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십육국춘추)] [목차] == 개요 == 裴憲 생몰연도 불명 [[서진]] 및 [[후조]]의 인물. 자는 경사(景思). 사주(司州)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출신. [[배해]]의 아들. == 생애 ==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무언가를 가르치면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깨달았고, 호걸을 흉내내며 협객 노릇을 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고 남들의 주장을 들을 줄 알게 되었고, 엄중히 유학 공부와 수양에 매진하여 전국을 유람하던 다른 명문가 자제들과는 달리 수년간 고향에 머물렀다. 배헌의 명성은 널리 퍼져 진군(陳郡)의 [[사곤]], 영천(穎川)의 유개(庾凱) 등 당대 명사들은 그와 교류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배헌은 서진 조정에 임관하여 동궁(東宮)의 시강(侍講)에 임명되었고, 황문이부랑, 시중을 역임하였다가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예주(豫州)자사, 북중랑장, 가절로 옮겨졌다. 영가 2년(308년) 9월, 한(漢)의 [[유연(전조)|유연]]이 진동대장군 [[왕미(전조)|왕미]]와 보한장군 [[석륵]]을 보내 업(鄴)을 침공하자, 업을 지키던 서진의 정북장군 화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동해왕 사마월은 한나라 군대가 황하 이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배헌에게 명을 내려 백마(白馬)에서 왕미의 군대를 막게 하고, 거기장군 왕감(王堪)을 동연(東燕)에 주둔시켜 석륵의 군대를 막게 하였다. 영가 3년(309년) 11월, 동해왕 사마월의 명령에 따라 거기장군 왕감과 합류하여 여양(黎陽)에 한나라의 평동대장군 석륵이 남겨둔 군대를 쳤다. 당시 신도(信都)에서 서진의 기주(冀州)자사 왕빈(王斌)을 격파한 석륵이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여양으로 돌아오니, 서진의 위군(魏郡)태수 유구(劉矩)는 위군을 들어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이로써 석륵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배헌은 승산이 없다 판단하여 토벌을 중지한 뒤 회남(淮南)으로 물러났고, 왕감도 퇴각하여 창원(倉垣)을 진수하였다. 영가 5년(311년) 6월, 건강(建康)에서 할거하는 [[원제(동진)|낭야왕 사마예]]가 백관을 설치하고 사실상 서진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낭야왕 사마예는 건강을 중심으로 강남의 호족과 지방관들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배헌과 강주(江州)자사 [[화일]]만은 서진 조정의 명을 우선시하여 낭야왕 사마예의 세력에 저항하였다. 이에 낭야왕 사마예는 양주(揚州)자사 [[왕돈(동진)|왕돈]], 역양(歴陽)내사 [[감탁]], 양열장군 [[주방(서진)|주방]] 등을 보내 화일을 패사시키고 강주를 장악해버렸다. 화일보다 세력이 약했던 배헌은 두려운 나머지 북쪽으로 도망쳐 유주(幽州)자사 [[왕준(서진)|왕준]]에게 의탁하였다. 영가 5년(311년) 7월, 왕준이 사마씨 황족을 데려와 황태자로 옹립하고, 승제하여 부하들에게 관직을 분배하면서 배헌을 상서로 삼았다. 건흥 2년(314년) 2월, 석륵이 왕준을 죽이고 붙잡은 왕준 휘하의 정예병 10,000명을 전부 몰살시키자, 조숭(棗嵩) 등 왕준의 부하들이 각자 살기 위해 저마다 석륵의 군문으로 나아가 앞다투어 사죄를 하고 뇌물을 바쳤다. 이때 상서 배헌과 종사중랑 순작(荀綽)만이 집에 머물며 가만히 처분을 기다리니, 본래 그들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석륵은 배헌과 순작을 소환해 물었다. > "왕준은 학포하여 유주의 사람이나 귀신이나 그를 똑같이 미워하였다. 이에 나는 천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고 주살함으로써 이곳의 백성을 구원하였으니, 모두가 즐거워 경하하고 길 가는 곳마다 내게 감사를 표하였다. 한데, 그대들은 왕준과 악(惡)을 함께 행하여 오만한 위세를 떨치고 진실된 신뢰를 스스로 두절시켰다. 그대들은 방풍지륙(防風之戮)을 하여 장차 누구에게 귀순하려 하는가?" 그러자 배헌은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눈물을 흘리며 답하였다. > "신들의 집안은 대대로 진나라의 영광과 은혜 덕에 융성히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왕준은 흉폭하고 거칠었으나 진나라의 번(藩)이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비록 이번의 성화(聖化)는 기뻐할 일임이 틀림없지만 의(義)는 성(誠)보다 우선시 해야하는 법입니다. 과거 [[무왕(주)|무왕]]은 [[주왕]]을 토벌한 후 상용(商容)이 사는 마을 어귀에서 그를 칭송하였는데, 상용이 주왕 배반하고 토벌에 가담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명공께서 덕과 의가 아닌 위엄과 형벌로 다스리려 한다 해도 신하로서 방풍지륙을 행하는 것 역시 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죽음으로 그 책임을 지겠습니다." 말을 마친 배헌은 석륵에게 배례도 하지 않고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석륵은 매우 기뻐하며 즉시 배헌과 순작을 빈객의 예로써 대우하고, 뇌물로 목숨을 구걸하던 주석(朱碩), 조숭 등을 붙잡아 전부 참수하였다. 석륵이 왕준의 측근들의 가산을 모두 몰수해보니 각자 수만 금을 헤아렸으나, 배헌과 순작의 집안에서 나온 재산은 책 100여 권과 소금과 쌀 10여 곡이 전부였다. 이를 전해들은 석륵은 장사 [[장빈(후조)|장빈]]에게 > "그들의 명성은 거짓이 아니었구나. 나는 유주를 얻은 것보다 그 두 사람을 얻은 것이 더 기쁘도다." 라 말하였다. 이후 배헌을 종사중랑, 순작을 참군으로 삼고 각기 옷과 마차를 하사하였다. 광초 원년(318년) 12월, [[근준]]의 반란이 진압된 후, 석륵의 명령에 따라 석회(石會)와 함께 반란군에 의해 파괴된 영광릉(永光陵)과 선광릉(宣光陵)을 수리하였다. 광초 2년(319년) 2월, 석륵이 조왕(趙王)을 자칭하자 배헌은 경학좨주(經學祭酒)에 임명되었고, 장락(長樂)태수, 낭중령을 역임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2월, 석륵이 대조천왕(大趙天王)을 자칭하고 배헌을 상서로 삼았다. 이후 석륵이 황제를 칭했을 때는 왕파(王波)와 더불어 조정의 의례를 세우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 《동정의(東耕儀)》를 편찬하여 농법을 정리하니, 명제 석륵은 기뻐하며 배헌을 태중대부로 임명해 신임하였고, 오래지 않아 사도로 승진시켰다. 건평 4년(333년) 7월,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권력을 잡은 승상 [[석호(후조)|석호]]는 명제 석륵이 아끼던 대신들을 대부분 숙청했지만 배헌은 오히려 예우가 더해졌다. 건무 3년(337년) 10월, 배헌의 두 아들 배읍(裴挹), 배곡(裴瑴)은 둘 다 나란히 문재(文才)로 이름을 날렸는데, 배곡은 조정에 임관하여 태자중서자, 산기상시를 지내면서 호걸이나 협객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고 인물에 대해 평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배곡의 취미로 인해 하간(河間) 지역 출신의 학어(郝魚)라는 자와 갈등하게 되었고, 결국 학어는 배곡의 말을 훔쳐 [[단부]]로 달아나다가 도중에 붙잡히고 말았다. 당시 석호는 단부 토벌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학어는 심문 과정에서 자신은 배곡의 명령에 따라 단부에 토벌 정보를 유출하려 했다 자백하면서 배곡을 모함하였다. 이때 운이 없게도 단부의 수령인 단요(段遼)가 먼저 후조를 공격해오니, 석호는 학어의 자백을 그대로 믿고 배읍과 배곡을 붙잡아 모두 주살하였다. 그들의 아버지인 배헌 역시 연좌되어 면직당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복직되어 우광록대부, 사도, 태부를 역임하고 안정군공(安定郡公)에 봉해졌다. 배헌은 여러 현직을 역임하면서도 공을 세우는 일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다. 항상 조정의 회의에 참석해도 가장 말이 적었고, 그저 세상사에 무심한 듯한 태도로 관직에 임하였다. 그러나 워낙 덕성으로 명성이 높아 배헌은 죽을 때까지 존중과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아들들이 모두 주살당해, 사후 같은 집안 사람인 배치(裴峙)의 아들 배우(裴邁)가 그의 후사를 이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하동 배씨]][[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