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learfix] == 개요 == >'''백성이 나를 비판하는 내용이 옳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니, 처벌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나를 오해하여 그릇된 마음으로 나를 비판하였다고 하여도, 그런 마음을 품지 않도록 만들지 못한 내 잘못이니, 어찌 백성의 잘못이 있겠는가?''' >---- >[[조선]] 제4대 국왕 [[세종(조선)|세종]] '''민본주의'''(民本主義 / Democracy[* 원류인 [[동양]]에서는 [[유교]] 민본주의 국가가 소멸했고, [[서양]]에는 민본주의라는 개념이 없어 영어로 [[민주주의]]와 같은 단어가 되었다.])는 [[국민]]의 이익과 [[행복]]의 증진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정치사상이다. [[한자문화권]]의 통치이념의 일종으로서 직역하면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것'이며, 뜻은 백성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서양과는 다른 동양 특색의 [[인본주의]][* [[한자문화권]]에서는 국가적으로 신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적었다.]에서 비롯되었다. == 민본주의의 등장과 발전 == 민본주의의 토대는 동양의 각 지역에서 따로 발전한 [[인본주의]]에서 기반한다. 동양의 신앙은 [[샤머니즘|원시신앙]]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발전을 멈췄는데, 덕분에 동양에서 발전한 [[인본주의]]가 국가/사회에 필요한 통치 철학과 합쳐져서 동양 특유의 철학적인 [[유교|종]][[도교|교]]로 구성된다. 때문에 이 동양 종교들은 인민들의 생활양식을 결정해주거나 국가의 결속력을 강화해주기 위한 방식으로 발전하게된다. 이러한 동양 종교가 생기던 동양사의 초창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노나라]]의 [[공자]]가 정명론을 기반으로 예를 중요시하는 유교를 창시하면서 민본주의가 시작되었다. 초창기의 민본주의는 국가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춘추전국시대]]에 국가를 존속시키고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세금|세수]]와 [[군대|병력]]의 근간인 백성들을 잘 관리해야한다는 개념으로 출발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애민주의적인 관점이 없지 않았다.] 결국 법가를 중심으로한 [[진(영성)|진나라]]가 승리하자 유교와 함께 민본주의도 [[분서갱유|쇠퇴]]하고 진나라가 [[초한쟁패기|무너지고]]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한나라]]가 건국되자 민본주의도 다시 [[훈고학|발굴]]된다. 진나라의 문제점을 반면교사 삼아서 유교의 [[예절|예]]를 근간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지만, 정명론의 색채는 군주와 귀족들만을 옹호하는 것이었고, 민본주의는 무늬로서만 존재했다. 그러다가 수나라에서 선거제가 시작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시작했다. [[수나라]]의 선거제는 [[당나라]] 때에 [[과거제도]]로 발전했고, [[과거제도]]는 전문 [[유학자]]계급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 유학자들이 [[송나라]] 시대에는 [[사대부]]가 되었는데, 이들은 전문 유학자들로서 진정한 의미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성리학]]을 완성해 성리학자가 되었고, 성리학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에 초점을 맞췄는데, [[유교]]의 틀이라는 한계로 [[군주제]]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기도 했고, 훗날 개화기에 [[신분제도]] 타파를 방해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이들 성리학의 [[사대부]]는 [[귀족]] 계급의 시대를 종결짓고, 능력 위주의 新신분제도를 만들어 민본주의를 한차원 더 발전시켰다. [[원나라]]의 증흥으로 [[귀족]] 계급이 완전히 몰락하고 [[명나라]] 건국을 주도한 [[사대부]]들은 온전한 민본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결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맺었는데, 넓은 영토에 [[만주족]]같은 이민족도 다스려야 했던 [[명나라]]는 민본주의를 전 백성들에게 배풀지 못하고 [[청나라]]에게 멸망했으나 조선은 민본주의 실천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 민본주의의 쇠퇴와 종말 == 유교의 통치 이념아래, [[한자문화권]]에서 존속되던 민본주의는 유교 국가들의 종말로서 사라졌다. 19세기 [[동남아시아]] 최대의 유교 국가 [[응우옌 왕조|월남]]이 공식적인 황실만 보존한 채 멸망했고, [[청나라]]가 [[아편전쟁]] 등 서구의 침입에 [[조공]]책봉 체제를 종료하고 개혁정치로 서구적 제국으로 체제를 전환하려다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했으며[* [[청나라]]는 민본주의와는 동떨어졌다. 심지어 [[원나라]]와는 다른 차원에서 만한분리정책까지 있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멸망해 최후의 민본주의 국가[* [[대한국 국제]]에서 민본주의 요소가 없기에 1897년 [[대한제국]] 선포를 민본주의의 종료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있다.]가 지도상에서 사라짐으로서 민본주의는 역사에서 종말을 맞이했고 민본주의가 사라진 자리에는 대부분 [[민주주의]]가 대신하게 되었다. 다만 민본주의적인 동양인의 문화가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아닌데, 여전히 국민의 의사 전달을 우선하는 문화가 동양에 남아있다. 흔히들 '[[민심]]'이라고 부르는 국민 감정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은 사실 서양에서는 그렇게 많지 않다. [[중우정치|다수의 폭정]]을 우려하기 때문. == [[민주주의]]와 민본주의 == 민주주의와 민본주의는 둘다 [[인본주의]]를 기반으로한 애민([[愛]][[愍]]) 정치를 해야함을 기본으로 전제하기에 두 이념은 국민/백성이 잘먹고 잘사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민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 국가에서는 전근대 기준으로 세율이 매우 낮은데, 이는 백성들의 생업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곡물을 적게 걷어감으로서 백성들이 자력으로 삶을 풍족하게 이어나가게 하기 위함이다.][* 민본주의 국가였던 조선과 같은 시기 일본을 비교해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세율은 약 7.5%(사료에 따라 최대 약 15%까지 변동된다.) 일본은 [[센고쿠 시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의 통일 직전 약 60%까지 올랐다가 [[에도막부]] 수립 직후의 공식세율은 21%였다. 이것도 인두세와 과징금을 제외한 수치로 실 세율은 터무니없이 높아서 [[마비키]]와 [[잇키]]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왕권신수설]]에 근거하여 폭주하는 군주의 [[입헌군주제|권력을 제약]]하기 위하여 나온 [[사회계약론]]에 근거했고, 민본주의는 유교의 정명론에 근거하여 군주를 올바른 통치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다. 즉 두 이념은 [[군주제]]에 저항하기 위한 이념과 군주제를 옳게 쓰기 위한 이념이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서양의 문화가 [[개인주의]]에서 출발했고[* 그리스 철학부터 [[신학]]([[카톨릭]])까지 [[개인주의]]를 전제로 한다.] 동양의 문화는 [[공동체주의]]에 기반해 출발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렇게 출발선이 달랐던 이유는 농사에 실패해서 [[곡물]]이 없다해도 [[어업]]/[[수렵]]/[[목축]]업으로 충분히 대규모 [[기아]]라는 재난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던 [[유럽]]과 다르게 동양은 한 해의 농사[* 동양의 주식인 [[쌀]]은 인구부양력이 상당히 높지만 쌀농사라는 농업 자체가 대규모의 인원 동원을 필요로 한다. 즉, 식량 생산자의 대다수가 농민일 수 밖에 없는데, 농사를 실패한단 소리는 다른 식량 대체가 힘들다는 말과 같다.]를 실패하면 대규모의 인구가 [[아사]]하게 되며, 농사에 문제가 없더라도 북방 [[유목민]]이나 농사에 실패한 다른 국가나 민족 같은 집단이 농산물을 [[약탈]]하게 된다면 똑같이 [[아사]]를 면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동양은 서양과 달리 [[집단]]의 존재가 상당히 중요하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이념]]의 차이로 끝나지 않았다. [[유럽]]의 경우 [[절대왕정]]의 등장이 계몽시대 이후로 미뤄졌고 이는 [[아시아]]에 비해 훨씬 작은 유럽의 민족적 분열로 이어진다. 반면 [[공동체주의]]가 발전한 동양은 중원에서 고대에 [[진(영성)|진나라]]와 같은 거대 전제군주 제국을 완성했다. 중원의 제국은 은 자신과 엇비슷한 사회를 가진 집단을 흡수하려고 지속적인 시도를 했고 이렇게 생긴 집단이 [[중화제국]]이며, 이념이 [[중화사상]]이다.] 서양의 [[개인주의]]는 군주로 하여끔, [[신민]]을 자신과는 혈통부터 다른 하찮은 [[귀족]]으로 생각하게 하였고, 이러한 후진적인 생각은 신이란 절대적인 존재조차 자신들의 삶에서 배척한 서양인들의 적개심을 샀고 결국 [[시민혁명]]을 벌어지게 한다. 이러한 사건 속에서 [[민주주의]]와 현대 [[공화제]]가 피어난 것이다. 반면 동양의 [[공동체주의]]는 공동체 집단간 피비린내가 나는 경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동양 군주의 [[제왕학]]을 발전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통치에 필요한 [[유교]], [[법가]] 등의 이념을 발전시켰고, 군주와 백성을 일종의 '사회적 가족관계'로 엮어서 감히 군주가 백성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거나 백성들이 군주를 대상으로 [[역성혁명]]을 일으키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군주제]] 시절에 민주주의가 발전한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같은 나라는 [[공화주의]]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아 군주제를 유지했는데, 민본주의적 이념을 내재한 [[중국]]과 [[한국]], [[베트남]]은 전부 [[공화국]]이 되어버렸다.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와 그에 뒤따른 [[공산주의]]를 불러일으키는데 반하여, 민본주의는 공동체가 일단 완성이 된다면 [[평화]]를 대가로 경쟁을 멈추어버렸고 이것이 동서양의 격차를 벌렸다. 그 결과 19세기 동아시아의 민본주의적 군주국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 앞에 국가적 위기를 맞았고, 결국 무너져내렸다.[* 일본이나 태국처럼 식민지가 되지 않은 동양 국가들은 군주제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 관련문서 == * [[유교]] * [[대동|대동 사회]] * [[성리학]] * [[다이쇼 데모크라시]][* Democracy를 [[천황]]의 절대성에 반하는 [[민주주의]]로 [[번역]]할 수가 없어서 민본주의로 번역했다.] * [[정도전]][* [[삼봉집]] 참조.] * [[허균]][* 호민론 참조.] [각주] [[분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