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목차] == 개요 == 樊毅 [[남북조시대]] [[양(남조)|소량]], [[진(남조)|남진]]의 장수로 자는 지열(智烈). 남양군(南陽郡) 호양현(湖陽縣) 출신. == 생애 == 번의의 조부 번방흥(樊方興)은 소량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 인위장군(仁威將軍), 사주(司州) 자사를 지냈고 어복현후(魚復縣侯)에 봉해졌다. 부친인 번문치(樊文熾)는 소량에서 산기상시, 신무장군(信武將軍), 익주(益州) 자사를 지냈고 신채현후(新蔡縣侯)에 봉해졌다. 번의는 누대에 걸쳐 장수를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무예를 배워서 활을 잘 쏘았다. 548년부터 [[후경]]이 일으킨 반란으로 소량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번의는 숙부 번문교(樊文皎)를 따라 근왕병으로 출정하였다. 번문교가 청계(靑溪)에서 전사하자, 번의는 집안의 자제들을 이끌고 강릉(江陵)으로 달아났고 왕승변의 휘하가 되어 하동왕(河東王) [[소예]]를 토벌한 뒤 사지절(除假節), 위융장군(威戎將軍), 우중랑장(右中郞將)에 제수되었다. 번의는 뒤에 형인 번준(樊俊)을 대신하여 양흥(梁興) 태수로 부임했으며, 3개 주의 유군(遊軍)을 거느리고 의풍후(宜豊侯) 소순(蕭循)을 따라 상주(湘州)에서 육납(陸納)을 토벌하였다. 이후 파릉(巴陵)에 도착했을 때 군영이 아직 다 갖춰지지 않았는데 육납의 야습을 받자, 번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역전하여 육납의 군사 십여 명을 토벌하였다. 번의는 지절(持節),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정위장군(貞威將軍)으로 제수되고 이도현백(夷道縣伯)에 봉해져서 식읍 300호를 받았다. 뒤에 번의는 천문(天門) 태수에 제수되고 작위가 후로 올라갔다. 554년, [[서위]]가 형주를 침공하자, 번의는 군대를 이끌고 형주를 구원하고자 출병했으나, 강릉은 함락되었고 번의는 악양왕(岳陽王) [[소찰]]에게 붙잡혔으나 도망치면서 살아남았다. 557년, 진패선이 [[양(남조)|소량]]의 [[경제(양)|경제]] 소방지로부터 제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진(남조)|남진]]의 초대 황제인 [[무제(남진)|고조 무황제]]였다. 이때 번의는 아우인 번맹과 함께 거병하여 왕림에게 호응하였으나 왕림이 패배하여 [[북제]]로 달아나고 태위(太尉) 후진이 사자를 보내 번의를 초유하자, 번의는 자제를 이끌고 귀순하였다. 561년, 통직산기상시로 제수되고 후진을 따라 파주(巴州)와 상주(湘州)를 정벌했으며, 무주(武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태건(太建) 연간 초, 번의는 풍주(豊州) 자사로 전임되고 고창현후(高昌縣侯)에 봉해져 식읍 1,000호를 받았으며, 입조하여 좌위장군(左衛將軍)이 되었다. 573년, [[오명철]]을 중심으로 남진이 북벌을 감행할 때 번의는 군대를 이끌고 초자성(楚子城)을 공격해 함락했으며, 영구(潁口)에서 북제군을 물리쳤다. 뒤에 북제가 창릉(滄陵)에 원군을 보내자 번의는 이 원군도 격파하였다. 575년, 번의는 동주(潼州), 하비(下邳), 고책(高柵)을 비롯한 6개의 성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여량(呂梁)에서의 패배로 인해 번의는 조정으로 돌아왔다. 번의는 뒤에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되고 평북장군(平北將軍)으로 진위되어 군대를 이끌고 회수를 건너 청구(淸口) 연안에 성을 짓고 [[북주]]와 대치했다. 이후 장마가 내려서 성이 무너지자, 번의는 전군을 이끌고 철수하였다. 뒤에 중령군(中領軍)으로 전임되었다. 579년, [[북주]]의 양사언이 군대를 이끌고 수양(壽陽)을 포위하자, 번의는 도독북토전군사(都督北討前軍事)로 임명되어 수군을 이끌고 초호(焦湖)로 입성하였다. 뒤에 번의는 진서장군(鎭西將軍), 도독형영파무4주수륙제군사(都督荊郢巴武四州水陸諸軍事)로 제수되었다. 580년, 독면한제군사(督沔漢諸軍事)로 제수되었으나 공사로 인해 면직되었다. 581년, 중호군(中護軍)에 제수되었다. 뒤이어 호군장군(護軍將軍), 형주(荊州) 자사로 제수되었다. 582년, 선제가 붕어하고 그의 태자인 진숙보가 즉위하니 이가 남진의 마지막 황제였던 [[후주(남진)|후주]]였다. 후주가 즉위한 뒤 번의는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임명되고 소요군공(逍遙郡公)에 봉해져 식읍 3,000호를 받았으며,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이후 입조하여 시중(侍中), 호군장군에 임명되었다. 588년, [[수나라]]에서 진왕(晉王) [[양제(수)|양광]], 진왕(秦王) 양준, 청하공(淸河公) [[양소(수나라)|양소]]를 행군원수로 하는 남진 정벌군이 출병하기 시작했다. 남진 정벌군이 장강을 건넌 가운데 번의는 복야(僕射) 원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구(京口)와 채석(採石)은 모두 요충지이니 각지에 정예병 수천 명과 함선 200척을 배치하고 모두 장강을 건너서 수륙으로 그들을 방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세가 기울어버립니다. 번의의 제안에 장수들이 모두 동의했으나, [[시문경]] 등이 이를 묵살하면서 결국 번의의 계책은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589년, 건강성의 함락으로 남진은 멸망하였고 번의는 장안으로 압송되어 오래지 않아서 죽었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