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문재교(文在敎) || || 이명 ||문병호(文炳浩) || || 본관 ||[[남평 문씨]] || || 생몰 ||[[1879년]] [[11월 15일]] ~ [[1957년]] [[5월 5일]] || || 출생지 ||전라도 순천도호부[br](현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문재교는 1879년 11월 15일 전라도 순천도호부(현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에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한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1917년 5월까지 꾸준히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끝에 [[박상진]]과 [[채기중]]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에 가담하였으며[[http://www.kwangbokdan.com/html/02/mb089.htm|#]], 이후 [[정동근(독립운동가)|정동근]]·양기중(梁基重)·[[양재홍]]·[[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3510|김영하]](金榮夏)·[[김교락]]·[[http://www.kwangbokdan.com/html/02/mb009.htm|고성후]](高成厚) 등의 동지와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이후 권총·쇠몽둥이·도검 등을 휴대하고 [[나주시|나주]]·[[함평군|함평]]·[[화순군|화순]]·순천 등 주로 전라남도 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그러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18년 6월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3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으나 곧 징역 5년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7년 5월 5일 별세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순천시 출신 인물]][[분류:남평 문씨]][[분류:1879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