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민영진}}}'''[br]'''閔泳軫[*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6238|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閔泳'''{{{+1 鎭}}}''' 또는 閔'''{{{+1 永鎭}}}'''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민영진.jpg|width=100%]]}}} || || '''자''' ||악암(岳岩) || || '''본관''' ||[[여흥 민씨]][* 입암공파(立巖公派) 28세 영(泳) 항렬.] || ||<|2> '''출생''' ||[[1869년]] [[6월 24일]] || ||[[전라도]] [[전주시|전주부]] 부북면 일리[br](現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404번지) || ||<|2> '''사망''' ||[[1947년]] [[7월 19일]] (향년 78세) || ||[[전라북도]] [[전주시]] || || '''종교''' ||[[천도교]]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309호 || ||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69년 6월 24일 전라도 전주부 부북면 일리(現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404번지)에서 아버지 민성호(閔成鎬, 1832 ~ ?)와 어머니 [[김해 김씨]](1828 ~ ?)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입교했고, [[동학 농민 혁명]]에 [[http://www.cdpr.go.kr/commit/?menu=231&pno=63&limit=0&mode=view&no=1735|가담했다]]. 1894년 5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자 집강소 활동을 전개했고, 1894년 10월 [[충청도]] [[논산시|논산군]]에서 벌어진 논산전투와 전주부 창덕면 후정리(現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삼례역]] 부근에서 벌어진 삼례전투 등에 참전했으나 일본군에게 패하자 피신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부 천도교구의 보성사 인쇄소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인종익]]이 전주군 천도교구실에서 [[기미독립선언서]] 1,700여 매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6063|김진옥]](金振玉)·배상근(裵祥根)에게 전달했고, 김진옥과 배상근은 다시 천도교 신도인 민영진을 비롯해 조성덕(趙聖德)·김성문(金成文)·[[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61|김영호]](金永浩) 등에게 기미독립선언서 1,700여 매를 각각 나눠 주었다. 민영진은 이때 건네 받은 기미독립선언서를 3월 1일 당일부터 이튿날 밤까지 전주면 읍내의 도로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배포하고, 이어 전주군 각 면에 배포했다. 그리고 3월 2일에는 전주군 천도교구실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각각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2439|유선태]](柳先泰)에게 5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547|김태경]](金太京)에게 9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1960|서호순]](徐鎬淳)에게 4매를 건네 주어 다른 사람들에게 배포하도록 하고, 평소에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던 [[기독교]] 교단과도 연락해 만세시위 날짜를 3월 13일 전주면 읍내 장날로 잡는 등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별세했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9년 4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완산구 출신 인물]][[분류:여흥 민씨 입암공파]][[분류:1869년 출생]][[분류:1947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