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목차] == 개요 == 范堅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자상(子常). 형주 남양군(南陽郡) 순양현(順陽縣) 출신. 친척으로는 [[범왕(동진)|범왕]]이 있으나 서로 왕래한 기록은 없다. 박학하고 문장 짓기에 능했다고 한다. 《[[수서]]》 「경적지(經籍志)」에 따르면 《춘추석난(春秋釋難)》 3권을 편찬했다고 하나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 생애 == [[영가의 난]]을 피해 강동으로 피난 간 범견은 동진 정권에 임관해 좌저작랑, 무군참군을 지냈다. [[소준(동진)|소준]]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에 공을 세워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고, 누차 승진하여 상서우승에 임명되었다. [[성제(동진)|성제]]가 재위하던 시기, 소광(邵廣)이라는 궁중의 장리(帳吏)가 국고에서 관포(官布) 30여 필을 횡령한 일이 발각되었다. 당해 사건을 담당한 정위가 법대로 소광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그의 두 아들인 13세의 소종(邵宗), 10세의 소운(邵雲)은 등문고(登聞鼓)[* 진나라 시기 때 시행되던 [[신문고]] 제도라 보면 된다.]를 두드리며, 스스로 [[관노]]가 될 테니 아버지의 목숨만은 살려달라 빌었다. 조정에서 이 사안을 의논할 때, 대신들 대부분이 두 아들의 효심에 감복하여 상서랑 주영(朱暎)을 필두로 소광의 형을 감형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그때 범견이 나서서 정에 따라 형벌을 마음대로 바꿔서는 안 된다며 감형하자는 측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니, 성제는 하는 수 없이 소광을 사형시켰다. 이후 범견은 호군장사로 옮겨졌고, 재직 중 사망했다. 아들로는 범계(范啟)가 있었는데, 비록 아버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문장 짓는 솜씨가 뛰어났고 하며, 관직은 황문시랑에 이르렀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순양 범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