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불가리아 차르)] ---- ||<-2> '''불가리아 차르국 제2대 차르[br]{{{+1 보리스 3세}}}[* 불가리아 왕국에서는 보리스라는 왕호를 쓴 앞선 왕이 없으나 [[불가리아 제1제국]] 시절의 [[보리스 1세]]와 [[보리스 2세]]의 넘버링을 이어받아 보리스 3세가 되었다.][br]Борис II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Boris_III_of_Bulgaria.jpg|width=100%]]}}} || ||<|2> '''출생''' ||[[1894년]] [[1월 30일]]|| ||[[불가리아 공국]] [[소피아(도시)|소피아]]|| ||<|2> '''사망''' ||[[1943년]] [[8월 28일]] (향년 49세)|| ||[[불가리아 왕국]] [[소피아(도시)|소피아]]|| ||<|2> '''재위기간'''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 차르]]|| ||[[1918년]] [[10월 3일]] ~ [[1943년]] [[8월 28일]]|| || '''서명''' ||[[파일:보리스 3세 서명.svg|width=100px&bgcolor=#fff]]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가문''' ||삭스코부르고츠키 가문 || || '''이름''' ||보리스 클레멘스 로베르트 마리아 피우스 루드비그 스타니슬라우스 크사버 삭스코부르고츠키[br](Борис Клемент Роберт Мария Пий Луи Станислав Ксавие Сакскобургготски) || ||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 || || '''어머니''' ||부르봉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 || '''형제자매''' ||키릴 프레슬라프스키, 불가리아의 에브도키야, 불가리아의 나데즈다 || || '''배우자''' ||이탈리아의 조반나 || || '''자녀''' ||[[시메온 2세]], 마리야 루이자 || || '''종교''' ||[[불가리아 정교회]] ||}}}}}}}}} || [목차] [clearfix] == 개요 == [[불가리아 왕국]]의 2대 차르. == 생애 == 선왕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곧바로 즉위했다. 1923년 쿠데타로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총리가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보리스는 군경의 지원을 받아 전제정을 수립했다. 1934년에는 극우 군사조직 즈베노의 쿠데타로 군사독재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보리스 3세는 1935년 즈베노가 왕정을 폐지하려 했다는 명분으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즈베노를 축출했다. [[제2차 세계 대전]]때 [[추축국]]에 협력하여 영토를 불렸지만[* 크라이오바 조약으로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에게서 남부 [[도브루자]]를 되찾고,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침공]]을 도와 [[그리스 왕국|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의 영토를 일부 차지했다. 전후 불가리아는 남부 도브루자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포기했다.] [[독소전쟁]] 참전을 거부하여 [[나치 독일]]의 눈엣가시였다. [[1943년]] [[아돌프 히틀러]]와의 회담 이후 소피아로 돌아와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독일인 의사들이 피상적으로 검사한 결과 2년전 그리스 총리 [[요안니스 메탁사스]]의 시신에서 발견한 반점과 같은 증상이 검출됐다고 한다. 독일인 의사들은 왕이 독살됐다고 거의 확신했지만, 불가리아 관리들이 부검을 반대하고 왕후의 동의를 얻지 못해 부검은 하지 못했다. 이후 강력한 여론에 따라 결국 왕후가 동의하여 부검을 하긴 했지만 방부처리 후에 해서 무의미한 부검이었고 또 독일인 의사들의 개입은 거부되었다. 여하간 이로서 독살 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용의자는 보리스 3세가 소련 파병을 거부한 데 분노한 히틀러가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 다만 당시 왕과 회담을 같이 한 불가리아 총리 보그단 필로프는 당시 회담은 서부발칸에 파병하는 것을 회담했고, 소련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한다.] 한편 시메온 2세나 불가리아 공주 마리야 루이자는 소련 [[NKVD]]의 행위라는 주장을 했다. 1943년에 발표된 경찰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영국의 개입이라는 설도 있다. 정작 독일의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그의 일기에 조반나 공주의 누이인 마팔다 디 사보이아[* 1902~1944, [[헤센 대공국]]의 방계인 헤센카셀 가문([[빌헬름 2세]]의 조카(막내 여동생 마르가레테의 아들))의 필리프(1896~1980)와 결혼했다. 참고로 필리프의 동생 크리스토프의 부인이 [[필립 공]]의 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1914)|소피아 공주]]이다. 헤센 대공국을 통치하던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의 남계가 단절된 1968년 이후 헤센 가문의 수장(헤센 대공국의 공위 요구자)은 헤센카셀 가문이고, 현재 수장은 필리프의 손자 하인리히 도나투스이다.]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을 무너뜨린 이탈리아 왕실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총리가 불가리아 왕을 살해한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웠다. 이후 마팔다는 [[독일 국방군]]에 체포되어 부헨발트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연합군의 폭격을 맞고 사망했다. 한편 보리스 3세의 서거 후 왕위는 고작 6살 밖에 안된 아들 [[시메온 2세]]에게 계승되었으나 얼마 안 가 [[1946년]] 불가리아가 공산화되며 시메온 2세는 폐위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Rila_Monastery|릴라 수도원]]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는 [[1944년]] [[불가리아 조국전선|조국전선]]에 의해 [[https://en.wikipedia.org/wiki/Vrana_Palace|브라나 궁전]] 안뜰로 옮겨졌으며 이후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장되었다. [[동유럽 혁명|불가리아가 민주화된 후]] 브라나 궁전에서 발견된 그의 심장만이 [[1994년]] 아내 조반나에 의해 릴라 수도원에 재안장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셋째딸인 조반나 공주와 결혼하여 슬하 1남 1녀를 두었다. == 여담 == * [[오리엔트 급행]] 열차를 직접 운전할 정도로 철도를 좋아하는 [[철도 애호가]]였다고 한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지타]]의 조카이자(모후 마리아 루이사가 지타의 이복언니), [[오토 폰 합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대공 [[장(룩셈부르크)|장]]의 사촌형이다. == 대중매체에서 == * [[Hearts of Iron 4|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불가리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 [[ばかみたい|바카미타이]] 2차대전 지도자버전 영상에서 맨 왼쪽아래에 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yXLl4V78-iI|링크]] == 둘러보기 == [include(틀:추축국)] [[분류:불가리아 차르]][[분류:삭스코부르고츠키 가문]][[분류:1894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의문사한 인물]][[분류:철도 동호인]][[분류:소피아 출신 인물]][[분류:Hearts of Iron IV/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