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박영희}}}'''[br]'''朴寧熙'''}}}}}}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박영희.jpg|width=100%]]}}} || || '''이명''' ||박두희(朴斗熙), 박영섭(朴寧燮), 박장섭(朴章燮) || || '''자''' ||경원(景遠) || || '''호''' ||정헌(靜軒)·검추(劒秋) || || '''본관''' ||[[함양 박씨]][* 밀직공파(密直公派)-구당공파(九堂公派)-부평공파(富平公派) 29세 희(熙) 항렬.] || ||<|2> '''출생''' ||[[1896년]][* 함양박씨구당·소요당·명헌공파보 상권 499쪽에는 1897년생으로 등재돼 있다.] [[12월 28일]] || ||[[충청남도]] [[부여군]] 공동면 중리[br](現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함양 박씨]] 집성촌이다. [[배우]] [[박시후]]도 이 마을 출신이다.] 곡부마을 137번지) || ||<|2> '''사망''' ||[[1930년]] (향년 34세) || ||[[러시아]] [[연해주]] 고루지게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6년 12월 28일 충청남도 부여군 공동면 중리(現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곡부마을 137번지)에서 아버지 박동익(朴東翼, 1868. 1. 11 ~ 1931. 1. 6)과 어머니 [[한양 조씨]](1863. 3. 5 ~ 1916. 3. 22)[* 조영식(趙榮植)의 딸이다.]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여군에서만 700~800석 재산이 있는 지방 유지였고, [[한성부]] 또한 자주 드나들어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노량진동|노량리]](現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공원]]) 앞에 집이 있을 정도였으며, [[시흥군]] 상북면 [[구로동|구로리]](現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에도 토지를 소유했다고 한다. 아버지 박동익은 1902년([[고종(대한제국)|고종]] 39) 내부 주사(內部主事)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4A_14A_00100_2006_192_XML|역임한]] 관료 출신이기도 하다. 출생 이후 첫째 작은아버지인 [[진사]][* 1891년(고종 28) 증광 [[진사|진사시]]에 3등 35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9141|입격했다]].] 박동한(朴東翰, 1873. 11. 11 ~ 1894. 9. 14)에 입양되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고향 마을에 있던 신명의숙(信明義塾)에 입학해 졸업했다. 졸업 후 상경해 [[휘문의숙]]에서 수학하다가 1915년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신명의숙 재학 시절 스승이었던 [[이세영(1870)|이세영]][*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72|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이시영(정치인)|이시영]](李始榮)으로 기재돼 있으나, 이시영은 관직생활을 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회영]] 등 형제들과 이미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망명했으니 이는 명백한 오기이다.]이 활동하던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고, 졸업 후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겸 학도감에 취임했다. 1919년 8월 7일 [[북로군정서|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가 창설되자 [[서일]]·[[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945|현천묵]](玄天默)·[[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2|계화]](桂和)·[[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69|김규식]](金奎植)[*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과는 동명이인이다.]·[[이범석]] 등과 함께 주요 간부로 참여했고, 그해 10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832|백종렬]](白鍾烈)·[[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365|오상서]](吳祥瑞)·[[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82|이운강]](李雲岡)·[[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94|최해]](崔海)·강화린(姜化麟)·김춘식(金春植)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에 입대했다. 이후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왕청현]]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둥광진(東光鎭) 스리핑촌(十里坪村).]에 북로군정서 부설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립해 교관 겸 훈육부장, 학도단장(學徒團長)에 취임했고, 1920년 4~5월 사이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4890|이경상]](李京相)에게 북로군정서 가입을 권유하는 등 사관생도를 모집해 단기교육을 실시하는 데에 힘썼다. 1920년 7월에는 독립군총사령 [[김좌진]]의 부관이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연성대장(鍊成隊長)으로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해 전공을 올렸다. 이후 [[관동군]]의 추격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갔으나 1921년 6월 27일 일어난 [[자유시 참변]] 이후 무기를 구입해 길림성으로 되돌아왔다. 1922년에는 북로군정서 부사령관에 취임했고, 1924년 1월 [[대한독립군단]]에 입대해 [[이범윤]]·김좌진·신일헌(申日憲)·한함산(韓咸山)·최대갑(崔大甲)·조생갑(趙生甲)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강화했다. 1924년 5월에는 북로군정서 진영을 재정비, 재조직하게 되면서 행정부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6월에는 대한독립군단 부관장에 취임했다. 1925년 2월에는 [[3.1 운동]] 6주년을 기념해 길림성 [[지린시|길림현]](吉林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에서 등사판의 선포문을 작성해 국내에 있던 국민협회 등에 배포해 군사교육의 확립, 식산흥업의 촉진, 민족의식 향상을 위한 문화보급 등을 강조했다. 1925년 3월 길림성 연길도 영안현(寧安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에서 김좌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1421|남극]](南極)·[[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3096|최호]](崔灝)·(劉賢)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단 대표로서 신민부 조직에 참여해 보안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민병제를 실시하고 출전을 기다리는 휘하 장병들을 훈련했으며, 계몽사업을 전개하고 군인의 질적향상을 위해 길림성 의란도(依蘭道) 목릉현(穆棱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무링시(穆棱市).]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한 뒤 백종렬과 함께 교관에 취임해 청년 군인 500여 명을 양성했다. 한편, 1924년 9월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별동대(別動隊)를 조직해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영안현 해림보(海林堡)[* 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海林市).]에서 활동하던 초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87|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 배두산(裵斗山)을 암살하고 [[하얼빈시]]에 있던 조선인민회 지부를 습격해 [[http://db.history.go.kr/id/oh_021_0020_0050_0050|와해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국내진입을 수행하기 위한 예비공작을 추진해 이중삼 등으로 구성된 특수공작대를 조직했는데 이들은 1927년 8월 국내에 잠입해 [[함경남도]]·[[함경북도]]·[[강원도]]·[[경상남도]]·[[경상북도]]·[[전라남도]]·[[전라북도]] 지역의 작전지도를 작성하고 [[일본 제국 육군]] 주재소 위치 등을 파악했다. 1926년 4월 김좌진의 명령으로 항일운동의 군자금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김해창(金海昌)·주영진(朱榮鎭) 등과 함께 러시아 제3[[국제공산당]] 극동본부가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어 [[소련 공산당]]과 접촉을 취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1927년 러시아 첩보기관인 국가정치국(GPU)에 체포되었고, 1930년 연해주 고루지게에서 피살돼 그 자리에서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popup=popup&goTocode=20003&postYear=2020&postMonth=10|순국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부여군 출신 인물]][[분류:함양 박씨]][[분류:1896년 출생]][[분류:193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신흥무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