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박현동(독립운동가).jpg|width=300px]] || || 성명 ||박현동(朴玄東) || || 본관 ||[[순천 박씨]][* 21세손 동(東) 항렬] || || 생몰 ||[[1886년]] [[10월 1일]] ~ [[1962년]] [[1월 20일]] || || [[출생지]] ||전라도 광주목[br](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수동(광주)|장수동]])[* 안청동·진곡동·오산동·장덕동·하남동과 함께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노백]]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현동은 1886년 10월 1일 전라도 광주목(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수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광주군 와곡면 상촌리(현 광산구 오산동 상촌마을)로 이주하였다. 그는 1906년 4월 [[최익현]]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각지에 띄운 "근고팔도민서(謹告八道民書)"라는 격문을 보고 최익현 의진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그에 호응하기 위해 의병 200여 명과 총 20~30정으로 무장하 광주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할 목적으로 [[공주시|공주]]를 떠났다. 이어 [[전라북도]] [[임실군|임실]]에서는 의병 80여 명과 총 50정을 추가하였고 곧 최익현의 근거지인 [[순창군|순창]]으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그해 4월 7일부터 8일 사이에 광주·[[전주시|전주]]·공주 등지로부터 최익현 의진을 저지하기 위해 집결한 [[대한제국군 진위대]]와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순창면내에서 교전하였으나, 의진의 형세가 정비되기 전이었으므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한 일련의 의병활동이 일본에 발각·체포되어 1910년 3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내란죄로 유배형 5년형을 언도받았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00&evntId=0034989836&evntdowngbn=Y&indpnId=000002097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그러나 [[경술국치]]로 일제의 밀계가 이루어지자 석방되었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이후 1962년 1월 20일 별세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순천 박씨]][[분류:광산구 출신 인물]][[분류:1886년 출생]][[분류:196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