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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마이클 아티야의 주요 상훈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대영제국 훈장(기사작위 수훈자들-남자))] ---- [include(틀:역대 왕립학회장)] ---- [include(틀:역대 필즈상 수상자)] ---- [include(틀:역대 아벨상 수상자)] ---- }}} || ||<-2> '''OM PRS FRSE FMedSci FAA FREng[br]{{{+1 마이클 아티야 경}}}[br]Sir Michael Atiyah'''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SlOyDuYjWSanlK22IPlR3T_S5M04uGD3ibr8PSN0YNg.jpg|width=100%]]}}} || || '''본명''' ||마이클 프랜시스 아티야[br]Michael Francis Atiyah||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영국)]|| ||<|2> '''출생''' ||[[1929년]] [[4월 22일]]|| ||[[잉글랜드]] [[런던]] [[캠던]] 햄스테드|| ||<|2> '''사망''' ||[[2019년]] [[1월 11일]] (향년 89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학력'''[* [[https://celebratio.org/Atiyah_MF/article/46/|참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s-5.1.14|트리니티 컬리지]] {{{-2 ([[학사]] / 1952년) ([[박사]] / 1955년)}}}|| || '''소속''' ||[[케임브리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s-5.1.3|펨브록 컬리지]] 조교수[br][[케임브리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s-5.1.14|트리니티 컬리지]] 학장[br][[레스터 대학교]] 명예총장[br][[에든버러 대학교]] 명예교수|| || '''지도 교수''' ||W. V. D. 호지[br]Sir William Vallance Douglas Hodge || || '''업적''' ||아티야 준군[br]아티야-싱어 지표 정리[br]ADHM 작도[br]프레드홀름 가군[br]K-이론[br]KR-이론|| || '''상훈''' ||[[필즈상]] {{{-2 (1966)}}}[br]로열 메달 {{{-2 (1968)}}}[br]드모르간 메달 {{{-2 (1980)}}}[br][[기사작위]] {{{-2 (1983)}}}[br]코플리 메달 {{{-2 (1988)}}}[br][[아벨상]] {{{-2 (2004)}}}|| || '''종교''' ||[[무종교]][* John D. Cook, “[[https://www.johndcook.com/blog/2013/09/24/interview-with-sir-michael-atiyah/|Interview with Sir Michael Atiyah]],” johndcook.com, 2013년 9월 24일.]||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의 수학자. 20세기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인물로, 기하학의 각종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긴 대가이며 수리물리학에서도 많은 연구를 남긴 학자다. == 생애 == 성을 보면 알겠지만 아시아계이다. 정확히는 아버지 셀림 아티야(1903–1964)가 [[레바논]] 정교회인으로 레바논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유학갔으며 영국 국적을 얻어 에드워드라는 영어 이름을 지었으며 스코틀랜드 여성 진 레벤스와 결혼해 4명 자녀를 두었다. 동생인 패트릭 셀림 아티야(1931–2018)는 변호사로 유명해 [[옥스퍼드 대학]] 법학과 교수 및 [[하버드 대학]] 법학과 로스쿨 교수로 일한 바 있다. 1966년 [[필즈상]]을 수상했다. 2019년 1월 11일, 89세 나이로 타계하였다. 사망 몇 개월 전에 [[리만 가설]]을 증명했다며 공개 발표를 하여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나 완전히 틀린 엉터리 증명이었다. 생전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들을 아는 수학도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언급을 회피하고 대부분의 언론들도 아무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2022년 출간된 [[김민형]] 교수의 책 <수학의 기쁨 혹은 가능성>에서 김민형 교수와 말년의 아티야가 교류하던 이야기가 부고와 같은 형식으로 실려있다. 말년의 리만 가설 소동에 대해 김민형 교수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으나, 아티야는 말년에 수학과 물리학을 통합할 수 있는 통일 이론이 존재할 것만 같은 영감에 늘 흥분한 상태였으나 그 열정이 지나치며 수학적 오류를 제법 범해 젊은 수학자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고, 수학적 영감만을 중시하느라 구체적 논리의 오류는 중요치 않다는 외골수적 태도를 보였다고 회고했다. 아티야가 사망하기 한 달 전까지 이어진 교류에서 스스로도 여러 이론과 난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냈다는 영감을 받았으나 이는 지나치게 뜨거워 궁극적으로 성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영감에 불과하다며 자신의 연구에 대해 냉철함을 잃지 않는 태도가 인상적. == 리만 가설 증명 도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리만 가설, 앵커=마이클 아티야 미세구조상수 증명법)] == 기타 == [[가환대수학]] 책의 저서로 유명하다. 책의 길이가 150페이지도 안 된다. 즉 개념 설명이 짧고, 연습문제가 곧 진가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에 열린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의 1심 재판 당시 재판부로부터 전문가 의견을 요청받은 대한수학회와 고등과학원이 ‘의견을 낼 수 없다’고 회피하자 "한국 과학의 국제적 입지와 평판을 위한다면 김 박사 사건을 조사하고 김 박사에게 합당한 지지를 보내는 것이 좋다"라는 취지의 항의성 서한을 대한수학회에 보냈다. [[분류:1929년 출생]][[분류:2019년 사망]][[분류:영국의 수학자]][[분류:캠던 출신 인물]][[분류:필즈상 수상자]][[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트리니티 컬리지]][[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재직]][[분류:옥스퍼드 대학교 재직]][[분류:에든버러 대학교 재직]][[분류:영국의 무종교인]][[분류:레바논계 영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