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KIA 타이거즈)]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nTEaztgefWE)]}}} || || '''[[이난영|{{{#fff 이난영}}}]] '목포의 눈물''''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gBPN12Aww3g)]}}} || || '''KIA 타이거즈 응원가 '목포의 눈물'''' || [[KIA 타이거즈]] 인수 초창기에 [[잠실야구장]]에서 부르는 모습.[* 치어리더의 응원동작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지금 부르는 [[남행열차]]와 응원동작이 똑같다. 남행열차가 목포의 눈물 응원동작을 물려받은 셈이다.] [목차] [clearfix] == 개요 == [[1935년]]에 발표된 노래로 [[민요]]풍의 가락과 구슬픈 곡조가 잘 살아있어 '[[남행열차]]' 와 함께 '''[[목포시|목포]]를 대표하는 노래'''이자 '''[[전라도]]를 대표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지금도 매년 목포에서는 '[[이난영]] 가요제'를 열고 있다. 망국의 한을 표현하는 노래로, 이를 보여주는 '삼백년 원한 품은'이라는 가사가 총독부 검열에 걸리자 '삼백련 원안풍은'으로 바꿔서 발음이 비슷하게 들리도록 바꾼 일화가 있다. == 특징 == 특히 1970-80년대, 상대적으로 차별받던 전라도 사람들의 설움을 달래줬고 전라도를 대표하는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도 매우 유명했다.[* 목포의 눈물이 처음 야구장에서 불려진 것은 [[해태 타이거즈]]가 두 번째로 우승했던 [[1986년]]부터 였다고 당시 타이거즈 선수단 주치의로 활동했던 임채준 박사가 증언했다. 임채준 박사는 충장로 제일극장 인근에 한일정형외과를 개업하여 원장으로 근무했다.] 1980~90년대 당시를 지배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면 [[중립구장 경기|경기장 중립 규정]] 때문에 5~7차전을 잠실에서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해태 타이거즈]]-[[기아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11회 우승 중 [[무등야구장]]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게 1987년([[삼성 라이온즈]]와의 대결) 우승 딱 한 번이었다. 즉, 한국시리즈의 우승을 결정짓는 11번의 경기 중 딱 한 번만 홈 구장에서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는 얘기다.] 이 때 해태 팬들의 응원석 쪽에선 이 노래가 나오면 가히 종교집회를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응원석을 맴돌았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 혀가 꼬여서 노래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역전 홈런이나 안타, 삼진이라도 나오면 울면서[* 임채준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에 온 일본인 지인들과 [[1986년 한국시리즈]]를 보러 갔는데 우승 직후 관중들이 엉엉 울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매우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에 임 박사가 배경 상황을 설명해줬다고 한다.] 이 노래를 불렀다. 전라도 출신의 아버지를 둔 1980년대[* 전라도인의 한(恨) 정서가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 정서의 밑바탕에는 [[5.18 민주화운동]]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생이라면 이 주제를 가지고 한 번 물어보자. 상세하게 설명해주실 것이다. '''한 마디로 전라도의 한(恨)이 담겨있는 노래'''다.[* 넓게 보면 [[8월 15일|해방]]이전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한(恨) 이 담긴 음악이다.] 그러나 [[해태 타이거즈]]도 [[1997년 외환 위기]]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이 때를 시작으로 약해졌으며, 해태를 인수한 [[기아]]는 해태 타이거즈의 색채를 빼기 위해 아예 이 노래를 의도적으로 응원가에서 빼버렸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부분인데, [[KIA 타이거즈]] 구단에서나 응원단에서도 중간중간에 부활했다가 없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등, 이 노래를 응원가로 다시 넣으려는 시도 자체는 꾸준히 했다. 2000년대 중후반에도 잠실 야구장에서 한 팬이 준 가사판을 [[김주일]] 응원단장이 받아서 가지고 다니면서, 첫 음을 높게 잡으면 삑사리가 나니 주의하라면서 7~8회 지고 있을 때는 목포의 눈물을, 이기고 있을 때는 남행열차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당시 올림픽 혹은 WBC 이후에 유입된 팬들이 많아서 가사판을 들고 다녀야 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도 많았고, 질 때 부르는 노래라는 인식이 강해서 호응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후 팬덤의 교체와 프로야구의 스포테인먼트화를 거치면서 목포의 눈물은 점차 잊혀져 갔고, 현재 타이거즈의 젊은 팬 중에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2009년 한국시리즈]] 6차전, 그리고 7차전 우승 확정 즈음 슬그머니 응원가로 복귀했는데, 하필이면 위에 서술된 대로 가사를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바로 호응이 끊겨버렸다. 이후에는 거의 불리지 않는다. 목포 유달산에 가면 노래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 그리고 연이어 나온 목포는 항구다[* 목포의 눈물 까지는 아니지만 이 곡 역시 이난영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 목포를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삼학도에 조성된 이난영 공원에는 이 곡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유달산의 노래비가 먼저 세워졌고, 그 이후 삼학도에 이난영 공원이 조성되면서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를 하나 더 세운 것.] 노래를 기리기 위해 매년 이난영 가요제를 개최한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오프닝 음악으로 쓰였다. 정작 영화의 배경은 [[부산광역시]]다. 원래는 ‘목포의 노래’였다고 한다. 나중에 목포의 눈물로 바뀐 것이라고. == 가사 == >목포의 눈물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 >삼백 년 원한 품은[* 이 부분이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서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으로 고쳤다가 광복 후 환원시켰다.]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 >깊은 밤 쪼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는]]가[* [[서남 방언]]이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 관련 문서 == * [[목포]] * [[응원가]] *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분류:응원가]][[분류:KIA 타이거즈]][[분류:해태 타이거즈]][[분류:목포시]][[분류:1930년대 노래]][[분류:1935년 작품]][[분류:트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