 한반도 사찰에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사실 호류지 자체가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절이었기에 한국에 이러한 양식이 있음은 예상된 바였다. == 사찰 건축물 == === 신통지문 === [[북송]] 승려 서긍이 개경 개성부에 파견된 뒤 쓴 기행문인 [[고려도경]]에 따르면 보제사의 중문(中門)은 신통지문이라고 한다. === 나한보전 === 고려도경에 따르면 사찰의 정전은 나한보전이라고 한다. 묘사에 따르면 나한보전은 왕궁[* 아마도 [[만월대|본궐]] 정전인 회경전(會慶殿)을 가리키는 듯 하다.]보다 더 웅장하였다 하며, 그 안에는 삼존불[*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나한상 500 좌를 배치하였다고 한다. 한남군 후작 [[최사위]] 묘지명엔 최사위가 보제사의 금당과 나한전 수축에 참여했다고 한다. === 선명전 === 宣明殿 제31대 [[공민왕]]이 30대 [[충정왕]]을 위해 만든 혼전이다. 재위 원년(1352년) 7월에 만들어졌다. === 도서관과 병원 === 부속건물인 2층의 장경전에는 당대 1만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당대 지식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혜가 보제사에 모여있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도서관]] 역할도 하였던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의료기관인 자비전[* 조선시대의 [[혜민국]]과 유사한 기관]도 있어 단순 사찰이 아닌 다양한 용도의 건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5층 목탑 === 나한전 서쪽에는 높이 200 척(약 60 m)이 넘는 5층 [[목탑]]이 있었고 뒤에는 법당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유호인]]의 기록 등을 보면 목탑 내부는 누각 구조라 사람이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 연복사 종 === [[파일:attachment/YBtemplebell.jpg|width=400]]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36호. 보제사(연복사)에 걸려있던 종이다. [[성덕대왕신종]], [[옛 보신각 동종]]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종이고 북한에 있는 종과 [[고려시대]]에 주조된 종들 중에서는 가장 큰 종이다.[* 종입 지름 1.9 m, 높이 3.12 m, 두께 0.23 m, 무게는 약 14톤이며, 동합금] 종의 형태나 장식의 수법이 상당히 낯선데, 원나라 기술로 만들어서 그렇다. 용, 봉황, 거북 등이 파도를 넘는 웅건한 모습을 조각하였다. 범종 겉면에는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원나라]] 종장(鐘匠)이 [[금강산]] 장안사에 와서 범종을 만들고 돌아가다가 충목왕과 [[덕녕공주]]에게 요청받아 주조하였다는 명문이 있다. 보제사의 물건 중 운좋게 살아남은 케이스로, 조선 명종 18년(1563)에 연복사의 화재 때문에 [[개성 남대문]]루에 옮겨 걸어 1910년까지 개성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용도로 사용했다. === 중창비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3가]] 40-1010 소재. 1394년에 [[권근]]이 이 절의 중창을 기록한 비석이다. 중창비의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만 남아 있는데, 네 마리 용이 쌍으로 어우러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졌다는 간략한 사실만 파악되었을 뿐 정확한 소재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가, 2012년 한 시민의 제보로 소재지가 파악되었다. 2013년 5월 2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 한강로3가 소재 [[철도회관]] 화단에 있다. == 관련 역사기록 == >광통보제사는 [[만월대|왕부]]의 남쪽 태안문(泰安門) 안에서 곧장 북쪽으로 백여 보의 지점에 있다. >절의 액자는 관도(官道)에 남향으로 걸려 있고, 중문의 편액은 ‘신통지문(神通之門)’이다.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만월대|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ㆍ문수(文殊)ㆍ보현(普賢) 세 상이 놓여 있고, 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맞은편에 거대한 종이 있는데 소리는 가라앉아 시원하지 못하다. >전례에 따라 예물의 나머지 말과 고려에서 정사와 부사에게 준 것 도합 2필에 백금 2근을 더해 향화(香花)와 과속[* 果蔌 과일과 채소.]의 비용으로 주고, 불사(佛事)를 하고 불승을 공양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몸소 가지 않고 다만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이하 삼절을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 > - 서긍의 [[고려도경]] 17권 '광통보제사'. >십천교를 지나 곧바로 가서 연복사에 이르렀다. >한 중앙에 우뚝 솟은 5층 누각이 온 성중을 압도하고 서 있는데, >창문과 기왓장에 저녁놀이 비친다.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다. >---- > - [[유호인]][* 조선 초 문인.]의 [[명산답사기]] 중 '송도기행' >사원과 사묘의 건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는 것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부터 부처를 섬김이 정성스러웠다. 성안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전각이 크고 웅장하면서, >높고 특출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있으니그 당시의 숭봉함이 지극하였음을 잘 알겠다. >---- > - [[권근]]의 '연복사중창기'. == 외부 링크 == * [[http://luckcrow.egloos.com/m/2070583|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3)- 1000칸의 대찰, 고려 광통 보제사 普濟寺. 까마구 둥지 이글루스 블로그]] == 같이보기 == * [[만적의 난]] * [[안화사]]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 [[현화사]] * [[황룡사]] * [[흥왕사]] [각주] [[분류:한국의 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