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5.18 민주화운동)] ||<-2> [[파일:84490696_1.jpg|width=100%]] || ||이름||박관현(朴寬鉉[* [[http://mn.kbs.co.kr/news/view.do?ncd=1355179|5.18 수배자 명단]]])|| ||<|2>출생||[[1953년]] [[6월 19일]]||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2>사망||[[1982년]] [[10월 12일]] (향년 29세)|| ||[[광주교도소]]|| ||가족||[[아버지]] 박정한, [[어머니]] 이금녀[br][[남동생]] 4명, [[여동생]] 3명|| > '''민주화의 새벽 기관차.'''[* 박관현 열사를 다룬 평전의 소개글[[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023782|#]]] >나는 보았습니다 / 낮이고 밤이고 일 년 삼백예순 날 / 햇살 한 줄기 제대로 못 구경하던 그들이 / 푸르고 푸른 오월의 하늘 아래서 / 입이 째지도록 하품을 하고 /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친 듯 기지개를 켜는 것을 //(……) 당신의 죽음으로 박관현 동지여 / 우스운 당신 한 사람의 죽음으로 / 만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싸우는 인간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 >[[김남주(시인)|김남주]],「한 사람의 죽음으로-박관현 동지에게」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 일생 == === 유년시절 === 1953년 6월 19일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의 빈농 가정에서 아버지 박정한과 어머니 이금녀 슬하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https://www.kdemo.or.kr/patriot/name/%E3%85%82/page/1/post/212|#]] 고향에서 불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광주]]로 유학하여 [[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동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육군 병장으로 복무하였으며, 만기전역 한 후 1978년 3월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한 박관현은 1978년 12월부터 2개월 동안 광주시 [[서구(광주)|서구]] [[광천동]] 지역의 노동실태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들불야학에서는 [[윤상원(1950)|윤상원]]과 함께 노동자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 [[서울의 봄]]과 [[5.18 민주화운동|5.18]] === [[파일:1348562133-10.jpg]] [[youtube(KPKtk-Pblvw)] >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여러분의 함성이 전 국토와 민족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쳐봅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남도민, 아니, 우리 민족 모두가 이 횃불을 온 누리에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 연설 [[10.26 사건]] 이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전국의 각 대학들은 다시금 활발하게 민주운동과 학생운동에 나섰다. 전남대학교 또한 그 변화의 물길 가운데 서 있었다. 박관현은 1980년 4월의 총학생회 선거에서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총학생회장으로서 그는 한 달 후에 있던 민족민주화성회를 주도했다. 거기서 박관현은 일장 연설을 한 후 [[5.18 민주화운동|"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 모이자"]]고 말했다. 하지만 곧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그를 포함한 학생지도부는 검거 대상으로 들어갔다. 박관현은 동지들과 함께 급히 도피했다. 그는 먼저 전남 여수로 갔다가 서울의 동생 집을 통해 인근 친척집에서 은신하게 된다. [[제수]]의 소개로 한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신군부에게 잡히지 않고 박관현은 1년 정도 버텼다. 하지만 그는 5.18 때 죽어간 [[윤상원(1950)|친구]]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숨어서 사는 놈'이라는 독백도 자주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현상금을 노리는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1982년 공장으로 출근하던 길에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되었을 때 은신처를 제공해주었던 제수도 붙잡혔는데, 서울로 이송되면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br]제수 : 왜 피하지 않았느냐. [br]박관현 : 죄인도 아닌데 왜 피하느냐. '''죄인은 바로 신군부다.''' 5월 진실을 밝혀야 한다.] === 투옥과 단식투쟁 === 박관현은 재판에서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1982년 7월부터 '''"[[5.18]] 진상규명, 재소자 처우 개선"'''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50일 간 3차에 걸친 단식투쟁이 이어졌고, 끝내 그는 급성심근경색과 급성폐부종 증세를 보이며 1982년 10월 12일에 2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의 유언은 이러했다. >'''3천만 우리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면 내 목숨을 바치겠다. 재소자 2천 명의 처우가 개선되도록 하였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소.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 그가 사망한 후 10월 13일부터 11월 초까지 [[전남대]]에서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항의시위가 크게 열렸으며, 서울의 여러 대학들도 이에 동참하여 박관현의 사인을 규명하라고 외쳤다. [[광주교도소]]의 양심수 40여명도 단식농성을 벌이며 신군부의 폭력성을 규탄하기도 했다. === 이후 === 2015년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묘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5·18 정신은 우리 민주주의 역사이자 희망입니다'라고 적었다. 박 소장은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직후인 1996년부터 2년 가량 [[광주지방검찰청]] 부장검사를 역임했다.[[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93103|법률신문]] 시간이 지난 2022년, 박관현기념재단은 오전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4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577129|#]] 고(故) 박관현 열사의 유족 9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이 7월 6일 첫 변론을 열었다. 이후 2022년 10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15부는 박관현 열사의 누나인 박행순 씨 등 유족 9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건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586903)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582364|#]] 이 때문에 비슷한 재판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586873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1990년 8월 개정된 옛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 보상법)은 유공자 등이 보상금 지급에 동의한 경우 ‘재판상 화해’ 효력이 있다고 명시해 국가를 상대로 더 이상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했다. 이에 대해 헌재는 “5·18 보상법 조항에 ‘보상금을 산정할 때 정신적 손해를 고려할 수 있다’는 내용이 없다”며 “정신적 손해에 대한 적절한 배상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582364|#]] == 기타 == 조기조[* 1963년생.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989년 <노동해방문학>,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낡은 기계> <기름미인> 등이 있다.]가 쓴 시도 있다. 제목은 역시 '박관현'. 1992년 '전국노동자문학회'의 망월동 대동제에서 발표되었다. ||한 남자가 묘지 앞에 앉아 있었네 죽어서 이름조차 없이 빗돌에 새겨진 무명열사의 묘 한 남자가 빗돌을 쓸며 앉아 있었네 그 남자 묘지 앞에 울고 있었네 살아서 부끄러운 이름으로 무명열사......그 이름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 그 남자 빗돌을 쓸며 울고 있었네 그 남자 무덤 속으로 들어가 누웠네 밤마다 찬 이슬 찬 서리 저리 내리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 누운 그 남자 그 이름 이제 누구에게나 성스럽네. || == 참고자료 == * [[https://brunch.co.kr/@1980may18/125|들불7열사 박관현, 5·18 전남대 총학생회장]] * <새벽기관차 박관현 평전>, 최유정, 사계절, 2014 *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 박관현 전 전남대 총학생회장>, 김재영, <서울신문>, 1998년 9월 17일자 * <1980년대 민주화운동> 제2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7, 920~923쪽 *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제1권,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 164~165쪽 [[분류:민주운동가]][[분류:열사]][[분류:5.18 민주화운동/관련 인물 및 단체]][[분류:영광군 출신 인물]][[분류:1953년 출생]][[분류:1982년 사망]][[분류:아사한 인물]][[분류:광주고등학교(광주) 출신]][[분류:전남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