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external/www.vijesti.me/214964.jpg|width=100%]] || || 이름 || 아오 약시치[br](Mилoвaн Jaкшић / Milovan Jakšić) || || 생년월일 || [[1909년]] [[9월 21일]] || || 사망년월일 || [[1953년]] [[12월 25일]] || || 국적 ||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 현재 [[몬테네그로]] 지역 출신.] || || 출신지 || 콜라신 || || 포지션 || 골키퍼 || || 신체조건 || 177cm / 80kg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 [[FK 바스크|SK 소코]][* 1933년 팀명을 바스크로 변경.] (1929~1939)[br]ND 일리리야 (1931~1932, 임대) [br] [[SK 슬라비아 프라하]] (1934~1935, 임대)[br]NK 류블랴나 (1938~1939) || || 국가대표 || 9경기 0골 (1930~1934) || [목차] == 개요 == > '''위대한 밀로반''' == 생애 == === 선수 생활 === 밀로반 약시치는 지금은 [[몬테네그로]]에 위치한 콜라신에서 태어났다. 1929년에 데뷔하였지만 그는 뛰어난 기량으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매치에도 데뷔하였다. 그의 A매치 데뷔전은 1930년 4월 13일.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불가리아]]를 상대로 치렀으며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는 불가리아를 6대1로 짓밟았다. 여기에서도 그는 유감없이 기량을 발휘하며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초대 월드컵]]에 참가하는 대표팀에도 선발이 되었고, 주전 골키퍼로 낙점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과의 첫 경기에서 약시치는 뛰어난 기량으로 브라질의 공격을 1골로 막아내는데 성공,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2조의 시드 배정국이 브라질이었고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오랜 유럽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심했음까지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브라질선수들이 한 팀으로 뭉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브라질은 결국 이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밀려 4개의 시드 배정국 중 유일하게 짐을 싸고 말았다. 덕분에 유고슬라비아는 유럽팀 중 유일하게 준결승전에 진출하였으며 약시치는 당시 월드컵을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위대한 밀로반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비록 호스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를 만나 6대1로 대패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약시치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는 총 9경기의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으며 마지막 경기는 1934년 9월 2일,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였다. 프로팀에서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SK 바스크에서 보냈으며 우승 트로피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 이후 === 그는 은퇴 이후에 직접 [[감독]]을 맡지는 않았지만 축구계와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1945년, 약시치는 [[베오그라드]]에서 한 축구 클럽의 창단에 공헌하는데 그 클럽이 바로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였다. 그는 팀에서 기술 감독으로 일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축구계에서 축구 코치 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1953년, [[카이로]]에서 즈베즈다의 원정길에 동행하던 중 [[심장마비]]로 인해 44살의 나이에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골키퍼로서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강한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최고의 장점은 용기와 빠른 반사 신경이었다. [각주] [[분류:1909년 출생]][[분류:1953년 사망]][[분류:유고슬라비아의 축구선수]][[분류:SK 슬라비아 프라하/은퇴, 이적]][[분류:유고슬라비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참가 선수]][[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