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오스트리아의 공주]] [[분류:합스부르크 가문]] [[분류:1680년 출생]] [[분류:1741년 사망]][[분류:린츠 출신 인물]][[분류:네덜란드 총독]][[분류:카푸친 교회 안장자]] [include(틀:역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 ||<-3>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br]{{{+1 마리아 엘리자베트}}}[br]Maria Elisabeth von Österreich''' || ||<-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Jan_van_Orley_-_Maria_Elisabeth_of_Austria.jpg |width=100%]]}}} || ||<|2> '''이름''' || 독일어 ||마리아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br](Maria Elisabeth von Österreich) || || 프랑스어 ||마리 엘리자베트 도트리슈[br](Marie-Élisabeth d'Autriche) || || '''출생''' ||||[[1680년]] [[12월 13일]][br][[오스트리아 대공국]] [[린츠]] || || '''사망''' ||||[[1741년]] [[8월 26일]] (향년 60세)[br][[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에노]]주 모를란벨츠 마리몽트 성 || ||<|2> '''재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 ||||[[1725년]] [[가을]] ~ [[1741년]] [[8월 26일]]|| || '''아버지''' ||||[[레오폴트 1세]] || || '''어머니''' ||||[[팔츠|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 || '''형제''' ||||[[요제프 1세]], 마리아 안나, 마리아 테레지아, [[카를 6세]],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막달레나 || || '''종교''' ||||[[가톨릭]] || [목차] [clearfix] == 소개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황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딸이자 남동생 [[카를 6세]]의 대리인으로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다.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스페인령 네덜란드]]-[[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왕족 여성 총독 전통을 계승한 인물이며, [[왕비]]나 [[왕대비]]로서 [[섭정]]한 것도, [[여군주]]로서 즉위한 것도 아니면서 공식적으로 정치적 직책을 맡아 통치할 권리를 지녔던 [[18세기]] 여성 통치자의 드문 사례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생애 == === 어린 시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ria_Elisabeth_von_Österreich_-_1680–1741.jpg|width=100%]]}}} || ||<:> {{{#fff '''3~4세경의 마리아 엘리자베트'''}}}|| 아버지 [[레오폴트 1세]]와 어머니 [[엘레오노레 막달레네]]가 [[전염병]]을 피해 [[빈(오스트리아)|빈]]을 떠난 탓에 [[린츠]]에서 태어났다. [[제2차 빈 공방전]] 등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을 겪으며 성장한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총명한 아이였으며 당시 통치 가문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도 부모로부터 큰 인정을 받았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배워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빈 대학교]]의 교수들과 수사적 논쟁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녀는 또한 유럽 정치에 정통하여 [[1698년]]에 왕가의 역사를 다룬 라틴어 서적을 쓰기도 하였다. === 총독 재임 이전 === 한 때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의 혼담이 고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손자에게 영향을 미쳐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이익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경계한 [[루이 14세]]의 우려로 결렬되었다. 그녀는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외모가 손상된데다 적합한 결혼 상대도 없어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 [[데릴사위]]로 마땅한 인물이 없어 정치적 직책과 [[결혼]]을 병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문을 위한 [[정략결혼]]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대신 가문을 위한 정치적 직책을 맡을 운명이었다. 그녀는 스페인 및 티롤 총독으로도 고려되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재임할 수 없었고, 결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임하게 되었다.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임하기 이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이는 선대 총독이었던 [[사부아 공자 외젠]]의 정책 실패에 그 원인이 있었다. 외젠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직접 현지에서 통치하지는 못했고, 대신 전권대사인 프리에 후작 에르콜레 루도비코 투리네티를 내세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프리에 후작의 정책은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폭정으로 간주되어 현지인들로부터 큰 증오를 샀고]], 프리에 후작을 지지하던 외젠은 결국 총독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주였던 [[카를 6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의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군인 총독 대신 누나인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다음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그 결과 일개 미혼 여대공이었던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황제의 대리인인 총독으로서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 총독 재임 === [[1725년]] 새롭게 총독이 된 마리아 엘리자베트의 [[브뤼셀]] 입성은 여성이라는 그녀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의 [[왕족|높은 출신]]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지닌 남성으로서의 정치적 성별 덕분이기도 했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을 지니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 따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황후가 아닌 황제처럼 대우받았다. 또한 그녀의 미덕이 영향을 받지 않는 한 행동, 의식, 외교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카를 6세]]로부터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았는데, 군주의 승인을 통해 독립적으로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권리, 각 지방의 총독을 임명할 권리, 메헬렌 대평의회 및 담보 공의회의 위원을 임명할 권리 등을 지니고 있었다.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권위적으로 통치하는 강력한 행정가이자 강한 책임감을 지닌 인기 있는 총독으로 묘사되었다. 그녀는 카를 6세가 명령한 조치들에 불복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관점을 내세워 설득하기도 하였다. [[1718년]] 브뤼셀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을 사면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 등 그녀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관계 개선에 영향을 끼쳤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정부의 권위를 희생시켜 중앙 권력을 확대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강한 신앙심을 지닌 인물로, 궁핍하고 병든 사람들을 복지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 많은 돈을 썼고 종교 행사와 [[순례]]에 참여해 인기를 끌었다. 매년 [[성목요일]]이면 그녀는 가난한 노부인 12명의 발을 씻어 주고, 즐겁게 해 주고, 새 옷을 입혀주었다. 한편 편협한 종교관을 지니고 있어 [[이단]]으로 분류된 신앙을 강하게 탄압하기도 하였는데, 이단을 추방하고 검열을 강화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녀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등 외부의 분쟁으로부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유지된 평화 덕분에 무역과 산업은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나 카를 6세가 추진한 [[1713년 국사조칙]] 통과의 대가로 그녀는 성공적이었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1727년]]에 정지, [[1731년]]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인 카를 6세와는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1737년]] 카를 6세가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해임하고 [[로렌 공국]]을 잃은 사위 [[프란츠 슈테판]]을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 추진되었더라면 그녀는 총독직을 잃고 [[빈(오스트리아)|빈]]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결국 프란츠 슈테판이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이 되면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계속 통치하게 되었다. 카를 6세의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제국]] 계승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조카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하였으나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741년]] [[8월 26일]] [[에노]]주 모를란벨츠에서 사망하였다. 그녀의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와 그녀의 남편 [[카를 알렉산더]]가 총독으로 재임했다. == 가족관계 ==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마리아 엘리자베트[br]{{{-2 (Maria Elisabeth von Österreich)}}} ||<|6> [[레오폴트 1세]][br]{{{-2 (Leopold I)}}} ||<|3> [[페르디난트 3세]][br]{{{-2 (Ferdinand III)}}} || || [[페르디난트 2세]][br]{{{-2 (Ferdinand II)}}}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br]{{{-2 (Maria Anna of Bavaria)}}} || ||<|3>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br]{{{-2 (Maria Ana of Spain)}}} || || [[펠리페 3세]][br]{{{-2 (Felipe III)}}} || ||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의 마르가레테[*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다.][br]{{{-2 (Margarete of Austria-Styria)}}} || ||<|7> [[엘레오노레 막달레네|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br]{{{-2 (Eleonore Magdalene of Pfalz-Neuburg)}}} || ||<|3> [[팔츠 선제후국|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br]{{{-2 (Philipp Wilhelm, Elector Palatine)}}} || || 노이부르크 궁정백 볼프강 빌헬름[br]{{{-2 (Wolfgang Wilhelm, Count Palatine of Neuburg)}}} || || [[바이에른]]의 막달레네[br]{{{-2 (Magdalene of Bavaria)}}} || ||<|3> [[헤센|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br]{{{-2 (Elisabeth Amalie of Hesse-Darmstadt)}}} || || [[헤센|헤센다름슈타트]] 방백 게오르크 2세[br]{{{-2 (Georg II, Landgrave of Hesse-Darmstadt)}}} || || [[작센 선제후국|작센]]의 조피 엘레오노레[br]{{{-2 (Sophie Eleonore of Saxony)}}} || == 기타 == * 사망 장소이기도 한 마리몽트 성을 선호하여 자주 시간을 보냈고, [[연회]]나 [[무도회]]보다는 [[사냥]]을 즐겼다. * 조카이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후임 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 측에서는 마리아 엘리자베트에게 그닥 우호적이지 않았고, 그녀가 사망하기 전인 [[1741년]] [[4월]]부터 [[카를 알렉산더]]를 공동 총독으로 임명했다.