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 백붕제}}} [br] 白鵬濟''' || ||<|2> '''출생''' ||[[1910년]] [[2월 19일]] || ||[[평안북도]] [[정주시|정주군]] 남면 이리[br](現 [[평안북도]] [[정주시]] 남양리) || ||<|2> '''사망''' ||불명 || ||사망지 불명 || || '''본관''' ||[[수원 백씨]][* 인주공파(仁州公派) 19세 ◯제(濟) 항렬. 수원 백씨 31세.] || || '''부모''' ||아버지 백희행(白禧行){{{-2 (1869 ~ 1954)}}} [br] 어머니 청주 한씨[* 한응모(韓應模)의 딸] {{{-2 (? ~ ?)}}} || || '''형제자매''' ||4남 3녀 중 넷째 [br] 형 백용제(白龍濟){{{-2 (1887 ~ 1909)}}} [br] 형 백봉제(白鳳濟){{{-2 (1896 ~ 1946)}}} [br] 형 [[백인제]](白麟濟){{{-2 (1898 ~ ?)}}} || || '''배우자''' ||안숙온(安前妻){{{-2 (? ~ 1927)}}} [br] 최귀란(崔貴蘭){{{-2 (1911 ~ ?)}}} || || '''자녀''' ||3남 3녀 [br] 장남 [[백낙환]](白樂晥){{{-2 (1926 ~ 2018)}}} [br] 차남 [[백낙청]](白樂晴){{{-2 (1938 ~ )}}} [br] 3남 백낙서(白樂曙){{{-2 (1945 ~ )}}} [br] 장녀 백순영(白純英){{{-2 (1936 ~ )}}} [br] 차녀 백미혜(白美惠){{{-2 (? ~ )}}} [br] 3녀 백미영(白美英){{{-2 (1946 ~ )}}} || || '''학력''' ||[[중앙고등보통학교]] {{{-2 (졸업)}}} [br][[구제고등학교|마쓰야마고등학교]] {{{-2 (문과 / 졸업)}}} [br] [[교토제국대학]] {{{-2 (법학 / 학사)}}} || [목차] [clearfix] == 개요 == 친일 관료, 변호사. == 생애 == 1910년 2월 19일 [[평안북도]] [[정주시|정주군]] 남면 이리(現 [[평안북도]] [[정주시]] 남양리) 부호마을[* [[수원 백씨]] 집성촌이다.][[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224979|#]]에서 아버지 백희행(白禧行)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응모(韓應模)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7년 [[중앙고등보통학교]](제18회)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구제고등학교|마쓰야마고등학교]][* 현재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은 일제시대에 [[구제중학교]]로 묶여있었고 [[구제고등학교]]는 [[대학예과]]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松山高等學校, 현재 [[에히메대학]]의 전신)에 입학, 1930년 졸업했다(제9회). 동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로 진학해 1933년 졸업한 뒤 조선으로 돌아와 1934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1935년 행정과에 차례로 합격했다.[* 지금으로 치면 [[사법시험]]과 [[행정고시]]에 모두 합격한 것에 해당된다.] 고등문관시험을 준비 중이었던 1934년부터 [[경상북도]] 내무부 학무과 속(屬) 겸 [[의성군]] 속으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행정과 합격 후인 1936년 지방과로 전보되어 1937년 [[군위군|군위군수]]로 발령받았다. 1940년에는 경상북도 산업부 상공2과 이사관으로 승진했고 1942년 [[황해도]] 산업부 도이사관으로 옮겼다. 해방 당시에는 35세의 나이로 [[전라남도]] 내무부 사회과장까지 승진해있었다. [[일제강점기]] 관료로 재직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수품 공출, 국방 헌금 모금 등 전시 업무를 수행하여 '지나 사변 공적 조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관료 부문에 수록되었다.[* 과거 편집에 자작 작위를 받았다는 서술이 있는데, 친일파 708인 명단 - 조선귀족명단 및 친일인명사전 수작/습작 명단에 수작했다는 기록이나 근거가 없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물려받은 경우(습작)를 제외하고 새로 수작한 이는 이항구가 유일한데 그는 [[이완용]]의 아들(!)이며 작위도 가장 낮은 남작이다. 일개 관료가 군수지원 업무로 대대손손 세습되는 귀족 작위를 받는 일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자세한 것은 [[조선귀족]] 문서를 참조할 것.]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경기도]]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재직하다 변호사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형 [[백인제]]와 함께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미상(未詳)이다. 가족들에 증언에 따르면 형 [[백인제]] 박사가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올 때 피신했다가 잡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가겠다"고 하여 7월 19일에 집에 잠시 들렀는데, 그때 북한군이 집에 숨어 있던 백붕제를 발견하고 형제를 같이 끌고 간 것이라고 한다.[*납북기록 6.25 사변이 나자 친구 [[육지수]] 댁 가회동 70번지의 31에 숨어 있었음. 형 [[백인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확인코저 잠깐 집에 돌아왔다가 잠복하여 있던 청년 2명이 나타나 연행하여 갔음. 그 청년들은 30세 미만이었으며 사복을 하고 있었음. 그때 시일은 1950년 7월 19일 오전 9시. 그 당시 정치보위부라 칭하는 곳(현 국립도서관)에 수용되어 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음. 이것은 친우 계씨 부인이 UN군이 서울을 탈환하였을 때 자기 남편을 찾으려고 서대문형무소를 세세히 조사하였을 때 어떤 감방에 백인제, 백붕제의 명찰이 동일 감방에 걸려 있었다고 하고 장부에는 형제가 1일을 앞뒤로 수감되었던 기록을 보았다고 증언함. UN군이 인천상륙할 무렵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이다가 북한으로 연행당하여 38선 가까이까지 가다가 탈주해 온 권씨에 의하면 그때 백씨 형제가 앞뒤로 묶여서 그 행렬 중에 섞여 있었다고 증언하였음. 백씨 형제가 평양 근방에서 열을 지어 가는 것을 보았다고, 1.4후퇴 시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으로부터 친우 [[이충영]]씨 부인이 들었다고 증언함. [[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21&num=7352|#]]] == 가족 == * 15세 되던 해 당시 18세이던 [[순흥 안씨]] 안숙온[* 1908 ~ 1927.2.25. 안병탁(安炳卓)의 딸이다.]과 혼인하였으나 혼인한지 2년 만에 안숙온은 장남을 낳고 6개월 뒤인 1927년 2월 25일 병사하였다. 후에 [[경주 최씨]] 최귀란(崔貴蘭)[* 1911년생으로, 최세진(崔世珍)의 딸이다. [[일본]] [[나라여자대학|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과 재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백낙환]]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백부 백인제의 [[백병원|의업을 이어받아]][* 생후 6개월에 친모가 사망할 당시 아버지 백붕제는 17세에 불과했다. 할아버지가 맡아서 키우다가 이후 백부 백인제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인제대학교]]를 설립하고 인제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차남 [[백낙청]]은 문학평론가로,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3남 백낙서(白樂曙)는 [[미국]] [[윌리엄스 칼리지]]와 [[코넬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통일부|통일원]] 기획관리실장과 인제대 교수를 지냈다. 장녀 백순영(白純英)[* [[파일:백순영.png]] 의대 3학년 때 개교기념일 연세여왕으로 뽑힐 당시의 모습]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차녀 백미혜(白美惠)도 미국에서 유학했다. 3녀 백미영(白美英)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한 피아니스트로 [[단국대]] 교수를 지냈다. == 대중매체에서 == 한국군 정보장교가 북에 잠입해 납북인사를 구출한다는 내용의 영화 《[[남북천리]]》(1966)에서 배우 전창근이 연기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백낙청, version=76)]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1910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수원 백씨]][[분류:납북자]][[분류:실종된 인물]][[분류:정주시 출신 인물]][[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교토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