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알제리 보우사다.jpg]] 신시가지 한가운데의 바시르 이브라힘 모스크 ||[[파일:알제리 부사다 2.jpg|width=545]]||[[파일:부사다 알제리 5.jpg|width=378]]|| || 구도심에서 바라본 신도심 || 신도심 일대 || == 개요 == [[아랍어]] {{{+1 بو سعادة }}} [[베르베르어]] ⴱⵓ ⵙⵄⴰⴷⴰ [[영어]], [[불어]] Bou Saada [[알제리]] 북부의 도시. [[음실라]]에서 서남쪽으로 50km, [[젤파]]에서 동북쪽으로 80km, [[비스크라]]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인구는 14만명이고, 사막으로 향하는 관문 도시이다. 지명은 아버지를 뜻하는 보우 (아부 / 부)와 사다 (행복)의 복합어다. [[아부다비]]의 경우처럼 아랍에서 아버지나 어머니 (움 / 움무)가 붙은 지명은 함께 오는 물질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부다비는 '[[사슴]]이 있는 곳'이란 뜻이 된다. 같은 나라인 [[움 알쿠와인]]은 철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따라서 보우사다는 '행복이 깃든 곳'이란 의미이다. 동남쪽의 이웃 도시 벤 수루르는 '즐거움의 아들'이란 뜻으로 비슷한 느낌이다. 다만 역사적으로는 [[라구아트]], 비스크라와 함께 19세기 [[프랑스]]의 침공 당시 가장 가혹히 학살을 겪었고 현재도 공군기지와 감옥이 위치하여 과거와 달리 관광이 침체된 상태로 남아있다. 시가지는 두 암석 산지 사이를 흐르는 와디 보우사다를 따라 형성되어 있고, 수직에 가까운 바위산과 대추야자 숲이 조화를 이룬다. 역사적으로도 구도심인 크사르의 복잡한 골목과 남쪽의 깔끔한 근대 시가지가 조화되어 있고, 나스레딘 디네 박물관과 성채와 엘 아티크 모스크 등 사원들이 주요 볼거리이다. 전통적으로 장신구, 철제품, 카펫 등을 생산하고 파는 유목민들의 시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보우사디 칼이 유명했고, 현재까지도 특산품이다. 해발 1,330m의 고지대에 위치한 덕에, 비록 [[사막]]기후라 여름에 덥지만 겨울에는 0도 대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 역사 == ||[[파일:부사다 알제리 7.jpg|width=300]]||[[파일:알제리 부사다 3.jpg|width=652]]|| || 크사르 (구도심)의 고즈넉한 모습 || 19세기의 보우사다 || 일대에는 선사시대 바위 그림이 보이고, [[누미디아]] 시절에는 사냥터로 쓰였다. 그러다 15세기 슬리마니 벤 라베아와 시디 타메우르 벤 아흐메드 엘 파시 등이 본격적으로 와디 부사다 서안의 [[대추야자]] 숲을 끼고 도시를 건립하였다. 근대 이전 보우 사다는 [[유목민]]들의 정박지였고, [[양(동물)|양]]과 양모 등이 거래되었다. 다만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 산하 [[알제]] 총독령의 과도한 징세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며 점차 쇠퇴하였다. 그러던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침공 속에서 현지 부족들은 엘 아므리 벤 셰이헵의 지휘 하에 자차스 연맹을 결성해 저항하였다. 다만 1849년 엘 아므리는 프랑스와 싸우다 전사하여 조상인 시디 타메우르가 세운 엘 네클라 모스크에 안장되었다. 이후 도시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격렬한 저항에 대한 본보기로 어린이와 노약자까지 대거 학살하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아이를 성벽에 찧어 죽이고, 이에 엄마가 죽여달라 청하자 역시 죽였다고 한.다] 만행을 저질렀다. 보우 사다의 참극은 오아시스를 건너 각지에 알려졌고, [[라구아트]]에서 되풀이되었다. === 프랑스의 지배 === ||[[파일:디네 알제리.jpg|width=270]]||[[파일:알제리 부사다.jpg|width=656]]|| || [[무슬림]] 복장의 나스레딘 디네 || 프랑스 시절 크사르 서쪽 언덕에 세워진 성채와 시계탑 || 이후 [[프랑스]] 당국은 기존 도시 (크사르) 남쪽에 새로운 시가지를 세웠고, 셰이크 벤차비라의 2차 저항 역시 진압한 후 군대를 주둔시켰다. 식민 당국은 현지인들을 등용하면서도 기존 부족 문화를 말살하려 주력하였고, 1871년 북쪽의 모크라니 반란 후에는 현지인들의 땅을 몰수하였다. 동시에 [[유럽]]계 정착민들을 유치하려 노력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20세기 들어 보우사다는 [[알제리]]의 관광지 중 하나로 개발되어 바위산의 경관과 옛 크사르, 남쪽 엘 하멜의 아이트 아베스 왕국 시절 건립된 수피 라흐마니야 수도원 (자위야) 등을 보려는 여행객들을 유치하였다. 1930년대에 절정에 달한 관광업은 1940년대 [[2차 대전]] 들어 격감하였고, 1945년에는 역병까지 덮쳐 치명타를 맞았다. 역병 당시 부유했던 벤라므리 가문의 마클루피, 엘 아므리 형제가 사재를 털어 약을 구매하여 주민들에게 보급하는 의로운 모습을 보였다. 암울했던 [[프랑스]]와 원한이 많은 도시지만, 진심으로 현지인들의 존경을 얻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186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오리엔타릴스트 화가 알퐁스 에티엥 디네는 1884년 보우사다를 방문한 후 일대에 매력을 느꼈고, 여러 미술 대회에서 우승한 자금으로 1903년 시내에 집을 사서 매년 270일 가량 거주하였다. 마그레브 문화에 매료된 그는 10년 후 아예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름도 나스렛딘 디네로 개명하고 아내와 함께 핫즈([[메카]] 순례)까지 다녀왔다. 그의 진심에 감명한 현지인들은 1929년 12월 디네가 파리에서 사망하자 이듬해 1월 자체적인 장례를 거행하였고, 이때 무려 5천의 인파가 모였다 한다. 그가 30년 가까이 살았던 구도심 서쪽의 옛 집은 현재 나스레딘 디네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 현대 === [[알제리 독립전쟁]] 시기 보우사다의 현지인들은 FLN ([[민족해방전선]])과 원로 정치인 메살리 하지를 따르는 파벌로 나뉘었다. 프랑스는 후자의 대표인 모하메드 벨루니스를 후원하다가 1958년 그를 숙청하였다. 다만 [[프랑스]] 지배의 종식과 알제리의 독립 후에도 보우사다는 이름처럼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1970년대 부활의 조짐을 보이던 관광 산업은 1990년대 [[알제리 내전]]으로 재차 침체되었고, 전쟁 도중 무장 조직이 나스레딘 박물관에 방화하여 전소시키기도 하였다. 박물관은 전후에 복구되었다. 또한 전후에도 알제리 정부는 보우사다에 감옥을 세우고 북쪽 10km 지점에 있던 공항을 공군기지로 전환하는 등 관광업 부흥을 원하던 주민들의 염원을 무시하는 정책으로 불만을 사고 있다. == 갤러리 == [[파일:부사다 알제리 3.jpg|width=700]] [[파일:알제리 부사다 4.jpg|width=700]] [[파일:부사다 알제리 1.jpg|width=700]] 여러 개의 하라 (구역)와 라흐바 (광장)으로 이루어진 크사르 [[파일:보우사다 알제리.jpg|width=700]] ||[[파일:보우사다 알제리 2.jpg|width=355]]||[[파일:보우사다 알제리 1.jpg|width=304]]|| [[파일:알제리 보우사다 2.jpg|width=700]] 나스렛딘 디네 박물관 [[파일:보우 사다 알제리.jpg|width=700]] 엘 아티크 모스크 [[파일:부사다 알제리.jpg|width=700]] 성벽 [[파일:부사다 알제리 6 (2).jpg|width=700]] 알제리에서 보기 드문 물레방아 [[파일:알제리 부사다 7.jpg|width=700]] 와디 보우사다 ||[[파일:부사다 알제리 2.jpg|width=510]]||[[파일:알제리 부사다 5.jpg|width=272]]|| 케르다다 산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파일:알제리 보우사다 3.jpg|width=322]]||[[파일:알제리 부사다 1.jpg|width=540]]|| 전통 건축 [[파일:부사다 알제리 4.jpg]] 인근 산지 [[분류:알제리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