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산성)] ---- ||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의 사적}}}]]''' '''{{{#f39100 제403호}}}''' || || {{{+1 {{{#fff '''포천 반월성'''}}}}}} {{{-1 {{{#fff 抱川 半月城}}}}}} {{{-1 {{{#fff }}}}}}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fff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3290번길 19, 외 (구읍리)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지 || || '''{{{#fff 면적}}}''' || 66,000㎡ || || '''{{{#fff 지정연도}}}''' || 1998년 2월 20일 || || '''{{{#fff 제작시기}}}''' || [[고구려]]시대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포천 반월성, 너비=36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사적403호포천반월성전경.jpg|width=100%]]}}} || || {{{#fff ''' 반월성 전경[*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history_site/1625915.jpg|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 개요 == 포천 반월성은 [[삼국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성#s-3]]으로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에 위치한 청성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1998년에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시대에 성이 조성된 이래로 조선시대까지 이용되었으나 [[인조]] 때부터 버려져서 현재는 그 터만 확인된다. 명칭은 반월성, 고성(古城), 산성(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불려졌으며,[*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903&cid=40942&categoryId=33539|두산백과 - 포천 반월성]]] 이 가운데 반월성이라는 이름이 가장 유명한데 이는 성의 모양이 [[반달]] 모양인 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 내용 == 반월성은 청성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앞서 개요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 인조대에 버려진 지라 현재까지 남아서 확인되는 성벽의 길이는 약 1,080m 가량이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이는 경기 북부 지역에 남아 있는 성채 유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경기도에 남아 있는 유적 중에 유일하게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유적이라고 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903&cid=40942&categoryId=33539|두산백과 - 포천 반월성]]] 1994년부터 2001년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 시행된 반월성 학술 발굴 조사에서[*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남쪽과 북쪽에서는 성문의 터, 치성(雉城)[* 치성은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뜻한다. 참조: [[https://ko.dict.naver.com/ko/entry/koko/f150de7221ee4e9fb7a56c03bb849198|네이버 국어사전 - 치성3 雉城]]] 4개,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지휘대인 장대터, 망대터 등을 발견했다.[* 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4030000,31&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포천 반월성 (抱川 半月城)]]] === 역사 === 반월성은 정확한 학술 발굴 조사 이전까지는 [[태봉]]의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었으나, 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밝혀졌다. 대략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최초 축성은 백제가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본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24764&cid=49345&categoryId=49345|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 반월산성]]][* 하지만 고구려가 만든 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4030000,31&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포천 반월성 (抱川 半月城)]]] 하지만 이후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반월성도 고구려의 성으로 넘어가 약 1백년 가량 고구려의 영역으로 있었으나, 6세기 중엽부터 [[신라]]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한강 유역을 영토로 확정]]하고 한강 이북 지역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7세기 초엽에 들어서 반월성도 신라가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라가 반월성을 점령한 이후인 [[통일신라]]시기에 접어들면서는 군사전략적인 요새보다는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하지만 통일신라 이후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반월성의 전략적인 이점이 다시 떠오르면서 군사기지로 부각하는데, 궁예가 수도인 [[태봉국 철원성|철원성]]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반월성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0세기말 들어 시행된 학술 발굴 조사 이전까지 반월성을 궁예가 쌓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 것도 이러한 점에서 비롯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24764&cid=49345&categoryId=49345|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 반월산성]]] 그러나 궁예의 태봉이 멸망하고 [[고려]]기 들어서면서 반월성은 버려진 상태로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반월성은 군사기지로 잠시 다시 활용되는데 이때도 성채를 재건하지는 않고, 남아 있는 일부분만 재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성을 개축하여 [[인조]] 1년인 1623년까지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1563&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포천반월성지]]] 이는 [[후금]]이 처들어 올 시에 방어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월성을 재활용 한 것이다. 이렇게 반월성을 재활용 하면서 중군(中軍)도 성에 주둔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인조가 즉위하면서 중군을 해체하였고, 이와 함께 반월성은 버려져 딱히 수행하는 역할도 없이 점차 폐허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이를 증명하듯이 막상 [[병자호란]]이 발발 했을 때엔 반월성은 광해군의 노력이 무색하게 별다른 역할을 하지도 못했다. 1899년에 발간된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 참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58206&cid=46618&categoryId=46618|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포천군읍지]]]에는 '고성 반월산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937자[尺]이고, 가운데에 우물이 2개소 있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지금은 폐(閉)하여졌으나 수축(修築)하지 못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어서[*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903&cid=40942&categoryId=33539|두산백과 - 포천 반월성]]] 인조때 반월성이 버려진 뒤 폐허로 남겨진 채 내려왔던 것을 알 수 있다. == 기타 == * [[경주시]]에 있는 [[신라]]시대 [[경주 월성]]도 [[반달]] 모양이라고 해서 반월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1994년부터 2001년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 학술 발굴 조사가 이뤄졌는데, 일련의 발굴 조사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산성 유적 발굴에 있어서 반월성 발굴 조사처럼 계획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총 7권에 달하는 발굴 보고서가 발간된 사례가 그 이전까지는 없었다고 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포천_반월성|한국어 위키백과: 포천 반월성]]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1563&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포천반월성지]]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3&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포천 반월성]]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9264&cid=51888&categoryId=536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반월산성 유적]]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8325&cid=43065&categoryId=43065|고고학사전: 반월산성]]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24764&cid=49345&categoryId=49345|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반월산성]]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11329&cid=42856&categoryId=42856|대한민국 구석구석: 포천 반월성]]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903&cid=40942&categoryId=33539|두산백과: 포천 반월성]] == 사적 제403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4030000,31&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포천 반월성 (抱川 半月城)]] >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 >※(포천반월성지 → 포천 반월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분류:포천시]][[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고구려/건축]][[분류:성채/대한민국]][[분류: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