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문남은(文南恩) || || 생몰 ||[[1875년]] [[6월 28일]] ~ [[1952년]] [[6월 29일]] || || [[출생지]] ||[[전라도]] [[대정읍|대정현]] 동좌면 석송리[br](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후에야 마을 이름이 도순동(道順洞)으로 바뀌었다.[[http://www.jeju.go.kr/vill/dosun/intro/info.htm|#]]] || || 사망지 ||[[제주도]] [[서귀포시|남제주군]]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문남은은 1875년 6월 23일 전라도 대정현 동좌면 석송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 [[문남규]]와 함께 평소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 등과 교류했고, 김연일로부터 민족의식을 주입받았다. 김연일은 일제의 무단통치로 조선 민중이 고통받는 것에 분노해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1918년 봄에 동료 승려 [[강창규(독립운동가)|강창규]](姜昌奎), 방동화(房東華)와 함께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한 후 신도들을 널리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했다. 문남은 역시 여기에 가담했고, 1918년 10월 무렵엔 그 숫자가 3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1918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를 처단하고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내쫓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의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해 동참할 것을 권유해 400명의 군중을 확보했다. 이후 문남은 등은 일본 경찰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를 고립시킨 뒤 중문 주재소를 습격했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일본인 상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사태의 심각성을 조기에 눈치채고 투입했고, 결국 이틀 만에 문남은를 비롯한 모든 동지들이 체포되었다. 문남은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치청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2년 6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문남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서귀포시 출신 인물]][[분류:1875년 출생]][[분류:195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