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대만 관련 문서)] ||<#ffffff> '''{{{+2 美麗島事件}}}''' || ||<#c0c0c0> {{{+1 Formosa Magazine incident[* 혹은 Kaohsiung Incident.]}}} || ||
[[파일:Y3Ti404.jpg|width=100%]]|| || 사건의 주역 7인[* 주요 투옥자는 8명이었으나 밥정에는 7명만 섰는데 린이슝은 당시 건강문제로 인해 잠시 출옥한 상황이었다. 이 사진은 징메이 인권공원에서도 볼 수 있다.] || [목차] == 개요 == || [[파일:formosa.webp|width=100%]] || [[1979년]] [[12월 10일]] [[중화민국]] [[가오슝시]]에서 메이리다오[* [[타이완 섬]]의 [[포르투갈어]] 별칭인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의 중국어 번역어로 대만을 가리키는 미칭이다.] 잡지 주최로 일어난 [[민주화]] [[시위]]가 당국 [[경찰]]과 충돌하게 되어 주최자가 투옥된 [[사건]]. [[중국국민당]] 일당독재가 이루어지던 당시의 대만 정부에서는 '가오슝 폭력사건 반란안'(高雄暴力事件叛亂案)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의 주동자와 [[변호사]]들이 모여서 세운 [[정당]]이 바로 2000년 3월 [[제10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진보당|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이고 [[2016년]] 재집권에 성공한 현 대만의 집권여당이다. [[가오슝 첩운]]의 [[메이리다오역]]의 명칭은 이 사건에서 유래했다. 명명 당시 [[가오슝]] 시장은 이 사건의 주동자들 중 한 명이었던 [[천쥐]]였다. 전체적으로 한국의 [[5.18 민주화운동]]과 유사하다. == 상세 == || [[파일:external/0media.tw/6.jpg|width=100%]] || || 메이리다오 잡지 전 권[* 1979년 8월 창간하여 11월 마지막 호 발간 후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폐쇄되었다.] || 1979년 12월 10일 [[대만]]의 급진 성향 민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잡지]] 메이리다오(美麗島)를 창간했다. 참고로 당시 대만은 [[장제스]]의 사망 3년 후인 1978년 그의 아들 [[장징궈]]가 후임 [[대만 총통|중화민국 총통]]으로 취임한 지 1년째 였는데 마침 [[미국]]이 [[중국]]과의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따라 대만과 [[국교단절|단교]]하면서 상당한 정치-사회적 불안이 조성되었다. || [[파일:external/mjlsh.usc.cuhk.edu.hk/1.jpg|width=100%]] || [[파일:external/www.bookrep.com.tw/p3-4.jpg|width=100%]] || [[파일:external/www.taiwanmag.net/kaohsiung-incident-police3.jpg|width=100%]] || 이 와중에 메이리다오 잡지사를 위시한 집회 주최측은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맞춰 야간 집회 허가를 신청했지만 국민당 당국은 이를 불허했다. 왜냐하면 당시 대만은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 정부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9년부터 [[대만 계엄령|계엄령]]이 쭉 지속되고 있었는데 외견상으로는 특정지역 내부의 일회성 집회 사건 정도로밖에 안 보이겠지만 수십년 동안 계엄 체제가 계속되던 당시 대만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이 정도의 집회, 시위도 꽤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당시 [[가오슝]]의 분위기는 한국으로 치자면 시위대 발포, 유혈진압만 없었을 뿐이지 [[5.18 민주화운동|1980년 5월의 광주]]에 가까웠던 셈이다. 하지만 당국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집회는 실행되었고 결국 국민당 당국이 헌병을 포함한 물리력을 대거 동원하여 강제 해산에 나서면서 시위측과 진압 병력 사이의 물리적 충돌로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동자측인 메이리다오 잡지사의 핵심 인사 다수가 투옥되어 군법 재판에 회부되었다. [[파일:external/www.open.com.hk/1304p42.jpg|width=50%]] 메이리다오 사건 당시 [[변호인]]단의 모습. 참고로 아랫줄 왼쪽에서 다섯번째부터 [[셰창팅]], [[쑤전창]], 그리고 훗날 [[민주진보당|민진당]] 최초의 총통으로 당선되는 [[천수이볜]]이다. 천수이볜은 이 사건의 변호인으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했다. == 주요 투옥자 == [[파일:external/3.bp.blogspot.com/%E7%BE%8E%E9%BA%97%E5%B3%B6%E4%BA%8B%E4%BB%B61jpge.jpg|width=70%]] * 장준홍 : [[징역]] 12년. * 야오자원 : [[징역]] 12년. 이 사람의 [[변호사]]가 [[셰창팅]]과 [[쑤전창]]으로, 이 두 변호인은 이후 [[민주진보당]]의 [[주석(직위)|주석]]을 지냄. * [[스밍더]] : [[무기징역]]. 이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민주진보당]]의 주석(대표)을 지냄. * 황신제 : [[징역]] 14년. 이후 [[민주진보당]]의 주석(대표)을 지냄. 참고로 이 사람의 [[변호사]]가 [[천수이볜]]이었다. * [[천쥐]] : [[징역]] 12년. 1986년 [[가석방]]. 이후 이 사건의 무대였던 '''[[가오슝]]의 [[시장(공무원)|시장]]'''이 되었다. 2014년 선거에서도 승리하면서 3선에 성공해 재직했다. [[제14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2016년 총통선거]]에서 '''[[차이잉원]][* 이 선거에서 승리해 현재 [[대만 총통]]으로 재임 중이다.]의 런닝메이트'''로도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남성표를 의식해''' 정부총통 후보자를 모두 여성으로 지명하는 것을 꺼린 민주진보당 지도부에 의해 실제 런닝메이트는 남성인 [[천젠런]]이 되었지만. 차이잉원 총통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어 가오슝을 떠났는데 후계자 천치마이가 [[중국국민당]] [[한궈위]]에게 밀려 시장에서 낙선하는 변고가 있었다. * [[뤼슈롄]] : [[징역]] 12년. [[특별사면]]으로 석방. 이후 [[천수이볜]] [[정권]]에서 부총통으로 재임. * 린홍쉬안 : [[징역]] 12년. * 린이슝 : [[징역]] 12년. 투옥 중에 [[린이슝 일가 피살 사건]]으로 어머니와 두 딸을 잃었고 이후 [[민주진보당]]의 [[주석(직위)|주석]](대표)을 지냄. == 기타 == * [[대만의 민주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한국에선 [[부마민주항쟁]]이나 [[5.18 민주화운동]]과 비유되기도 한다. 시기상으로도 부마항쟁으로부터 약 2개월 후 벌어진 사건이라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 이 사건의 도화선이 된 메이리다오잡지사(美麗島雜誌社)는 [[메이리다오역]]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역 2번 출구 남측에 위치해 있으며 구글 지도에서 美麗島雜誌社高雄服務處原址로 해당 위치를 검색할 수 있다. 해당 건물은 2000년대 중반까지 상가로 쓰였다가 리모델링 후 오랫동안 공실이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에는 가구회사 매장이 들어와 있다. 대로변에 있음에도 옥외광고판이 잘 안 팔리는 편이라 선거 때만 사용되는데 의외로 중국국민당 입법위원 후보가 오랫동안 광고를 게시했다. * [[파일:external/pic.pimg.tw/1421933597-386744367_n.jpg|width=30%]][[파일:external/www.hellotw.com/101163320.jpg|width=35%]] 당시 사건의 주동 인사들이 수감, 군법재판을 받았던 군 형무소는 대만의 민주화를 기리는 문화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https://okspice.tistory.com/m/163|'징메이 인권문화공원'(景美人權文化園區)]]이며 위치는 [[신베이시]] 신뎬구 부흥로(新北市 新店區 復興路) 쪽이다. 이곳은 메이리다오 사건 외에도 [[장제스]], [[장징궈]] 총통 시절 반(反)국민당,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투옥되었던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서대문형무소]]와 남영동 대공분실이 각각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전환된 것과 비슷한 셈. 타이베이 첩운 쑹산신뎬선의 [[다핑린역]]에서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갈 수 있다. * [[파일:external/static.ettoday.net/d849185.jpg|width=50%]] 2014년 12월에는 사건 발생 35주년을 맞아 대만의 정계 원로 및 민주화 유공자가 된 당시의 주요 인사들이 가오슝에서 기념 모임을 함께했다. 특히 2016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재집권이 기대되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분류:장징궈 시대]][[분류:1979년/사건사고]][[분류:대만의 민주화 운동]][[분류:가오슝시의 사건사고]][[분류:대만의 정치적 억압]][[분류:민주진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