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85년 출생]][[분류:1963년 사망]][[분류:아산시 출신 인물]][[분류:건국훈장 애족장]] ||<-2>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방창근}}}[br] 方昌根'''}}} || ||<-2> [[파일:빈 세로 이미지.svg|width=100%]] || ||<|2> '''출생''' ||[[1885년]] [[11월 4일]]||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신인리|| ||<|2> '''사망''' ||[[1963년]] [[6월 6일]]|| ||충청남도 아산군|| ||<|2>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생애 == 방창근은 1885년 11월 4일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신인리에서 태어났다. 방창근은 1919년 3월 14일 온양장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한테 잡혀 태형 40대를 맞았다. 이후 서울로 주거지를 옮기고 [[이기하]] 등과 결의단이라는 독립운동 조직을 조직하고 비서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결의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사금을 모집하였다. 1919년 12월 오백동을 통하여 [[안종면]]에게 독립자금 기부를 요구하기도 했다. 안종면이 기부를 미루자 직접 안종면의 집을 방문했다가 종로경찰서 일본 순사에게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함께 일하던 결의단원 수십명도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해 결의단은 와해됬다. 방창근은 정치범 처벌령의 죄목으로 1920년 3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투옥됬다. 1963년 6월 6일 조용히 별세했다. == 사후 == 대한민국 정부는 방창근의 공로를 기리며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