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양자역학)] [include(틀:양자역학)] [목차] == 개요 == '''보어-아인슈타인 논쟁(Bohr-Einstein Debate)'''은 [[양자역학]]의 여러 쟁점에 관하여 [[닐스 보어]]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벌인 일련의 논쟁이다. 아인슈타인이 날카롭고 정교한 사고실험을 내놓으면, 보어가 그것을 다시 기발한 방법으로 논파해내면서 초창기의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빠르게 성숙화되는 데에 기여하였다. == 고전 양자역학에서 == 어떤 물리적 양을 불연속적으로 파악하는 양자 역학의 시작은 복사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는데, 1900년 막스 플랑크는 흑체 복사의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빛이 흑체의 벽을 구성하는 원자와 상호작용하면서 양자적 단위의 에너지만을 교환한다는 양자 가설을 내놓았다. 이 가설을 발전시키고 물리학의 여러 영역에 적용시키려 한 것은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1905년 광전 효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양자 가설을 도입하고, 이어서 1907년 고체의 비열 문제(아인슈타인 고체 모델)를 통해 복사 이외의 영역에서 양자 역학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였다. 한편, 닐스 보어는 1913년 전자의 에너지 준위를 양자화한 보어 모델(Bohr model)을 도입하면서 양자 역학에 거대한 기여를 하였고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원자 모델을 적용하여 플랑크의 흑체 복사 공식을 보다 나은 방식으로 유도하고, 유도 방출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고전 역학의 프레임 안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기여들은 고전적 양자 역학(Classical quantum mechanics)을 이룬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견해 대립은 이미 이 고전 양자역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의 대립은 사실상 광양자 가설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문제의 경우 구도로 봤을 때는 사실 아인슈타인과 나머지 물리학계 전체의 대립으로 보아야 합당하다. 하지만 보어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마지막까지 광양자 개념을 반대하던 물리학자였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인슈타인은 광양자가 물리적 실재(physical reality)를 잘 반영한다고 본 반면, 보어를 포함한 나머지 물리학자들은 "실험적으로 옳더라도" 본질적인 해석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10여년 동안 거의 조롱에 가까운 비판을 받았는데, 일단 당시 물리학의 기준에서 입자성과 파동성은 당연히 구분되는 것이라 생각했고(아인슈타인은 두 성질이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복사 문제를 제외한 빛의 성질, 즉 간섭과 회절은 모두 파동성을 명확하게 입증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빛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맥스웰의 전자기파 모델만한 것이 없었다[* 플랑크의 경우 다른 업적은 다 긍정하면서도 광양자 가설은 유일하게 아인슈타인의 엇나간 흠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1914년 밀리컨(Millikan)의 광전효과 실험을 통해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광전효과 공식(플랑크 상수를 비례 상수로 빛의 진동수에 비례함 -> [math(E_k = hf - W)])이 입증되었으나, 광양자 가설은 여전히 물리학자들이 보기에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밀리컨은 "무모하다까지는 아니라도 과감하다"(bold, not to say reckless)라고 평가했고, 여전히 광양자 가설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1922년 컴프턴이 수행한 산란 실험으로 빛이 운동량을 가진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광양자 가설은 점차 학계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어는 빛의 파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크래머스, 슬레이터와 함께 1924년 BKS(Bohr-Kramers-Slater theory)를 주창하여, 에너지와 운동량 보존법칙을 "통계적인 법칙"으로 재해석했다. 그러나 BKS 이론은 1924년 개선된 콤프턴 실험에 의해 실험적으로 틀리다는 것이 증명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BKS 이론의 실패에 대해서도 보어는 광양자가 입증되었다고 믿지 않았으며, 고전적인 시공간 모델이 양자 현상을 서술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다고 해석하였다. 실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BKS 이론은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 더 나아가 불확정성 원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고전 양자역학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석된다. 이렇게 양자 세계에서는 파동성과 입자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 슈뢰딩거의 파동 함수 및 파동 역학 등 획기적인 기여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리고 양자 역학은 1925년 이후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막스 보른(Born)이 파동 함수에 관한 확률적 해석을 내놓고(1926), 베르너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불확정성 원리]]를 제안(1927)하는 등 양자계의 물리과정에 대해 비결정적(indeterministic) 해석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그때까지 양자역학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하던 물리학자 중 한 명이었으나, 물리학계의 이런 움직임에 반감을 표하면서 제동을 걸었다. 물론, 아인슈타인 뿐 아니라 플랑크, 슈뢰딩거 등 적지 않은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의 이러한 해석/방향성에 반대하였는데, 아인슈타인은 보다 적극적으로 여러 사고실험을 제안하면서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이 내놓은 비결정적 해석의 허점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슈뢰딩거 역시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하다.) 한편, 보어는 이들이 내놓은 새로운 해석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인물 중 하나로서(이미, BKS 이론을 통해 결이 통하는 주장을 했다), 둘의 학문적 견해에 다시금 차이가 발생하였다. == 1차 사고 실험 == 첫번째 논쟁은 1927년 5차 솔베이 회의에서 일어났다. 아인슈타인은 틈틈이 보어와 그 동료들에게 자신의 사고실험을 제시하면서 불확정성 원리를 논파하려고 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하고 눈여겨볼만한 것은 다음 슬릿 실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