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북주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B190F 0%, #3B190F 20%, #3B190F 80%, #3B190F); color: #ece5b6" '''북주 제2대 황제[br]{{{+1 세종 명황제 | 世宗 明皇帝}}}'''}}} || ||<|2> '''출생''' ||[[534년]] || ||[[북위]] [[위린시|통만성]][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위린시]] 징볜현) || ||<|2> '''즉위''' ||[[557년]] [[11월 5일]] || ||[[북주]] [[시안시|장안]][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560년]] [[5월 30일]] (향년 26세) || ||[[북주]] [[시안시|장안]] 황궁 연수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소릉]](昭陵) || ||<|4> '''재위기간''' ||'''{{{#ece5b6 제2대 천왕}}}''' || ||[[557년]] [[11월 5일]] ~ [[559년]] [[10월 1일]] || ||'''{{{#ece5b6 제2대 황제}}}''' || ||[[559년]] [[10월 1일]] ~ [[560년]] [[5월 30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우문부|우문(宇文)]] || || '''휘''' ||육(毓) || || '''부모''' ||부황 [[우문태|태조]][br]모후 부인 요씨 || || '''형제자매''' ||13남 13녀 중 장남 || || '''배우자''' ||명경황후[* [[독고가라|문헌황후]]의 언니이다.], 후궁 여씨 || || '''자녀''' ||3남 1녀 || || '''아명''' ||통만돌(統萬突) || || '''작호''' ||영도군공(寧都郡公) || || '''묘호''' ||'''[[세종]](世宗)''' || || '''시호''' ||[[명(시호)|명황제]](明皇帝) || || '''연호''' ||[[무성]](武成, [[559년]] ~ [[560년]])[* 559년 천왕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 [[북주]](北周)의 제2대 황제이다. 아명은 통만돌(統萬突)인데, 이 이름은 [[534년]]에 [[우문태]]가 하주의 통만성(옛 [[북하]]의 수도)에 머물렀을 때 출생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통만돌이~~ 아우인 [[효민제]] 우문각을 살해한 사촌형 [[우문호]]에 의해 즉위했지만 결국 그 또한 우문호에게 독살당했다. [[명군]]의 자질이 차고 넘쳤으나 안타깝게도 천시를 못 타고난 비운의 군주였다. == 생애 == === 즉위 이전 === 534년, 우문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이었지만 첩 요씨(姚氏)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적장자인 [[우문각]]이 후계자가 되었다. 성장해가면서 548년에는 영도군공(寧都郡公)으로 책봉되었다. 556년, [[대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북주의 유력한 장군이자, 8주국의 구성원이었던 독고신(獨孤信)의 딸과 결혼했다. 독고신은 자신의 장녀를 우문육에게 시집보내고, 4녀는 당국공(唐國公) [[이병]](李昞)에게 시집보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당고조]] 이연이었다. 또 7녀 [[독고가라]]는 [[수문제]]의 황후가 되어 [[수양제]] 양광을 낳았다. 이복동생인 우문각이 북주(北周)를 건국하고, 천왕으로 즉위했을 때 주국(柱國)이 되었다. === 치세 === 실권자였던 우문호가 효민제를 폐위한 후 서장자인 우문육을 [[천왕]](天王)으로 옹립했다. 초대 효민제 우문각과 제2대 명제 우문육의 치세 초기에는 황제가 아닌 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천왕 옹립때 우문육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군신들의 거듭된 요청으로 받아들였다. 명제는 천왕으로 즉위한 이후에 사촌형이었던 우문호를 [[태사]](太師)로, 동생 [[우문옹]](宇文邕)을 주국으로 임명해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독고씨(獨孤氏)[* 명경황후(明敬皇后)로 추존]를 황후로 세웠지만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다. 우문호가 독고씨의 아버지인 독고신을 죽였기 때문에 독고씨도 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559년, 명제가 이미 성년의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그의 섭정을 맡고 있었던 우문호는 군사권을 제외한 공식적인 권한을 명제에게 넘겨주었다. 명제는 굉장히 총명해서 친정을 시작한 이후, [[북위#s-2|북위]] [[효문제]]가 [[낙양]]에 천도한 이후부터 살았던 [[하남]]의 백성과 북주가 [[관중#s-4|관중]]에 도성을 건설한 이후에 관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경조인'(京兆人)으로 부르기로 했다. 또한 [[중원]]의 강력한 국가를 만들려고 태사 우문호를 [[옹주(중국)|옹주]][[목(동음이의어)|목]]으로 임명하여 통치체제의 강화를 도모했다. 그해에는 [[에프탈]]과 [[돌궐]](쾩튀르크)의 사신이 내조하고 조공을 했다. [[파일:북제-남진.png|width=100%]] '''557년경 남북조의 형세''' [[진(육조)|남진]]군이 침공해 왔을 때는 스스로 갑옷을 착용하여 태백산(太白山)의 동쪽에서 요격했다. 이어서 모용선비족인 [[토욕혼]]이 침공을 하자 이것은 [[사마|대사마]](大司馬) 하란상(賀蘭祥)이 군대를 이끌고 요격하는 등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북주는 오늘날의 호남성(湖南省) 일대를 차지했다. 또 <주력>(周暦)을 만들었고, 주국인 보성공(輔城公) 우문옹을 [[사공|대사공]]으로 임명했다. 전대인 [[서위]]시대에 죄를 지었을 경우엔 처벌하지 않았고, 이후 계속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는 법으로 처벌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하란상은 요양(洮陽)과 홍화(洪和)를 공격했고 토욕혼은 병력의 열세로 도망을 갔다.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에서 사신이 내조했고 조공했다. 심하게 장마가 일어나자 공경, 경, 대부, 선비뿐만 아니라 각지의 주목, 군수, 백성에 이르기까지 직접 상주문을 올렸고 이를 해결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재해가 일어난 곳에 관리를 파견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559년, 이렇게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자, 명제는 다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기로 하고 공식적으로 천왕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아버지 우문태를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했고, 연호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명제는 관대한 성격으로 인정이 많고 도량이 컸으며 친족을 아껴 동생이었던 우문옹과 특히 사이가 좋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많은 책을 읽었다. 글을 짓는 것을 장려하고 시문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즉위한 이후에는 학자 80명 이상을 불러서 북주의 역사서를 간행했다. 자신도 많은 책을 수집했고 10권의 저작을 남겼다. === 독살 === 권신 우문호는 명제가 현명하고 능력있는 식견이 있는 군주인 것을 알고는 자신의 권력이 위협당할까봐 명제를 모살하기로 결심하고, 황실 요리사인 이안(李安)을 시켜 음식에 독을 타도록 했다. 이를 먹고 병에 걸린 명제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 "생사는 필연이다. 나는 부덕했지만 독서를 했고, 성인 및 현인들과 논의를 하여 민심을 알려고 노력했으나 아직도 알지 못한 것이 있다. 군신들이 아버지인 태조 우문태를 모시고 일해 준 것을 감사하고 있다. 나는 재위한지 4년이 지났지만 아직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모두 협력하여 태조 황제의 유지를 완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자식들은 아직 어려서 나라를 다스리는 소임에는 부족하다. 나의 동생인 우문옹은 너그럽고 인정이 많으며 도량이 크다. 우문옹을 지지하여 천하를 차지하기를 바란다." ''' 라는 유언을 남긴채 27세로 붕어했다. 사후에 동생 우문옹(宇文邕)이 [[무제(북주)|무제]]로써 뒤를 이었으며 무제는 12년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 끝에 두 형을 죽인 원수 우문호를 죽이고('''천화정변''', 572. 3) 황권을 회복한 뒤 [[북제]]까지 멸하여 [[화북]]을 통일시키는 업적을 세운 [[명군]]이 되었다. == 일화 == [[수문제]] 양견의 비범함을 미리 알아본 인물이기도 한데, 이건 그의 아버지인 우문태도 마찬가지였다. 몰래 관상가를 시켜 양견의 관상을 보고 오라고 했는데, 황제가 될 관상임을 알아본 관상가가 일부러 명제 우문육에게 대장군 감 정도일 뿐이라고 속여서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 대중매체에서 == 2018년 드라마 <독고천하>에서 멧돼지에 놀라 기절할 정도로 심약한 것으로 표현된다. 독고신의 딸 독고반야와 혼인했다. 권신 우문호의 독에 의하여 건강이 나빠진 명제는 우문옹에게 양위했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주서)] [include(틀:북사)]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독살된 인물]][[분류:534년 출생]][[분류:560년 사망]][[분류:위린시 출신 인물]][[분류:서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