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프랑스 혁명기의 정파)] [include(틀:프랑스 3대 왕당파)] || [[파일:부르봉 왕조 문장.svg|width=300]] || || [[부르봉 왕정복고]] 시대의 프랑스 왕국 국장 || {{{+3 '''Légitimisme''' / '''Légitimism'''}}} [목차] [clearfix] == 개요 ==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으로 무너진 [[부르봉 왕조]]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왕당파]]의 일종이다. [[보나파르트주의]], [[오를레앙주의]]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우익의 3대 정파이다. 이를 추종하는 세력은 '''법통파'''(Legitimistes) 또는 '''정통왕당파'''라고 한다. == 역사 == === 부르봉 왕정복고기 === ||<-2> {{{#FFF {{{+1 '''초왕당파'''}}}}}}[br]{{{#FFF '''Ultraroyalistes'''}}} || || {{{#fff '''활동 시기'''}}} ||[[1815년]] ~ [[1830년]] || || {{{#fff '''주요 정치인'''}}} ||[[샤를 10세]] || || {{{#fff '''이념'''}}} ||[[왕당파|군주주의]][br][[보수주의]][br][[반동주의]] || || {{{#fff '''스펙트럼'''}}} ||[[우익]][* 당대 기준] ~ [[극우]] || 법통파의 시작은 [[부르봉 왕정복고]] 시절 반동주의 극우 정당이였던 초왕당파(Ultraroyalistes, 1815 ~ 1830)였다. 이들은 [[샤를 10세]]의 손자인 샹보르 백작을 왕좌의 후보로 지지하고, 부르봉 가문의 자매 가문인 오를레앙가에 반대한다. 법통주의는 대귀족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7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들어서고, 집권 세력은 정통 부르봉 왕가([[샤를 10세]])에서 오를레앙주의([[루이필리프]])로 교체된다. [clearfix] === 7월 왕정기 === 1832년 5월 샹보르 백작의 모후인 베리 공작부인이 정통 부르봉 왕가의 복구를 위해 반란을 시도했으나 빠르게 진압되었다. 이들은 부르봉가를 지지한다는 점과 선거인단을 줄인다는데 있어서 우익적인 성향을 보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시대정신에 타협할 필요를 느껴 언론의 자유,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 이후 === 오를레앙가 출신의 왕 [[루이필리프]]가 [[2월 혁명]]으로 폐위당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법통주의는 부르봉 가 지지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을 목표로 다시 수면에 떠올랐다. 하지만 곧이어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그치자는 민주 법통주의자들과 보수 법통주의자들로 나뉘어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에게 밀리고 말았고, 방데 등 법통주의의 세가 강한 지역에서도 루이 나폴레옹에 몰표를 던졌다. 이후 법통주의자들은 [[오를레앙주의#s-3|질서당]]에 얽혀가는 식으로 자리를 얻었으며, 연립정부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루이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법통주의자들도 밀려났다.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이 [[보불전쟁]]으로 패망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세워진 후 왕당파들은 기존 보나파르트파의 지지기반을 흡수했고, (법통주의와 오를레앙주의) 의회의 과반을 점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부르봉가 출신의 샹보르 백작과 오를레앙가 출신의 인물이 교대로 왕좌를 취하는 것으로 왕정을 부활시키는 것을 꾀한다. 하지만 오를레앙가를 증오한 샹보르 백작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이 계획은 무산되고, 이는 부르봉 가의 정치적 역할에 종지부를 찍는다. == 여담 == 종교적 의미의 [[정통주의]](orthodoxie)와는 '''전혀''' 무관하다. == 같이 보기 == * [[전제군주제]] * [[극우]] == 둘러보기 == [include(틀:보수주의)] [[분류:부르봉 가문]][[분류:프랑스(19세기)]][[분류:왕당파]][[분류:보수주의/분파]][[분류:전통주의]][[분류:프랑스의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