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동양방송 아나운서)] [include(틀:KIA 타이거즈 단장)] '''{{{+1 朴鍾世}}}''' [[1935년]] [[음력]] [[8월 28일]][* [[양력]] [[9월 25일]].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200401210538&st=view&page=&id=1&limit=&keykind=&keyword=&bo_class=2&fpage=&spage=|#]]] ~ ([age(1935-08-28)]세)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직 [[언론인]], [[기업인]]이다. 본관은 [[박(성씨)|창원]](昌原)[*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200401210538&st=view&page=&id=4&limit=&keykind=&keyword=&bo_class=2&fpage=&spage=|#]]. 병마사공파(兵馬使公派)-장단파(長湍派) 종중 21세 종(鍾) 항렬.], 자는 명유(鳴有), [[아호]]는 월송(月松), 현암(玄岩). == 생애 == 1935년 음력 8월 28일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진남면]](現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200401210538&st=view&id=3&bo_class=2&fpage=&spage=§er=D|112번지]]에서 아버지 박교준(朴敎駿, ? ~ 1959. 4)과 어머니 [[이(성씨)|임강 이씨]](臨江 李氏) 이금순(李金順)[* [[개성시]] 출신으로, 2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12100051|태어났다]]. 위로 박종국(朴鍾國), 박종억(朴鍾億), 박종원(朴鍾元) 등 형 3명과 아래로 박정순(朴丁順), 박경순(朴庚順) 등 여동생 2명과 막내 남동생 박종방(朴鍾邦, 1945 ~ 1950)이 있었다. 아버지 박교준[* 조모는 [[해주 오씨]]이고 아버지는 이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작은아버지 박교덕(朴敎德)이 있었다.]은 일찍이 조부 박항묵(朴恒默)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임진강]]에 철교를 놓기 위해 장단군에 파견와있던 일본인 측량기사들을 찾아가 [[일본어]]와 측량기술을 배웠다. 이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탁지부]]에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2_02A_29A_00040_2015_002_XML|임시재원조사국 양지과 기수]](臨時財源調査局量地課技手),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2_07A_01A_00040_2015_003_XML|임시재산정리국 측량과 기수]](臨時財産整理局測量課技手) 겸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3_04A_17A_00030_2015_005_XML|재무서 한성재무감독국 임시국유지조사소장 기수]](財務署漢城財務監督局臨時國有地調査所場技手) 등으로 근무했고, [[경술국치]] 후에는 [[조선총독부]] 직속 임시토지조사국에서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측량과 기수, 1914년부터 1915년까지 기술과 기수,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측지과 기수 등으로 근무했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함경남도청]] 내무부 토목과에서 토목기수로 근무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제4대 국방부장관]]이 되는 [[신태영]]과 친했다고 하는데, 이후 박종세 또한 신태영의 장남 [[신응균]]과 친분을 이어나가게 된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강계영림서에서 삼림주사로 근무했다.[* 당시 [[압록강]] 뗏목 도둑을 단속하는 일도 맡았는데, 뗏목 도둑이 주로 [[중국인]] 또는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잡혀 온 뗏목 도둑의 우두머리가 똑똑하고 잘생긴 한국인인지라, 고민 끝에 몰래 빼내어 방면해주었다. 이후 [[6.25 전쟁]] 때 다른 가족들을 [[서울특별시]]로 피난 보내고,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한 조모와 장단군 본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별안간 [[조선인민군]] [[대좌]] 한 사람이 사병 몇을 데리고 나타나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찾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대좌는 과거 강계군에서 잡혔다가 풀려났던 그 뗏목 도둑의 우두머리였고, 당시 아버지께 은혜를 입고 매우 감사히 여겨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장단군이 고향인 아무개씨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전쟁이 일어나 남하하던 길에 장단군을 지나며 이곳에 들르게 되었다면서, 쌀과 북어, 미역을 주며 다시 출전했다고.[[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200401210538&st=view&page=&id=4&limit=&keykind=&keyword=&bo_class=2&fpage=&spage=|#]]] [[8.15 광복]]을 전후해 개성세무서에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말년에는 도라산리 이장을 지냈다. 출생 이후 [[연천군]] [[전곡읍|전곡면]]에 잠시 살기도 했으며, 이후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219-3번지에 본적을 두었다. 1948년 2월 장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경복고등학교|경복중학교]]에 입학했고, 3학년 되던 1950년 [[6.25 전쟁]]을 맞기도 했다. 경복중학교 졸업 후 [[경복고등학교]](30회)에 입학해 1955년 2월 졸업했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12100051|12회 출신이라고 한다]]. [[김종필]]은 2회 출신.] [[교육학과]](55학번)에 입학해 1959년 2월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56년 12월, [[한국방송공사]]의 전신 서울중앙방송국에 입사하여 [[아나운서]]로 근무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그는 당직근무 중이었는데 총소리가 나자 책상 밑에 숨어있다가 방송국에 진입한 쿠데타군에게 발견되어 혁명공약을 방송으로 낭독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는 진입한 군의 실체에 대해 몰랐기에 망설였지만, [[박정희]]에게서 혁명의 취지를 이야기 듣고는 적어도 그들이 북한군은 아님을 알고는 방송에서 혁명공약을 읽어나갔다고 한다]. 1964년 4월 서울중앙방송국을 퇴사하고, [[동양방송]]이 개국하자 같은 해 7월 동양방송으로 이직해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에서 아나운서 실장(부장급), 방송위원(부국장), 방송주간(국장) 등을 역임했다. [[파일:attachment/tj2.jpg]] [[파일:attachment/tj3.jpg]] [[파일:attachment/tj4.jpg]] 1980년 8월 31일 '''내가 본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땡전뉴스]]성 방송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언론통폐합]]으로 동양방송 고별방송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를 진행했고, 1980년 12월 다시 [[한국방송공사]]로 자리를 옮겨 1981년 11월까지 1년간 방송위원실 주간을 맡았다. 이후 해태기획 대표이사에 취임했고, 1983년 7월 1일 주식회사 KORAD[* [[한국원자력환경공단]]과는 별개의 단체이다.]로 상호를 바꾼 뒤 1994년 12월까지 대표이사 사장 및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1982년 초대 [[해태 타이거즈]] 단장을 지냈다. 1987년 8월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 전공으로 [[행정학]] [[석사]] 학위[* 석사 학위 논문 : [[http://www.riss.kr/link?id=T874294|한국 방송광고의 규제에 관한 연구]](1987. 8).]를 취득했다. 1995년 1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광고회사인 아시아컴 회장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https://kyungbock.net/cmnt/21769/contentInfo.do|제13대]] 경복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 그 밖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대한역도연맹 부회장, 청운로터리클럽 회장, 한국게이트볼협회 수석부회장, 형애장학회 이사, 삼육재활원 이사,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이사,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이사, 세방학원 이사, [[교육방송]] 시청자위원회 부위원장, [[농민신문]] 편집위원, [[이북5도청]] 행정자문위원, 장단군민회 고문, [[미수복 경기도]]중앙회 부회장, 경기도민회 부회장, 경기도 장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 관련 문서 ==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12100051|[줌업] '영원한 현역' 박종세(朴鍾世) 아나운서의 방송과 야구인생]] [[분류:한국 남성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1935년 출생]][[분류:실향민]][[분류:창원 박씨]][[분류:장단군 출신 인물]][[분류:경복고등학교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출신]][[분류:해태-KIA 타이거즈/역대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