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소련군/원수)] ---- || '''{{{#ffe400 바실리 추이코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소련 육군 총사령관)] ---- [include(틀:역대 서부군집단 총사령관)]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40000, #D40000 20%, #D40000 80%, #a40000)" '''{{{#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5대 지상군 총사령관[br]{{{+1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br]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уйко́в[br]Vasily Ivanovich Chuikov}}}'''}}}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Vasily_Ivanovich_Chuikov_SH022.jpg|width=100%]]}}}|| ||<|2> '''출생''' ||[[1900년]] [[2월 12일]] || ||[[러시아 제국]] [[툴라|툴라현]] 베뇹스키군 세레브라디예 프루디 마을[br](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주 세례브라디예 프루디구 세례브라디예)|| ||<|2> '''사망''' ||[[1982년]] [[3월 18일]] (향년 82세) ||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어머니 조국상|마마예프 쿠르간]] || ||<|2> '''재임기간''' ||제5대 지상군 총사령관|| ||[[1960년]] ~ [[1964년]] [[6월]]||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이반 이바노비치 추이코프[br][[어머니]]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추이코바[* 혼전성은 카랴키나(Карякина).] || ||<|2> '''복무''' ||[[소련 육군|소비에트 지상군]] || ||[[1918년]] ~ [[1972년]] || || '''최종 계급''' ||[[원수(계급)|원수]] {{{-2 (소비에트 지상군)}}} || || '''주요 보직''' ||지상군 총사령관 || || '''주요 참전''' ||[[겨울전쟁]][br][[폴란드 침공]][br]'''[[스탈린그라드 전투]]'''[br][[바그라티온 작전]][br][[베를린 전투]] || ||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br][[10월혁명훈장]][br][[레닌훈장]] (9회)[br][[수보로프 훈장]] 1등급 (3회)[br][[적기훈장]] (4회)[br][[적성훈장]] ||}}}}}}}}}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external/worldoftanks.asia/vasily_chuikov.gif|width=100%]]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eab7e0be5e215bb726dae17f91684d22.jpg|width=100%]] || {{{-1 ▲ (좌)[[원수(계급)|원수]] 진급 이후 찍은 사진으로, 왼쪽 가슴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상훈)|훈장]] 2개가 보인다. (우)노년의 초상화.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맹활약한 [[소련 육군]]의 지휘관. 최종 계급은 [[원수(계급)|원수]].[* 전쟁 중에 진급한 것은 아니고, 1955년에 진급했다.] 일반인에게는 [[독소전쟁]]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 유능한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보다는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분전한 소련군 지휘관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후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전투]]에도 참가해 큰 전공을 세운 유능한 장군. 사진에서도 드러나는 강한 인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매우 불같은 성격을 지닌 [[맹장|전형적인 야전 지휘관 타입의 장군]]이었다. == 생애 ==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 1900년 [[모스크바]] 남부 세레브라녜 프루디(Serebryanye Prudy)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고, 1918년 4월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1918-1920년에는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제5군의 일원으로 [[적백내전]]에 참전했고, 여기서 맹활약한 공로로 [[적기훈장]]을 받는 등 군공을 쌓으면서 20세의 나이로 [[연대장]]까지 승진했다. 1921~25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고급 장교 교육을 받았고, 1936년에는 기계화학교에 들어가 기갑 전술을 배웠다. === [[제2차 세계 대전]] === ==== [[폴란드 침공]]과 [[겨울전쟁]] ==== 이후 기계화[[여단장]]으로 승진했고, 1939년 9월 17일에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의 벨라루스 전선군 휘하 제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폴란드 침공]]에 참가하였다. 동년 11월에 벌어진 [[겨울전쟁]]에도 제9군을 이끌었으나 패배하였다. 겨울전쟁 종전 후 1940년부터 1942년 3월까지는 [[중일전쟁]]이 벌어지던 [[중국]]에 파견되어 [[장제스]] 휘하 [[중국 국민당]]군의 군사 고문을 맡았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중국에 있었지만, 1942년 5월에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 [[독소전쟁]] ====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분투 ===== || [[파일:external/media-cache-ak0.pinimg.com/251f2c0838d895a7c649dc679ae4c79b.jpg|width=100%]] || || ▲ [[스탈린그라드 전투]]때의 추이코프 || 이후 소련으로 돌아오자마자 1942년 5월부터 제1예비군사령관이 되었다.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제64군으로 개칭되어 투입되었는데,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이었던 안드레이 예료멘코는 8월에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수비하게 된 제62군 사령관 [[https://en.wikipedia.org/wiki/Anton_Lopatin|안톤 로파틴]]이 예료멘코와의 대화에서 너무 패배주의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임하고 그 자리에 추이코프를 앉혔다. [[스탈린그라드]]는 [[루프트바페]]의 무차별 공습에 의해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수많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역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독일 기갑 부대의 진격을 저지하고 소련군에게 엄폐물을 제공하는 호재로 돌아오기도 했다. 추이코프는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장기인 제병협동의 화력과 공중 지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포병]]의 지원 하에 독일군에 바싹 붙어 공격하는 근접 전술[* 추이코프는 이를 '[[https://tarnmoor.com/2012/12/26/hugging-the-enemy/|적 껴안기(Hugging the enemy)]]'라고 불렀다.]을 펼쳤다. 독일군의 장기인 제병협동이 이 전술 앞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했는데, 아군 가까이 붙은 소련군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다가는 [[팀킬]]이 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이 전술은 좁은 구역에서 진행되는 [[시가전]]에서 적은 병력으로 [[독일 국방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으나, 소련군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11월 초에는 거의 [[볼가 강]] 유역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추이코프의 부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독일군을 물고 늘어진 덕에,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 || [[파일:external/ww2gravestone.com/image103.jpg|width=1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ujkov.jpg|width=100%]] || ▲ (좌)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작전을 구상 중인 62군 지휘부. 오른쪽부터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중장[* 1901-1943,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 [[티푸스]]에 걸려 병사했다. 티푸스가 당시 그 일대에서 유행하면서 소련군과 추축군 포로를 가리지 않고 격전으로 심신이 지친 군인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독일군 포로 9만 명 중 종전 후 5천여 명만 귀환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전염병 탓이다. 어쨌든 구로프는 지휘권에 간섭하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62군의 사기를 계속 유지시켜 정치장교로서 이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추이코프[* 신경성 습진 때문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참모장 [[니콜라이 크릴로프]] [[소장(계급)|소장]][* 1903-1972, 이후 5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극동 군관구와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 전략로켓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재임 중이던 1962년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다.]. ▲ (우)[[스탈린그라드 전투]] 때로 추정되는 사진.[*각주 별 3개지만 계급은 중장이다. 장성용 카라 한정으로 1성 카라장에 별 2개를 박기 때문.] 이렇게 추이코프가 독일군의 주의를 끌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 총군부사령, [[니콜라이 바투틴]] 남서전선군 사령관은 스탈린그라드 양익에 은밀하게 병력을 집중시켰다가 총공격을 퍼붓고, 시내에 못박힌 독일 제6군을 포위해 전멸시키는 일명 '천왕성 작전(Operation Uranus)'를 입안하고 실행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적으로 추이코프는 상장[* 서방군 계급 기준으로는 [[중장]]에 해당한다.]으로 진급했다, ===== [[바그라티온 작전]]과 [[베를린 전투]] ===== 이후 추이코프는 제8근위군으로 개편된 제62군을 종전 때까지 계속 지휘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성과에서 보듯이 추이코프는 시가전에도 능했지만, 원래 전공인 [[기동전]]에도 능해서 1944년의 [[바그라티온 작전]] 때는 벨로루시에서 폴란드까지 하루에 100km 이상을 전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43년 7월에 있었던 사상 최대의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2군이 너무 소모되어 그 때까지도 병력과 물자 보충 등 개편 작업이 덜 끝난 듯하다.] 작전의 성공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파일:external/tarnmoor.files.wordpress.com/chuikovpoints.jpg|width=450]] ▲ 작전 설명을 하는 추이코프. 상장 계급장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획득시 주어지는 금성메달을 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바그라티온 작전 후의 사진으로 보인다. 베를린 전투 때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라루스전선군에 소속되어 베를린 공략의 주공을 맡았다. 경쟁자인 [[이반 코네프]]보다 먼저 베를린을 점령하려던 [[게오르기 주코프|상관]]의 우격다짐 때문에 젤로 고지 전투에서는 삽질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베를린으로 먼저 진입해 베를린 방어 총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 전후 === 종전 후에는 주코프와 [[바실리 소콜롭스키]] 원수 휘하에서 [[서부군집단|독일 주둔 소련점령군집단]] 부사령관으로 근무했고, 1948년에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했다. 이듬해 4월에 소콜롭스키의 후임으로 독일 주둔 소련점령군집단사령관이 되어 1953년까지 재임했고,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소련으로 돌아와 [[키이우|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맡았다. 1955년에 소련 [[원수(계급)|원수]]로 최종 진급했고, 1956년 2월, 20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을, 1961년부터 1972년까지는 소련 시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은 뒤 은퇴했다. 1961년 10월, 소련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이후 죽을 때까지 중앙위원으로 재직했다. 은퇴 후에는 명예직인 국방부 총감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 들어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적백내전]] 당시 왼팔에 입은 상처가 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이코프는 이 부상 때문에 평생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용맹한 군인으로서 얻은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치료를 거부하고 내버려 두었다. 결국 이 상처는 1981년에 [[패혈증]]으로 악화되었고, 9개월 동안 투병하다가 [[모스크바]]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만 [[https://en.wikipedia.org/wiki/Vasily_Chuikov#Jones|추이코프의 활약을 기린 서적을 인용한 영문위키]]에 따르면 추이코프는 적백내전 때 4번의 부상을 입었으며, 특히 1920년 폴란드에서 왼팔에 박힌 파편이 패혈증을 유발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 파편은 '''수술로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면 대안으로 팔을 자를 수 있었을 것이고, 추이코프가 이를 거부했을 수는 있다.] 다른 소련 원수들은 사망 후 모두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지만, 추이코프의 유해는 [[볼고그라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관인 [[어머니 조국상|마마예프 쿠르간]]에 묻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lingrad_graf_Tsjoeikov.jpg]] ▲ 볼고그라드에 위치한 추이코프의 묘비 == 진급 이력 == * 1940년 6월 4일: [[중장]] * 1943년 10월 27일: [[상장(계급)|상장]] * 1948년 11월 12일: [[대장(계급)|대장]] * 1955년 3월 11일: [[원수(계급)|원수]] == 기타 == * [[게오르기 주코프]]와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매우 나빴고, 주코프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의 전선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에도 추이코프의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상술한 안톤 로파틴 중장이 [[찌질이]] 같이 행동했다는 것은 예료멘코와 추이코프의 주장인데, 반대로 주코프는 로파틴이 정비 태세를 잘 갖춰 놨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가 로파틴 덕분이라고 자기 회고록에 기록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 * 조급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은 전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지상군 총사령관 시절이었던 1961년에 미국은 [[M60 전차|M60A1]]이라는 강력한 전차를 뽑아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지부진했던 신형 전차[* Object 430. 부족한 성능과 늦은 개발로 양산이 취소되고 자동장전장치와 함께 주포의 화력과 방어력이 더 증가된 Object 432 및 Object 434 개발안으로 변경되어 [[T-64]]로 양산된다.] 개발 상태를 보고 빡친 나머지 양산이 예정되었던 저 신형 전차를 기존 T-55보다 고작 10% 강할 뿐인 쓰레기라고 비하하면서 양산을 취소해버리고 일종의 실험용 및 보험용 전차로 완성되어 있던 [[T-62]]와 T-62A를 대신 양산하라고 지시한 에피소드도 있다. 이 때 "포신안정장치 그딴 소리 집어치워! '''돼지 위에 얹어놓고 그걸 전차라고 우겨도 상관없으니까 당장 115밀리 포 전차를 내놔!'''"라고 하며 그냥 T-62를 양산시켰다. --[[김정은/행보#s-2.3|포에 돼지를 올려]] [[러시아식 유머|놓기는 했다]]-- * [[중일전쟁]] 중에 [[중화민국]]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인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한다. == 매체에서 == [[파일:external/vignette2.wikia.nocookie.net/Chuikov.jpg|width=400]] --실제와 다르게 너무 순해진 것 같다-- ||[youtube(bGEMfk_E4NI,width=480, height=360)]|| ||General Krebs vs Marshall Chuikov ~~General Map Pointer... [[다운폴/패러디|어?!]]~~|| * 배경이 [[베를린 전투]]인 영화 [[다운폴]]에도 잠깐 등장한다. 휴전 교섭을 하려고 자신의 사령부에 찾아온 독일군 [[육군참모총장]] [[한스 크렙스]]와 갑작스럽게 회견하게 되자, 유일한 민간인이라 교섭에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마트베이 블란테르[* 그 유명한 [[카츄샤#s-2|카츄샤]]의 작곡자다.]를 옷장에 쑤셔박는 장면(위 영상 45초부터 등장)이 일품. 블란테르는 교섭 도중 결국 졸도하여 옷장 밖으로 쓰러졌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교섭을 계속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거 실화다. 장교들에게 [[훈장(상훈)|훈장]]을 나눠주는(?) 이유는, 추이코프의 직속 부하인 장성들은 모두 야전에 나가 있고 해군 소령과 육군 소위만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장군인 척 연기한 것이다. 하지만 추이코프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죽었다는 소식에 놀라는 등 어리버리한 신출내기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포인트. 또한 크렙스는 소련에서 10년 이상을 외교관으로 보냈기에 당연히 장교들의 계급장[* 추이코프가 식탁에 앉은 후 썸네일 기준, 왼쪽은 육군 소위이고 오른쪽은 해군 소령이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헛수고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다운폴/패러디|필수요소]]에 등극했다. 기믹은 무엇이든지 집어넣는 만능 옷장의 소유자(...). * 1949년에 만들어진 소련 영화 [[http://www.imdb.com/title/tt0041727/|베를린 함락]]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부터 베를린 전투까지 가장 비중 있는 장성으로 등장한다. 마지막에 스탈린이 함락된 베를린에 올 때 이를 영접하는 이도 추이코프고, 스탈린은 "추이코프 동지 수고했소"라고 답례한다. 원래대로라면 주코프가 가장 부각되어야 할 장성이었지만, 주코프는 영화 제작 당시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스탈린의 미움을 받아 후방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된 상태였으므로 추이코프를 대신 띄워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주코프도 영화 1부에서 [[바실렙스키]]와 함께 스탈린과 작전 회의를 하는 스타브카의 수뇌부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홀대받지는 않았다.] * [[스타트렉]]에 나오는 엔터프라이즈 호의 승무원 [[파벨 체코프]]는 추이코프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 주요 서훈 == *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1944, 1945) * [[레닌훈장]] 9회 (1943, 1944, 1945, 1950, 1960, 1970, 1975, 1978, 1980) * [[10월혁명훈장]] (1968) * [[적기훈장]] 4회 (1920, 1925, 1944, 1948) * 수보로프훈장 1급 3회 (1943, 1944, 1945) * 적성훈장 (1940) *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조국공로훈장 금장 2회 * 동독 인민친선의 별 훈장 대십자장 * [[폴란드]] 그룬발트 훈장 2급 * 폴란드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금십자장 * 폴란드 부흥훈장 3급 * [[몽골]] 수흐바토르 훈장 * [[미국]] [[수훈십자장]]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소전쟁/군인]][[분류:1900년 출생]][[분류:1982년 사망]][[분류:소련군 원수]][[분류:소비에트 연방 영웅]][[분류:모스크바주 출신 인물]][[분류:러시아 지휘참모대학교 출신]][[분류:소련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분류:소련 공산당 20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분류:소련 공산당 22기 중앙위원회 위원]] [[분류:소련 공산당 23기 중앙위원회 위원]] [[분류:소련 공산당 24기 중앙위원회 위원]] [[분류:소련 공산당 25기 중앙위원회 위원]] [[분류:소련 공산당 26기 중앙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